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1997 년생의 분노..
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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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에이저 때 집단적으로 겪은 어떤 사건이 그 세대의 정서와 연대감을 결정하는 경우가 있다. 1979 년과 1980 년, 이 두 해 동안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세대도 그런 경험을 한 세대에 포함될 것이다. 대체로 1962 년 생부터 1967 년생 까지가 이 세대에 해당된다.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대충 알만한 나이에 그들은 군사쿠테타로 한 나라의 질서가 거꾸로 뒤집히는 것을 눈 앞에서 목격했다.
적어도 당시의 고등학생들과 좀 영민한 중학생들은 12.12 사태가 나는 그 순간부터 그 사건의 본질과 전개과정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있었다. 18 년에 걸친 지긋지긋한 독재가 끝난 시점에 등장한 신군부의, 약 9 개월 간에 걸친 피비린내나는 권력탈취 과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낱낱이 목격했다. 양아치나 폭력배들과 다름없는 신군부에게 굴복하고 야합하고 협조하는 기성세대,특히 언론과 학계 등 인텔리 집단의 비열한 배신행위를 바라보며 그때 그 아이들은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았었다.
이 아이들에게 기성의 대한민국은 더 이상 조국이 될 수 없었다. 예민한 10 대 때, 상식과 윤리가 눈 앞에서 모조리 파괴되는 모습을 겪은 이 아이들은 이후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만큼 오랜 세월동안 정서적 연대를 이루며 지난 30 여 년 간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성격을 송두리째 뒤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시춘기 무렵, 국가의 배신으로 크나 큰 정신적 시련을 겪은 세대가 또 있다. 앞서 예로 든 6267 세대의 부모세대에 해당하는 1930 년대생들이다.
1950 년 6 월 27 일 새벽, 조선인민군 제 105 기갑여단 소속 전차부대가 의정부 저지선을 돌파했다. 전차부대 뒤로는 제 6 사단 보병부대가 따르고 있었다. 그 시간 서울 시내에서는 대통령 이승만이 직접 자신의 육성으로 녹음한 안내방송이 전파되고 있었다.
“서울시민은 움직이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이었다. ‘움직이면 위험하고 서을에 머무는 것이 더 안전하다’ 는 안내방송이었다. 자신의 노쇠한 육성방송이 서울시내에 방송을 통해 울려퍼지고 있던 바로 그 시간, 대통령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서울역에서 특별열차를 집어타고 대전을 향해 도주하고 있었다.
그 날 오후가 되어서야 대통령과 각료들이 서울시민들을 내팽개친 채 자기들끼리 남쪽으로 도망쳤다는 소문이 시내에 쫙 퍼졌다. 그 날 저녁에는 서울 방면 선봉부대인 조선인민군 보병 제 6 사단이 최후의 방어선인 미아리 저지선을 돌파해 돈암동 방면으로 물밀듯이 진격해 들어왔다. 서울시민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서울시민 150 만 명 중 약 40 여 만 명이 서울탈출을 위해 기차역으로,한강교로 몰려들었다. 이들 중 약 80 퍼센트 정도가 탈북자 (당시는 월남자라고 부름)들과 군경가족,우익가족이었고, 나머지 20 퍼센트는 이념이야 어쨌건 일단 위험한 전선에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에 파난길을 결정한 사람들이었다.
서울을 탈출한 이승만 정부는 자기들이 탈출한지 만 하루가 지난 6 월 28 일 새벽 육군본부 공병감실에 특명을 하달했다. 북코리아군의 한강도하를 막기 위해 한강철교를 폭파하라는 명령이었다. 북코리아군 선발부대가 중앙청을 접수하기 수 시간 전, 한강철교 (지금의 용산-노량진 구간)에 거대한 폭음과 함께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서울을 지키겠다는 대통령의 새빨간 거짓말을 믿고 기다리다 뒤늦게 한강철교를 건너던 약 1 천 여 명의 서울시민들이 온 몸이 산산조각이 난 채 한강위로 쏟아져 내렸다. 한국전쟁 최초의 대규모 민간인 살상행위는 바로 한강철교에서 대한민국 군대에 의해 저질러졌다.
1950 년과 1980 년의 비극이 있고나서 또 다시 30 여 년이 지났다.
이번에는 여객선이 뒤집혔다. 사실상의 여객선 선주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비호를 받던 인물인데, 이명박 정권 이래 규제가 완화된 해운운송규정의 그물망 사이에서 탈법운항을 하다 사고를 냈다. 이 사고로 300 명에 가까운 이이들이 죽었거나 ‘사망으로 추정되는 상태’ 에 빠졌다.
먼바다에서 오밤중에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 근해에서 아침에 일어난 사고 였는데, 구조를 맡은 정부기관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직무유기에 해당하는 비행과 무능을 반복하다 사고 발생 11 일 이 지나도록 실종자를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하는 황당한 대참사를 초래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직무유기를 유발한 원인에는 해경 등 유관기관 내부의 배타적 관료주의와 이권관계, 선사의 지주회사와 권력간의 밀착관계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 글의 주제는 아니므로 서술은 생락한다.
이번에 사고를 당한 아이들은 대부분이 1997 년 생들이다. 이 아이들이 태어난 1997 년, 그 해 겨울은 참으로 혹독하고 서러운 계절이었다. 그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인 1930 년대생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일궈 놓았다는 대한민국이 폭삭 주저앉았던 해가 바로 그 해였다.
한편 그 해는 그들의 부모세대인 6267 세대가 뒤바꾸어 놓은 문화혁명의 첫 결실로 해방 52 년 만에 권력의 주체가 뒤바뀐 해 이기도했다.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은 기묘한 그 해에 태어난 그 아이들이 자라서 고등학생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조부모와 부모세대가 겪었던 ‘국가의 배신’ 을 이 아이들이 30 여 년 만에,마치 주기라도 돌아온 것 처럼 똑같이 겪고 있다. 사고 이후 아이들의 “희망이 애도로, 애도가 분노로 분노가 배신감과 증오로” 돌변해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 오늘 아침이었을 것이다. 어느 1997 년생 아이가 사망한 친구들에게 보내는 조문을 읽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친구들아. 다음 생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지 마..”
나는 솔직히 대한민국이 사람사는 공동체로서 그다지 모범적인 사회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태어나기 싫을만큼 저주스러운 나라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30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고, 그 변화를 이루는데 내가 속한 세대의 투쟁과 노력이 큰 몫을 담당했다고 생각해왔었다. 근데 저 조문을 읽고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치 인생을 헛 산 것 처럼 우울해졌다.
어제 점심 때 쯤인가, 어느 신문사 논설위원이라고 하는 작자가 그 아이들을 향해 이런 설교를 하는 것을 들었다. “슬퍼만 할 게 아니라 너희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더 훌륭한 시스템을 가진 나라를 만들면 될 거 아니냐” 는 요지의 말이었다.
그 설교를 들으며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떠 올랐다. 저 논설위원이란 자가 마치 인생을 다 산 놈처럼 자기가 끝내야 할 숙제를 열 일곱 살 짜리 아이들에게 떠넘기며 슬쩍 도망가려 하고 있구나 하는......
그 무책임한 설교를 들으며 자동적으로 떠오른 영화대사가 있었다. 여객선 사고와 관련된 거라 그런지, 아니면 그 아이들이 태어난 1997 년 개봉한 영화라서 그런지,,,,,, 역시 타이타닉의 어느 장면과 대사였는데, 타이타닉이 침몰하기 직전 그 배의 설계사로 탑승했었던 토마스 앤드류가 열 여섯 살의 로즈에게 했던 말이다.
“I'm sorry I didn't build you a stronger ship, young Rose.” (로즈야. 우리가 좀 더 튼튼한 배를 만들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 말을 하면서 토마스는 로즈에게 자기가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벗어서 건네 줬다. 로즈는 영화의 가공인물이지만 토마스 앤드류는 실재했던 인물이다. 그는 그 날 밤 이 배와 운명을 같이했다.
만일 내가 그 아이들이라면,,,,,, 이 판국에도 “너희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더 좋은 나라를 만들어 봐!” 이런 따위로 건방지고도 무책임한 훈계조의 말을 지껄이는 어른들의 귀싸대기를 한 방 후려갈길 것 같다. 하물며 저 따위 건방지고 무책임한 말을 듣는 1997 년생 아이들의 분노와 적개심은 오죽할까.
대한민국 기성세대는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 아이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훈계하거나 지시할 생각말고, 그냥 조용히, 반성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나 제대로, 똑바로 하면 좋을 것 같다.
2014. 4.26 0100 (MST) sar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