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만 수 천 명이 죽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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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잘못전해져 온 낭설이 있다. 6 월 항쟁 당시 전두환이 국민들에게 겁을 주고 민정당 대선후보지명자 노태우에게 직선제 수용을 압박하기위한 심리적 위협수단으로 계엄령선포를 활용했다는 헛소리가 그것이다. 이 낭설은 2017 년 출간된 전두환 회고록에서도 그대로 표절되었다.
전두환은 개발새발 써서 내놓은 소위 ‘회고록’에서 당시 계엄령선포위협이 민주화세력과 직선제 수용을 머뭇거리던 노태우 진영을 동시에 압박하기 위한 양동작전이었다는 요지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의 직접지시로 작성되어 육군참모총장 박희도를 통해 32 개 실전부대 지휘관들에게 하달된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 87-4 호 문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 전두환이 민주화세력과의 최후의 일전불사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적어도 6 월 20 일 직전까지 전두환에게 계엄령은 정치적 위협수단이나 양동작전이 아니라 군사독재정권의 집권 2 기 출범을 성공시키기 위해 대량학살도 불사하겠다는 필사의 의지가 담긴 실제적 실천수단이었다. 당시 그에게 직선제 수용은 너무나도 위험부담이 큰 도박이었다.
기레기 논객들은 ‘DJ를 사면하면 YS와 반드시 대립하게 되어 있고, 양김이 동시출마하면 노태우에게 승산이 있다는 계산아래 모험심 강한 전두환이 일대 승부수를 띄운 것’이라느니 뭐니 하는 잠꼬대같은 소리를 몽유병자들처럼 중얼거려왔다.
그들은 결과론적 추론에 불과한 가설을 마치 현실에서 실제 벌어진 일인 것처럼 날조해서 들먹여 왔지만, 직선제 수용론은 적어도 6 월 20 일에 있었던 ‘결정적 사건’ 이후에 마지못해 급조된 플랜B에 불과했다. 6 월 20 일 전까지 전두환과 핵심측근들은 잔뜩 겁에 질린 개처럼 요란하게 짖어대며 국민과의 유혈전쟁을 밀어부쳤다.
34 년이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전두환과 핵심측근들이 추진했던 제 2 차 국민학살계획의 자세한 내용은 무엇이었고,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킨 6 월 20 일 있었던 ‘결정적 사건’은 무엇이었는지 그 전말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떠 올랐다.
1987 년 6 월 19 일과 20 일 양일간에 벌어진 사건을 제대로 이해해야 6.29 항복선언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전두환 사망을 계기로 불거지고 있는 공과론 운운하는 오합지졸들의 아우성을 일거에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전두환 일파가 지목한 3 개 주요타격목표도시들과 그 도시들에 투입을 계획했던 부대들의 면면과 성격을 보면 그들의 계획이 얼마나 실제적인 동시에 무모하면서도 잔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전략적 타격목표도시는 서울, 부산, 광주였다.
서울로의 진격이 예정되어 있던 부대는 제 20 사단 (결전부대), 제 30 사단(필승부대), 제 1 공수특전여단, 제 5 공수특전여단, 제 9 공수특전여단, 701 특공연대, 705 특공연대, 708 특공연대였다.
이 중 결전부대와 필승부대는 시가전에 용이한 기갑전투차량(APC)을 대량보유하고 있었으며, 기갑전투차량들은 14.5 mm 자동기관총과 유탄발사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3 개 공수특전여단과 3 개 특공연대는 선두통로를 개척하고 적후방에 침투하여 활동하거나 후방에 침투한 적 특수전부대를 타격섬멸하는 특수훈련을 받은 부대로 시민들을 상대로 특수전개념의 전투활동을 벌이겠다는 심사가 아니라면 시위진압작전에 투입할 수 없는 부대다.
전두환은 이 8 개 정예실전부대를 수도방위사령부로 배속하여 서울시민을 상대로 한 고강도 전투행위를 준비토록 하고 예비부대로 수도기계화사단(맹호부대)을 운용하도록 명령했다.
두 번 째 타격목표는 부산이었다.
전두환 일파가 가장 겁을 집어먹은 대규모 시위는 6 월 18 일 부산에서 벌어졌었다. 이 날 밤 중구 중앙동에 있던 부산직할시청이 시위대에 의해 완전포위되어 함락직전까지 몰렸고, 이 날 밤에 전개되었던 긴박한 사태가 전두환으로 하여금 위수령 정도가 아닌 비상계엄령 플러스 알파를 결심하게 했다. ‘비상계엄령 플러스 알파’란 헌정중단을 포괄하는 극단적 비상조치이며 친위쿠데타적 성격을 가지는 내란행위를 의미한다.
전두환은 부산을 아예 박살내버리겠다는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는 부산과는 아무런 연고나 상관이 없는, 수도권 최정예 충정부대인 제 26 사단 (불무리부대)과 제 3 공수특전여단을 제 11 군단에 배속함으로써 부산타격의 선봉대로 세웠다. 이 중 제 3 공수특전여단은 1979 년 부마항쟁과 이듬해 광주항쟁에서 유혈사태를 일으킨 전과가 있는 문제부대였다.
제11 군단은 하나회 핵심멤버이자 당시 부산-대구-광주 지역을 관할하는 제 2 군 사령관이었던 이종구 (육사 14 기)의 제안으로 이 때로부터 약 두 달 전인 1987 년 4 월 창설되었는데, 3 개 향토사단과 제 205 특공여단을 예하부대로 두고 있었다. 이 중 제 205 특공여단을 제외하면 실전부대가 없었는데, 완편기계화보병사단인 수도권 충정부대 제 26 사단과 제 3 공수특전여단을 예하부대로 배속시킴으로써 부산지역의 시위대타격 작전능력을 강화시켜주었다.
가장 경악할만한 부대배속은 광주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전두환은 광주지역에 파견할 부대로 1980 년 5 월과 똑같이 제 7 공수특전여단과 제 11 공수특전여단을 선정하여 제 31 사단에 배속했다. 제 7 공수특전여단은 1980 년 5 월 18 일부터 20 일까지 광주시내에서 특전대검과 몽둥이를 휘둘러대며 거리를 유혈이 낭자한 피바다로만든 폭력부대였고, 제 11 공수특전여단은 5 월 21 일 도청앞에서 시위대를 향해 집단발포한 학살부대였다.
전두환 일파가 1987 년 6 월, 특별히 이 두 부대를 일부러 골라서 광주지역에 파견하도록 작전명령을 내린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똑같은 방법으로 시위대를 타격 격파하되 7 년 전 처럼 두 번 다시 퇴각하지 말고 '명예'를 회복하고 돌아오라는 격려 겸 경고의 의미였던 것이다.
이 외에도 706 특공연대를 제 39 사단에 배속하여 마산에서 시위를 진압하도록 하고, 201 특공여단을 제 50 사단에 배속하여 대구에서 작전하도록 명령했다. 수도권 방어부대인 제 9 사단 (백마부대)은 제 9 군단에 배속하여 대전-충정지역에서 광범위한 시위진압작전을 하도록 명령했다.
이상과 같은 요지의 작전명령은 전두환이 직접 구상하여 작성했으며, 육군참모총장 박희도와 주무관인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이문석이 연대장급 이상 작전부대장들을 서울로 불러 올린 후 직접 하드카피로 전달했다.
부대이동은 19 일 새벽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때 놀라운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한미연합사의 전평시작전지휘를 받고 있는 부대들은 출발직전에 한미연합사에 부대이동계획을 통보했는데 한미연합사가 이들 부대의 이동을 불허하고 미국군측 통제관들이 헌병들을 동원하여 부대이동을 무력으로 차단한 것이다. 예상외로 강경했던 이 날의 미국측 태도는 전두환 일파를 크게 당황하게 만들었다.
6 월 항쟁이 시작되자 미국은 일찌감치 개스틴 시거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를 서울에 파견해 항쟁기간 내내 서울에 머물게하면서 사태를 적극적으로 통제했다. 주한미국대사관과 CIA 서울지국은 전두환 정권이 실제로 병력을 동원하여 시위를 유혈진압할 것이 확실시된다는 판단을 하고 실시간 취합된 정보를 본토에 있는 본부를 통해 백악관에 보고하고 있었다. 미국의 입장으로서는 자신들이 전평시작전권을 모두 가지고 있는 실전부대들이 시위진압에 동원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책임을 뒤집어 쓸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6 월 20 일, 청와대에서는 큰 소란이 일어났다.
이 날 오후 주한미국대사 제임스 릴리가 레이건의 친서를 전두환의 코 앞에 들이밀며 군대동원계획을 당장 취소하고 부대이동시도를 중지하지 않으면 항목별로 정리한 경제분야와 군사분야에 관한 제재조치를 실행에 옮기겠다는 협박을 직설적인 용어로 퍼붓고 돌아간 직후 외교관 번호판을 단 머큐리 그랜드마키스 승용차 두 대가 청와대 정문에 도착했다. 이 두 대의 차량에서 내린 인물은 John H. Stein 과 Richard Kim 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공작담당 부국장과 본부감찰차장을 지낸 John H. Stein은 해외공작의 귀재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었다.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국 국내의 친미인맥과도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서울주재 미 중앙정보국 파견인원들을 총괄지휘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청와대로 들이닥친 한국계 미국인 Richard Kim 은 CIA 한국지부 부책임자였다.
이들은 본관 집무실에 들어와 전두환에게 종이 쪼가리하나를 내밀며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영어와 한국어로 쓰여있는 종이에는 ‘육군본부를 통해 하달한 부대출동명령을 취소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전두환이 서명을 거부했지만 이들은 물러서지 않고 전두환을 압박했다.
마침내 전두환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이 무례하기 짝이없는 미국관료들을 향해 한국말로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 놈들아! 이 무례한 놈들.. 내가 일국의 대통령이야!!”
얼마나 분했는지 전두환의 눈가에는 물기까지 번져있었다. 전두환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이 두 명의 미국관료들은 눈하나 까딱하지 않은채 천연덕스럽게 소파에 앉아 담배까지 피워물었다. 당신이 서명하기 전에는 이 방에서 절대 나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국민을 상대로 제 2 의 유혈전쟁을 결심한 전두환을 굴복시킨 요인은 두 가지다.
첫째는 미국측의 예상을 뛰어넘은 강경한 압박이었고, 둘째는 한국군 내부의 반발이었다.
특히 출동명령이 하달된 부대의 연대장급(대령)과 대대장급(중령) 장교들의 심상치않은 분위기가 감지됐다. 특히 거의 모든 예하부대들에 출동명령이 하달된 특전사 소속장교들의 분위기가 가장 험악했다. 잘못하면 집단명령불복종사태가 벌어질 판 이었다. 특수전사령관 민병돈은 자신의 육사동기이기도 한 국군보안사령관 고명승에게 부내내의 이런 분위기를 알리고 전두환과 담판하도록 설득했다.
1987 년 6 월 19 일과 20 일 이틀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긴박했던 날들이었다.
어쨌든
이 긴박했던 순간들의 기록과 술회를 통해 전두환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그의 망동이 한국 현대사에 어떤 암운과 흑역사를 가져왔는지, 또 더 큰 비극을 가져올 뻔 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전두환 사망을 계기로 ‘죽은 자에게는 너그러워야 한다’느니 ‘그의 공과가 어떻다’느니 하면서 철딱서니없는 소리들을 늘어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이 새삼스러운 34 년 전 옛날 이야기를 한 번 다시 엮어보았다.
2021. 11.27 0800 (MST) sar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