쥐 죽은듯이 잠잠하라
sar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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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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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인 지난 목요일 오후 (한국시간) 이붕우 합참 공보실장 명의로 독도방어훈련 계획이 발표됐다. 이 발표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허튼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발표문은 올해 실시하는 독도방어훈련을 해군이 아닌 해경에서 주도한다는 점을 누누히 강조했다.
방어훈련 주도를 군이 아닌 해경이 한다는 이유가 궁색하기 짝이 없다. ‘외국 민간인의 독도침범’을 가상상황으로 한 훈련이어서 해경이 주도한다는 변명이다. 영토방어를 주도하는 주체가 군이냐 경찰이냐 하는 문제는 영토주권과 관련하려 명백히 차이가 나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몹시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2 만톤 급 강습상륙함까지 동원하여 독도여행을 다녀온 이명박이 이끄는 정부가 한 발표치고는 매우 이상하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합참 공보실장을 내세워 굴욕적으로 후퇴한 독도방어훈련 계획을 발표하기 3 일 전인 지난 9 월 3 일에는 뉴스위크 아시아판에 의미심장한 칼럼이 하나 실렸다. ‘Why Japan and South Korea Are Feuding Over a Cluster of Rocks’ 라는 제목의 칼럼은 ‘2006 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독도에 무장 함정을 파견했을 때 미국이 어떤 식으로 남 코리아 정부를 압박해서 주권수호의지를 죄절시켰는지를 언급했다.
2006 년 독도 무장함정 파견 사건이란 2006 년 4 월, 독도에서 해양조사활동을 벌이는 국립해양조사원 소속 선박을 해상보안청 소속 함정의 위협이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해양경찰경비함을 독도 현장에 보낸 사건을 말한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 함정이 조사활동을 방해할 경우 발포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Thomas Schieffer 당시 주일미국대사가 본국 정부에 “정신나간 한국 정부가 미친행동”을 하지 않도록 압력을 넣어달라는 막말 전문을 보냈다는 사실이 위킬릭스 폭로에 의해 드러났고, 워싱턴 수뇌부는 알렉산더 버쉬바우 당시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노무현 정부를 굴복시키는 바람에 그 해 7 월 초, 해양조사선이 아무런 조사활동을 하지 못한 채 독도를 그냥 통과할 수 밖에 없었다는 창피한 사실도 밝혀졌다.
뉴스위크 칼럼은 2006 년 4 월부터 7 월까지 3 개월간에 걸쳐 벌어졌던 독도분쟁 사건과 2012 년 8 월 10 일에 벌어졌던 ‘이명박 독도 day tour’ 사건을 함께 언급하면서 비교했는데, 비단 일본계 칼럼니스트가 쓴 이 칼럼 내용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 두 사건은 서로 비교해서 분석해 볼 만하다.
이 두 사건은 적어도 한국 정부가 결국 일본과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간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점이 많으면서도, 사건이 발생한 동기에 있어서는 서로 그 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사실 2006 년 봄부터 여름까지 전개됐던 한일간의 독도분쟁은 당시 노무현 정부가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비장한 결단아래 주도한 사건이어서 나중에 위킬릭스에 의해 그 전모가 폭로될 때 까지 많은 사람들이 사건의 전말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비록 결과가 참담했다고 하더라도 당시 한국 정부의 입장 후퇴를 마냥 비난만할 수는 없는 사정이 있다. 거기에 비해 2012 년 8 월 10 일 사건은 그 동기부터가 황당하고 불순했다.
광복절을 닷새 앞 둔 2012 년 8 월 10 일.
미국 시콜스키社가 제작한 S-92 헬리콥터 한 대가 요란한 프로펠라 소리와 함께 청와대 상공으로 솟아 올랐다. 적외선 감시장치와 미사일 방어교란 장치 등 첨단 장비를 장착한 이 헬리콥터는 서울 상공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날아갔다.
대통령 전용 헬기인 S-92 가 이륙하자마자 AEW&C 공중조기경보통제기가 KF-16, F-15K 등 전투기들을 지휘하며 ‘코드 원’ 공중경호를 시작했다. 만재배수량 1 만 8800 톤급 강습상륙함 독도함이 공군 제 1 호 헬기 (대통령 전용헬기)의 비상착륙에 대비해 울릉도와 독도 중간 동해상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 날 대통령 전용헬기의 착륙 목표 지점은 울릉도와 독도였다.
한국, 즉 남코리아 단독정부 수립 이래 최초로 단행한 대통령의 독도방문이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전격적으로 이루어 진 것 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미리 예고되지 않은 깜짝쇼였는지는 몰라도 일본과 미국에서는 그들 나라의 정부는 물론 언론까지도 미리 알고 있었던 사전 공개행사나 다름없었다. 한국 정부가 자기나라 국민에게는 ‘깜짝쇼’를 위해 비밀로 붙인 대통령 독도방문을 일본과 미국에게는 미리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은데, 2012 년 8 월 10 일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이명박 독도여행 사건’이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의문의 황당사건으로 기록될 지도 모르겠다.
그는 도대체 왜 독도에 간 것 일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쉽고 간단할 수 있다. 대답을 쉽게 찾으려면 상식의 함정에서 먼저 벗어나야 한다. 상식의 함정이란 다른 게 아니다. 적어도 한 나라의 대통령의 돌발행동 뒤에는 고급정보에 접근이 차단된 일반인들이 알 수 없는 무슨 신통방통한 음모적 발상이 있지 않을까하는, 즉 상대에 대한 과대평가’가 바로 그 함정이다.
그가 독도에 간 이유는 명료한 것 같다. 임기만료를 대 여섯 달 앞두고 어딘가 가기는 가야겠는데 어서 오라고 불러 주는 데가 한 군데도 없으니 “에라 독도라도 가자” 하고 간 게 틀림없어 보인다. 한 마디로 꿩 대신 닭을 잡아먹는 참담한 심정으로, 협상통로가 완전히 차단된 북코리아에는 자기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갈 가망이 없으니 대신 독도여행을 선택한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국가정보원이나 외교통상부에 소속된 전문 테크노크라트 그룹은 청와대에서 떨어진 대통령 독도 방문 계획을 전달받고는 “갑자기 이게 웬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소린가” 하고 어안이 벙벙해하다가 펄쩍뛰며 강력하게 반대 의견을 피력했을 것이다. 그들은 대통령의 독도방문이 얻는 것 보다는 잃는 것이 훨씬 많은 위험천만한 게임임을 간파하고 있었을테니 말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 즉 시종일관 미국의 요구에 굴복하여 한미일 3 자동맹을 위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까지 비밀리에 추진하던 그가 왜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독도로 날아간 것인가 하는 질문 따위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딴 의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 헤메는게 아니라, 한국 대통령의 일관성이 결여된 ‘이상 행동’이 초래한 중대한 위기를 간파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중대한 위기란 독도분쟁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사태를 말한다.
우리가 오해하는 게 하나 있다. 왜 한국 정부가 독도가 분쟁지역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가에 대한 이유가 그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이유를 ‘독도는 당연히 우리 땅이므로 분쟁지역화 할 필요 자체가 없기 때문” 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대답이 전혀 아니다.
한국 정부,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 한국 정부를 쥐고 흔들고 있는 한국의 종미기득권집단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독도가 분쟁지역화함으로써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문서 두 개가 공개마당에 등장하여 독도를 둘러싼 말썽과 흑막이 만천하에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미국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하는 LIANCOURT ROCKS 비밀조약은 기본적으로 1905 년 7 월 29 일 미국 육군장관 윌이엄 하워드 데프트와 일본제국내각 총리대신 까쓰라 다로간에 멪어진 도쿄협약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문제는 1951 년 9 월8 일 San Francisco War Memorial and Performing Arts Center에서 일본과 제 2 차 세계대전 승전 48 개국 사이에 멪어진 대일강화조약 (Treaty of Peace with Japan) 으로 미일간의 독도밀약이 국제법적으로 그 근거가 더 확고해 졌다는 것인데, 당시 전쟁중이던 이승만 정권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를 반환도서목록에 포함시키지 않은 부분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미국에 목줄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요구와 압력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소극적 주권포기행위에 비해 박정희 정권의 주권포기 행위는 좀 더 적극적이었다. 독도주권을 포기하는 한일간의 비밀협약은 1965 년 11 월 일본 자민당 의원 우노 소스께와 한국 국무총리 정일권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들은 양국 정부간의 협약을 논의하고 체결하면서 정부 청사나 안가가 아닌 성북동의 민간인 자택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의 집)에서 만났다. 우노 소스께 특사는 본국 수상과의 전화협의를 해야 할 때마다 주한미군사령부 구내 전화를 사용했다. 물론 이들은 대리인이었고 협약 주체는 당시 일본 수상 사또 에이사꾸와 한국 대통령 박정희였다.
독도수역을 울릉도를 기준으로 한 EEZ (배타적 경제수역) 이 아닌 한일공동관리수역으로 설정하되 한국정부가 임시로 관리하도록 일본이 양해한 점, 독도의 관리를 영토수호 개념인 군대가 아닌 해양경찰에 맞긴 점 등은 모두 이 비밀협약에 근거한 행정절차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 독도밀약의 존재로 인해 현재 독도의 국제법상의 지위는 대한민국의 영토도 아니고 일본의 영토도 아닌 애매모호한 것으로 되어 버렸다. 양국이 동시에 영토권을 주장하는 ‘영유권 미정지’ 로 그 국제법상의 위치가 전락해 버린 것이다.(파란부분은 싸르니아의 또 다른 글에서 인용)
독도문제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될 경우 일본이 유리한 이유는 한국이 가지고 있지 않거나 내용상 한국측에 절대 불리한 협약문서들을 일본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이 독도주권을 지키는 길은 독도를 분쟁지역화하여 국제법의 개입을 유도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1965 년 군사정권에 의해 골방에서 몰래 만들어 진 독도밀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독도에 해군을 파견하는 것 뿐이다. 요란하게 떠들것도 없이 신속하고 조용하게 처리하면 된다.
독도분쟁 과정에서 미국과 일본의 파상공격앞에 노무현 정권은 조용하게 약 3 개월을 버텼다.
이명박 정권은 26 일만에 백기 항복을 한 게 분명하다. 독도주권을 지키는 일은 종미친일집단의 후계자인 이명박 정권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남은 다섯 달 동안 쥐 죽은듯이 있다가 나가 주었으면 좋겠다.
그 종류도 가지가지인 미친 짓좀 그만 하고.
2012 9.8 (MST) sar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