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재동에서 얻은 교훈
1988 년 10 월 어느 날 첨 알게 된 멋진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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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동네인 안국동에서 나고 자라 그 동네이름이 붙은 초등학교를 다녔으면서도 재동 이라는 동네의 이름 유래를 몰랐었다. 어렸을 때는 그저 그 동네에 才童 (까진 아이들)이 많아 재동인 줄 알았었다. 몇 해 전, 한국에 갔을 때 어느 모임에서 우연히 왜 재동의 이름이 재동이 되었는지 알게 됐다.
재동은 율곡로를 사이에 두고 운현궁을 남쪽으로 마주보는 골목길 일대를 말한다. 서쪽에는 안국동 북쪽에는 가회동 동쪽에는 원서동이 있다. 조선시대 임금이 주로 살던 창덕궁과도 지척이다.
벌써 감을 잡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수 백년 동안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 끔찍한 일이 많이 일어났던, 매우 운수불길한 동네 이름들이다. 재동 이란 이름의 유래 역시 피비린내나는 어떤 비극적인 사건에서 비롯됐다.
재동의 지명이 한자로 무슨 재를 쓰는지 생각이 안 나는데, 그것과 관계없이 재동의 재는 ash (불타고 남은 재) 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재동의 재가 왜 ash에서 비롯됐는지를 알려면 1453 년 10 월 10 일 발생한 계유정란의 전개과정부터 알아야 한다.
조선시대 단종 때 왕위쟁탈전이 벌어졌다. 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왕위찬탈 사건이라는 인식이 박혀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옛날 교과서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고, 사극 드라마나 이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담은 ‘관상’같은 영화에서도 그런 식으로 묘사한다.
과연 이것이 전적으로 올바른 인식일까?
한국가서 안 하는 짓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스타벅스 커피를 사 먹는 거고, 또 하나는 극장가서 영화보는거다
이번엔 두 가지 다 했다. 마침 한국에 나와 있던 누나와 함께.
아는 누나가 아니고 친누나..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아둔한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으면 국민이 피곤하다”
30 여 년 전 사고방식과 권력욕을 가진 퇴물들이 되돌아와 민주주의 기본정신을 훼손하고 유린하는데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소양도 통제할 능력도 없는 사람이 대통령 중심제를 하는 나라에서 대통령으로 앉아있을 때 무슨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지 경고했던 말이다.
5 백 여 년 전 수양대군과그 ‘종파’ 구성원들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왕이 무력하면 백성들이 피를 본다”
왕과 대통령, 조선시대의 백성과 근대국가의 국민은 전혀 다른 위상과 의미를 지니지만, 또 왕실 쿠데타세력과 권신들의 갈등관계를 오늘의 상황에 빗대는 것도 외람된 비유지만, 굳이 비교를 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조선시대는 절대군주제라 보기 어렵다. 왕과 사대부가 권력을 분점하고 서로를 견제하던 통치구조였다. 이 세력균형이 무너져 권력독점 또는 권력 불균형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피바람이 일어났다.
재미있는 것은 왕의 권력이 강화되었던 태종이나 연산군때는 사대부들이 주로 피를 본 데 반해 사대부 권력이 왕권을 압도할 때는 일반 백성들이 가혹한 피해를 당했다. 세도정치로 인한 부정부패로 나라 도처에서 광범위한 수탈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단종 때 역시 왕과 사대부간의 세력균형이 결정적으로 무너진 때였다. 모든 권력은 세종의 고명대신이었던 황보인과 김종서와 그 ‘종파’가 장악했다. 병권은 물론이고 왕의 고유권한인 인사권마저 전횡했다. 그들은 왕의 인사대상명단에 노란점 표시를 해 그 사람을 임명하도록 어린 왕을 협박했다. 왕이 어리더라도 대비가 있으면 수렴첨정이라는 수단을 통해 왕실이 대신들의 월권을 견제할 수 있지만 그때는 수렴첨정을 할 대비조차 없었다.
대부분의 역사책에는 수양대군이 왕의 자리를 넘보았다고 적고 있지만, 그건 너무나도 단순한 소리같다. 우선 그를 비롯한 문종의 형제들, 즉 단종의 삼촌들은 왕의 자리를 넘보기는 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바쁜 상황이었던게 분명하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안평대군은 황보인에게 아부했고, 수양대군은 아예 고명사은사 (단종 즉위를 명황제로부터 승인받기 위해 파견된 특사)를 자청해 북경으로 기약없는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말이 고명사은사지 요샛말로 하자면 구속을 피해 미국으로 도망간 것이다.
사실 계유정란은 무모한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좌의정 김종서와 병조판서 조극관의 지휘를 받는 수 천 명의 훈련된 경군이 물샐틈없는 경계망을 펼치고 있는 서울 한 복판에서 껄렁패나 다름없는 백 여 명에 불과한 무사들로 쿠데타를 성공시켰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가 거의 단신으로 적 진영의 우두머리인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서 (이건 정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부터 격살하여 적의 지휘계통을 일시에 붕괴시켜 버렸기 때문에 그 말도 안되는 기적이 성사되었을 것이다.
그는 왕의 자리가 탐나서였다기보다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배수진의 선택을 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 다시 재동으로 돌아가서,,,,,,
재로 온 동네를 덮어야 할만큼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재동에서는 그 날 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내려오는 이야기는 그 날 밤 가장 먼저 온 가족과 가노들이 떼죽음을 당했던 김종서의 집이 재동이었다고 하지만, 김종서의 집은 재동이 아니라 서대문구 충정로였다. 충정로에 있는 농업박물관에 김종서의 집터 표지석이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그 날 밤 단종이 누나인 경혜공주의 집에 있었는데 쿠데타 세력이 위조한 가짜명패 (명패= 임금의 소집영장 -입소영장이 아니고-)를 받은 신하들이 경혜공주의 사저로 모였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경혜공주의 사저는 지금 헌법재판소 (구 창덕여고 자리) 부근이었다.
아마도 두 번 째 이야기가 맞을 것이다. 어쨌든 그 날 밤 경혜공주 사저 안 마당에서 칼과 창으로 난도질을 당한 채 죽어나간 사람들이 흘린 피가 마당 가득 연못을 이루었는데, 진동하는 피비린내를 지우기 위해 엄청난 양의 재를 가져다 그 위에 덮었다고 해서 그 동네 이름이 회동이 되었다가 나중에 재동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재동 살육작전을 지휘한 총책임자는 살생부의 저자 한명회였다.
열 두 살 소년이 왕위에서 쫓겨나 죽음을 당한 것만 불쌍하고 안타까워 하기보단 조선시대 왕권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제도적으로 돌봐 줄 사람(대비) 조차없는 없는 상황에서 ‘판단능력이 부재한 어린 아이’가 왕위에 있을 때 권력균형이 어떻게 무너져 그 피해가 일반 백성들에게 어떤 형태로 돌아갈 수 있는지, 결과적으로 어떤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 보면 계유정란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의 다른 면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갑자기
조선의 단종과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 1 위원장,
이 세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떠 오른다.
피비린내의 진원지
해만 지면 들려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원귀들의 울음소리 때문에
창덕여고 학생들이 "무서워서 못 살겠으니 우리 이사가요"
하는 바람에 학교가 어디론가 이사를 갔다는 소문이......
(믿거나 말거나)
헌재 재판관들은 귀들이 어두워서 그런지 아직 그런 불평이 없다.
내내 졸다가 해지기 전에 일찍 퇴근해서 그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