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 만큼 다양한 생각이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 알고 있다가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 요즈음이다.
얼마 전 PD수첩을 통해 보았던 노인빈곤의 실태는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경기가 나쁘다 나쁘다 해도 일부 계층의 사람들이 그런 수준의 생활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는게 없어서 그런 상상이 불가능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도 드러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유홍준씨의 명언에 아주 크게 동의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
나는 그들이 단순히 박모씨에 대한 향수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다고 생각해왔다. 미디어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져서 주는 뉴스만 보다보니 그렇게 길들여졌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세련되지 못한 표현방식 때문에 (대화를 시도하면 끊어버리거나 너는 그렇게 생각해라 나는 내 나름대로 할란다 등등의 방식.) 그들도 나름의 생각과 판단으로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선택을 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방송을 보기 전까진..
참혹한 현실 속에서,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바뀔 수 없는, 죽음만이 탈출구인 이 시궁창같은 현실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기초노령연금을 두 배 주겠다던 그 공약자였음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올바르지도 않은 것을 근거로한 감정적 선택때문에 다같이 죽어야 하는 현실을 초래한, 나라를 좀먹는 망령같아 보이던 사람들이 그제서야 나보다 더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선배 국민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힘들게 사시는데 왜 생활보호대상자 신청을 안하시냐는 피디의 질문에, '신청 해봤는데 떨어졌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많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나'라고 대답하시던 할머니는 굉장히 점잖으신 분이셨다.
개인적으로는 엄청 충격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생각의 차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의 차이는 가치의 차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어떤 가치를 좀 더 우위에 두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선택과 행동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가치관'이라는 단어는 생각보다 아주 중요한 단어였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점은 가치의 우선순위이다.
태사랑에서 자주 접하는 가치의 우선순위는 여행 스타일에 잘 반영된다. 볼거리를 중시하는 사람은 관광에 초점을 두고, 휴식을 중시하는 사람은 목적지를 해변가나 꽤 고급의 호텔로 정하는 등 여행패턴이 사람에 따라 다르다. 물론 같은 사람이라도 여행의 목적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이는 여행 목적에 따라 가치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여행패턴과는 달리, 정답을 가려낼 수 있는 가치의 우선순위도 있다.
다음의 경우를 가정해보자.
출근길에 도로에 사람이 쓰러져서 피를 흘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사람을 발견한 사람은 나 외에는 없다. (길에 다른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상황) 당장 119에 신고를 해서 이 사람을 병원으로 호송할 때 까지 있는다면 이 사람은 살 수도 있다. 119로 전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당장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이 병원에 잘 가기 까지 시간을 지체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나는 출근시간에 늦게 되고, 그 이후의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오늘은 중요한 회의가 아침에 잡혀 있는데, 내가 발표를 해야 하는 날이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한다. 사람의 생명과 나 개인의 안녕. 여기서 회의에 늦어서 발표를 펑크내면 안되니까 일단 출근을 하고 119에 전화를 하겠다고 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인류 모든 문화에서 그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시 되는 것이니까. (물론 현실적인 사례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대표적인 예는 전쟁.)
무엇과 충돌하더라도 우선시되어야 하는 절대적 가치와, 개인의 기호와 취향에 따라 선후를 바꾸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상대적 가치가 있다. 문제는 인간의 삶과 현실이 이렇게 두 가지로 딱 잘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절대적 가치와 상대적 가치를 구분하는 기준, 즉 선, 이걸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아주 복잡다단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 어떤 경우에도 가장 앞에 두어야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자는 생각은, 공리주의나 기타 다른 정치 사회학적 명분에 상위 가치의 자리를 빼앗기고 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공과 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모여서 만든 사회속에서 공사의 구분은 쉽지가 않다. 공적인 관계가 지속되다보면 그 관계속의 개인 사이에는 사적인 관계도 형성되니까. 게시판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가장 큰 부분도 이러한 구분의 모호함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얼마전 암꺼나 게시판에서 겪었던 일이다. 어떤 분이 어떤 부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글로 올렸는데, 난 그 분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서 이러이러한 점에서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는 댓글을 썼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은 '그냥 내 생각이 이렇다 하고 쓴 것인데 왜 그러냐. 너와 싸우고 싶지 않다' 하는 식의 대답이 돌아왔다. 게시판에 의견을 써두고 반대의견이 달리니 그냥 내 생각 쓴건데 왜 뭐라하냐는 식의 반응이라니.. 그럴거면 처음부터 논의의 장에 공개적으로 쓸 것이 아니라 비공개 개인블로그에 쓰거나 혼자 생각만 하고 말았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 나는 그 분의 판단근거의 이러이러한 점이 잘못되었고, 따라서 당신의 결론에 동의할 수 없다 하는 비판을 했는데, 원글자는 내가 비난을 했다고 생각하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혹은 반대의견을 말해서 빈정이 상했거나. (특정 단어에 발끈해서 반응하는 부분도 많다.)
잘 생각해보면 한국사람들이 잘 못하는 것이 이 부분이다. 반대되는 의견을 말하는 것을 싸움을 거는 것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나랑 굉장히 가까운 친구가 있는데, 만약에 이 친구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대부분의 한국사람은 이 친구의 돈버는 방법에 대해 되도록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간혹 나도 가르쳐줘봐라 같이 해보자 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나,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너 지금 굉장히 잘못 살고 있는거야! 니 자식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냐!" 라고 일갈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될것 같다. 한 20년 지기 친구인데 잠깐(최근 2-3년) 그러는거라면 진실되게 뭐라고 해줄 수 있는 사람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친구가 그 보다 더 오래 그래왔다면? 아마 그렇게 계속 친구로 지내지 않게 될 확률이 높을 것이다.
논의를 확장해서 친구는 문제가 없는데, 친구 부모님이 유명한 조폭 두목이라면? 친구 앞에서 니네 부모님 왜 그렇게 사시냐고 비판할 수 있을까? 친구 부모님 욕을 안하더라도 그 친구 앞에서 조폭 나쁘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조금 다른 경우로, 자신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착각해서 1번 뽑는 경우 말고, 정말로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서 1번을 뽑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이들이 하는 꼬라지를 보면 전체의 이익을 해치면서까지 일부의 이익을 대변해주고 있는데, 이런 이득을 실제로 보는 사람이 이들을 뽑는것을 뭐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뭐라고 할 수 없지만 윤리적인 관점에서는 충분히 비판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판단이 무 자르듯 명확하게 서지 않는다.
이런 모호한 지점에서 가치판단의 우선순위를 다르게 매기는 사람들이 부딪치면 분란이 되는것 같다는게 요즘의 생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판단의 우선순위는 대략적인 정답이 있으며, 그 정답을 아는 자와, 안다고 착각하는자가 부딪친다는것도 요즘 하는 생각이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