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기 어려운 죄책감
요새 대민방에 등장하는 주장들이 다채롭다. 어제는 글 읽다가 실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이렇게 웃어보기는 처음 인 것 같다. 6. 29 선언을 한국 국민들이 이어받아야 할 정신적 사건으로 헌법전문에 넣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읽고나서다.
그 분 주장에 따르면 6.29 선언이 한국에 민주화를 가능케 한 전국적 규모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통령 직선제라는 민주주의 근본 이념” 이 실현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 분은 "대통령 직선제가 민주주의의 근본이념"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했는데, 대통령 직선제는 이념이 아니라 선거제도다. 민주주의 그 자체가 이념이라면 이념일 수 있는데 아마도 그 분은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는 무엇일까?
주권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자유와 존엄일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이념도, 그 민주주의가 동반하는 제도도, 제도로 운영되는 한 단위인 국가도, 그 존재목적은 한 가지다.
주권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자유와 존엄울 보장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그것들이 존재한다. 즉 원칙적으로 국가가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이 간단한 원리를 깨닫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엄청 헤멘다. 1972 년 부터 1979 년까지 이 땅을 지배했던 파시스트 정권이 뿌려놓은 고약한 국가지상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헌법전문에 3.1 운동과 4. 19 혁명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의미는 두 가지다.
우선 제도적 단위로서의 대한민국의 법통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찾는데, 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 1 운동이 일어난 지 43 일 만인 1919 년 4 월 13 일에 수립됐다. 3.1 운동은 나라의 주권과 독립을 선언한 반제국주의 국제운동의 성격을 가진다.
4. 19 혁명은 주권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짖밟은 국가폭력에 저항하여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를 되돌려 놓는 사건이다. 막연히 반독재, 반 이승만 정권 투쟁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6.29 선언이란 무엇일까?
6 29 선언을 헌법정신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신 분은 아마도 6. 10 항쟁과 6. 29 선언이 서로 손에 손잡고 화합하면 보수와 진보가 화해라도 하는 누이좋고 매부좋은 모양새처럼 보이는 게 그럴듯해서 그렇게 하자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헌법정신에 4. 19 정신이 기왕에 들어갔으니 다른 거 새로 넣을 필요없이 4. 19 정신과 함께 4. 26 이승만 하야정신을 함께 넣자고 해도 좋지 않을까?
기왕에 3. 1 운동이 들어갔으니 3. 1 정신과 함께 일왕 히로히토의 8.15 항복정신도 함께 넣자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광주민주화운동 35 주년이다.
1979 년과 1980 년. 대한민국에서 이 두 해를 살았던 사람들 가슴 깊은 곳에는 아직도 깊게 패인 상처가 남아 있다. 그 상처는 평범한 사람들의 보편적 상식을 바탕으로 한 예상을 뒤엎은 사태에 대한 공포심과 좌절감에서 비롯됐다.
당시 사람들은, 박정희가 피살당하고 18 년 간에 걸친 군사독재가 종식된 그 시점에 절대로 군부가 다시 등장해서 헌정을 유린하리리고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근데 그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온 국민이 눈을 번연히 뜨고 있는 가운데 무려 15 개월에 걸친 기나 긴 시간을 무상하게 흘려보내며 일어났다.
15 개월 이라함은 하나회를 주축으로 한 유신친위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킨 1979 년 12 월 12 일 부터 전두환이 제 12 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81 년 3 월 3 일까지의 그 참담했던 시간들을 말한다.
이는 마치 먼 바다도 아닌 섬 앞바다에서 무려 90 분에 걸친 기나 긴 세월을 두고 바다에 가라앉았던 세월호에서 단 한 명의 생명도 구출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상상조차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 처럼 똑같은 상황이 그 해에도 발생했던 것이다.
그 시대에 대한민국에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상처는 다른 게 아니다. 평생을 지울 수 없는 부채감과 죄책감이 그것이다.
그 무거운 부채감과 죄책감은 희생자의 유가족이 어떤 보상을 받았는지 따위와는 전혀 관계없이 지속되는 인간의, 인간다운,, 원초적 감정 같은 거다.
그런 각별한 감정은 먼저 간 희생자들을 향한, 동시대를 함께 숨쉬며 살아왔던 인간으로서의 양심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마음 아닐까 한다.
그냥암꺼나 방에 필리핀님이 퇴계의 사단칠정론을 올리셨는데, 타인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옳지 못한 행동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을 필요이상으로 폄훼하는 막말을, 특정 지역 사람들을 bullying 하는 도구로 삼고, 세월호 유가족들을 가리키며 ‘팔자고치나요’ 같은 비아냥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사람이 아프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5. 18 광주민주화운동이 대한민국을 거듭나게 한 세기적 사건으로 평가받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이 사건 이후 시민운동이 조직화되고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과학적인 감시와 견제기능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시민민주주의사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80 년 5 월정국의 총체적 패배와 그 패배의 결정적 희생양이 된 광주의 처절한 비극은
이후 생성될 시민운동의 맹아였던 당시 학생운동을 대오각성하게했고, 당시의 청소년세대 거의 전부를 일깨우며 거의 한 세대에 걸쳐 강력하게 연대하게 함으로써, 이 나라를 문명시민사회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데 값진 밑거름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