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미군과 탈레반의 착시현상
8월 17일, 아프간을 장악한 탈레반이 카불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은 “이전 정부와 함께 일했거나 외국 정부 또는 군대에 협력했던 사람들에 대한 복수는 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왜 그들이 외국에 도움을 주었는지 누구도 묻지 않을 것”이라고 사면을 시사했다. 아울러 “이슬람 율법 따라 여성 인권을 존중할 것이며 취업과 교육을 허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런 약속을 한지 불과 며칠 만에 아프간 지방 경찰청장이 처참하게 처형당하는 동영상이 공개되었다. SNS를 통해 퍼지고 있는 그 동영상에는 바드기스주의 경찰청장 하지 물라 아차크자이라고 알려진 남자가 두 손이 묶이고 천으로 눈이 가려진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등장한다. 뒤이어 불꽃과 함께 수십 발의 총알이 그에게 쏟아지고, 그가 바닥에 쓰러진 뒤에도 총탄 세례가 이어진다. 다른 영상에는 탈레반 대원이 거리에서 핸드 마이크로 “여성들은 함부로 외출을 하지 마라!”고 경고하는 장면과, 취재를 하고 있는 외국 여성 기자에게 얼굴을 가리라고 외치면서 총으로 위협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10년 전 한국으로 유학 와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인천에서 일하고 있는 아프간인 A씨는 탈레반 점령 이후 연락이 잘 되지 않는 가족 걱정으로 밤잠을 이룰 수가 없다. 아프간 서쪽 도시 헤라트에 살던 부모는 탈레반이 재집권하자 집을 버리고 이란 접경지역으로 대피해서 난민 캠프에 머물고 있다. A씨는 “탈레반은 카불이나 아프간 동쪽과 남쪽지역에 대해서는 그나마 호의적이지만, 내 고향 헤라트와 소수민족인 우리 하자라족은 늘 혐오의 대상이어서 박해를 받아왔다.”면서 “그동안 탈레반의 크고 작은 공격으로 고향 친구 10여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2명은 최근 1년 사이에 죽었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A씨는 카불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 여동생이 걱정이다. 여성을 함부로 취급하는 탈레반에 의해 언제 일자리를 잃고 결혼을 강요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프간의 상황이 이러한 데도 탈레반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오히려 아프간 인민들을 폄하하는 의견이 한국 언론에 등장했다. 민플러스는 <아프간, 미군과 탈레반의 착시현상>이라는 기사에서 “탈레반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다. 그러므로 여성에게 이슬람 전통의상인 ‘부르카’를 입게 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관행일 수 있다. 더구나 미국의 20년 침략 기간, 수도 카불은 저급한 양키문화로 더럽혀졌기 때문에 전통문화를 다시 살려내는 것은 시급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면서 “지금 아프간을 탈출하려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들은 지난 20년 동안 친미 괴뢰정권에 기생해 권력을 유지하던 자들이다. 정권을 되찾은 탈레반이 이슬람 전통문화를 복원하고, 친미 정권에 기생하던 자들을 진압하는 통치행위를 인권탄압이라고 매도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라고 주장했다.
아무리 자신의 안위와는 상관이 없는 먼 나라의 일이라고 해도, 어쩌면 이렇게 잔인한 기사를 쓸 수 있을까? ‘전통문화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인권탄압 정도는 감안해야 한다’는 논리는 ‘사회 안정을 위해서는 광주의 폭도들을 총칼로 진압해야 한다’는 전두환의 논리와 뭐가 다른가? 이것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진보정론”을 자처하는 언론이 할 소리인가?
미국은 침략자이므로 아프간의 자주권 측면에서는 한없이 비판을 받아도 마땅하다. 그러나 아프간 내에서는 탈레반이 정권을 차지한 상태이므로 아프간 인민들, 특히 여성과 아동, 소수 민족은 무도한 권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약자들이다.
현재까지 수백만 명이 아프간을 탈출했다고 한다. 지금도 하루에 수만 명씩 고향을 떠나고 있다고 한다. 그중에는 부역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는 평범한 사람들일 것이다. 아프간 인민들의 탈출 소식을 접하면서 6.25 때 자유를 찾아 월남한 동포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부역자로 몰려 처형당하는 게 두려워서 탈출했을까? 북녘 땅에 대한 미군의 무차별적 폭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든 고향을 버려야 했던 것이다.
아프간 인민들도 마찬가지이다. 겨우 며칠 만에 공개적으로 했던 약속을 뭉개고 공포정치를 자행하는 탈레반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거나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해괴한 논리로 아프간 인민들을 모욕하는 부류들을 볼 때마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아프간의 현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프간 인민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나 존중도 없이, 미국만 비난하면 정의가 구현되는줄 아는 얼치기들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작가 손아람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억누르는 그 어떤 권력도 정당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삶의 요구는 서로 다른 법과 종교와 언어가 공유하는 유일한 진리입니다.”라고 했다. 그 어떤 숭고한 이념이나 종교, 민족이나 국가보다도 아프간 인민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가 제일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