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요즘 ‘아프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뜨겁다. 언론과 SNS를 통해 다양한 의견과 해석이 쏟아지고 있다. ‘생명평화운동가’로 자처하는 황모씨는 SNS에 “아프가니스탄이 미제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미제’와 ‘해방’이라는 냉전시대의 낡은 용어를 들먹이는 그의 글에 대해 많은 이들이 비판을 하고 있다.
아프간의 자주권 회복 차원에서 미군 철수는 당연히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탈레반의 득세는 아프간 인민들에게는 해방이 아니라 정권교체에 불과할 뿐이다.
탈레반은 이슬람공화국 수립을 위해 결성된 무장조직이다. 1996년~2001년에 아프간을 지배할 때 엄격한 이슬람 율법통치를 강행해서 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특히 여성과 아동에 대한 가혹한 인권유린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이 빗발쳤다.
탈레반 정권은 여성의 교육과 취업, 외출을 규제했다. 눈 부위만 망사로 가린 채 머리부터 발목까지 온몸을 감추는 부르카 착용을 의무화했고 이를 어기면 돌로 쳐 죽이는 잔인함을 드러냈다. 12살밖에 안 된 소녀를 탈레반 대원과 강제로 결혼시키는 만행도 저질렀다.
때문에 아프간 인민들에게 현 상황은 미국 앞잡이 이승만(가니 대통령)이 물러가자 총칼 들고 설치는 전두환(탈레반)이 등장한 꼴이다.
탈레반의 공포정치를 두려워하는 아프간 인민들은 앞 다투어 국외 탈주를 감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두고 동족을 배신한 부역자들의 탈주라는 의견이 있다. 그렇다면 6.25 때 월남한 사람들도 북한에 숙청당할 게 두려워서 탈주한 부역자들인가? 이미 수백만 명이 인근 국가로 탈출했으며 지금도 하루에 3만 명 이상 아프간을 떠나고 있다고 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부역자라면 아프간은 참으로 이상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아프간 민중 대부분이 탈레반을 지지한다는 얘기도 있다. 어떤 신뢰성 있는 기관이 언제 그런 조사를 했는지 궁금하다. 전두환 정권 때 독재타도를 외치는 이가 적지 않았지만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묵묵히 생업에 종사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전두환을 지지했던 건 아닐 것이다. 총칼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침묵했을 것이다. 그런 시대를 겪어본 사람들은 누군가를 함부로 비난하지 않는다.
아프간 여성의 인권을 걱정하는 이들을 향해 왜 사우디 여성의 인권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느냐는 비아냥거림도 있다. 이런 식의 비유는 유치한 말꼬리 잡기로 논점을 흐리려는 전형적인 궤변이다. 차라리 왜 미얀마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아프간에 대해서만 떠드는 건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게 어떨까?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만 11세이던 2009년, 영국 BBC 방송의 사이트 우르드어 블로그에 익명으로 탈레반 점령지의 억압적 일상과 여성의 교육을 금지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글을 올렸다. 그의 글은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켜서 <뉴욕타임스>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되는 등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으나 말랄라의 신분이 노출되고 말았다. 2012년 10월 9일,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말랄라는 파키스탄 탈레반 무장대원이 쏜 총알에 머리와 목을 맞아 중태에 빠졌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말랄라는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송되어 재활치료를 받은 끝에 극적으로 회복되었다.
2021년 8월 17일, 말랄라는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나는 아프간의 자매들이 걱정이 된다>는 글에서 “지난 20년 간 수백만의 여성들은 교육을 받았지만 그들에게 약속된 미래는 사라지고 있다”면서 “탈레반이 정권을 다시 잡고 있고, 나는 다른 많은 여성들처럼 아프간의 자매들이 걱정된다.”고 썼다. 이어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공포는 현실”이라면서 “이들을 도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말랄라 뿐만이 아니다. 아프간에 있는 많은 여성과 아동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탈레반에 대한 공포를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결국 사회 안정을 위해 광주의 폭도들을 진압했다고 주장하는 전두환을 인정하는 짓과 다름없다.
미국을 미워하고 적대시하는 건 좋다. 그러나 미국에 대항한다는 이유만으로 여성과 아동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탈레반을 해방군 취급하는 건 심각한 잘못이다.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여성과 아동은 함부로 희생되어도 좋다는 게 ‘생명평화운동’의 정신인지 황모씨에게 묻고 싶다. 아프간의 자주권 회복은 환영하지만, 탈레반의 등장은 염려된다고 하는 게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운동가의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냉전시대의 패권주의 논리에 함몰된 채 골방에 처박혀서 단순무식한 이분법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구닥다리 지식인의 모습이 애처로울 뿐이다.
탈레반이 예전과는 다른 정책을 펼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자신들을 주목하는 세계의 눈길 때문에 일시적으로 유화정책을 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부르카를 착용하지 않은 채 외출한 여성이 길거리에서 처형당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온다.
머지않아 아프간에서 크메르 루즈 시대의 캄보디아처럼 킬링필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아니면 박정희처럼 겉으로는 인민을 위하는 척 하면서 뒤로는 반대파를 마구 잡아들여 고문하고 처형하는 일을 자행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탈레반과 그에 반대하는 세력 간의 충돌로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 어떤 경우이든 결국 피해를 입는 건 선량한 인민들이다. 숭고한 이념이나 종교, 민족이나 국가보다 중요한 건 개인으로서 인간의 존엄이다. 부디 아프간 인민들에게 진정한 자유가 주어지기를 기원하며,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미얀마의 인민들에게도 뜨거운 연대의 마음을 보낸다.
1996년~2001년 탈레반 정권때 부르카를 착용한 여성들
2021년 8월, 부르카를 착용하지 않고 외출했다는 이유로
탈레반에 의해 길거리에서 처형당한 아프간 여성
2021년 8월, 미용실에 걸린 여성들의 사진에 탈레반이 먹칠을 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