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월 27 일, 도망자의 추억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일본으로 도주하려고 시도했다는 정보는 이미 19 년 전에 공개된 것이다. 며칠 전 KBS 가 새 자료를 인용해 보도하기 19 년전인 1996 년 4 월 14 일 산케이신문이 이같은 정보를 먼저 확인하고 보도했었다.
다만 전쟁 당시부터 내내 풍문으로만 떠돌던 그 정보가 일본 지방정부 단체장의 회고록을 통해 폭로된 것은 19 년 전 이지만, 일본 외무성과 야마구치현 지방정부간의 대화기록문서를 통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산케이신문은 한국전쟁 발발당시 야마쿠치현 지사였던 다나카의 회고록을 인용해서 이같은 사실을 보도했는데, 당시 보도에 인용된 회고록‘1950 Korea’’ 가 이번에 공개된 일본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간의 대화기록문서내용과 일치할 뿐 아니라, 당시 친일관료, 친일지식인 등 남한 기득권층 6 만 여 명의 탈주 정착계획을 기록한 도쿄주둔 미국군 극동군사령부 문서의 내용과도 일치함으로써, 당시 남한의 지배층이 얼마나 추악한 집단이었는가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됐다.
이승만 초대정부와 당시 남한 상류계급의 인맥을 계승한 대한민국 지배계급은 도덕적 치명상을 면할 수 없게 됐다. 이승만을 가리켜 건국의 아버지라고 추켜세우면서 8 월 15 일을 건국절로 기념하고 광화문광장에 이승만 동상을 건립하자는 주장 또한 얼빠진 소리로 취급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일본과 미국의 정부 공식 문서들이 공개되기 전에도 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이틀이 지난 1950 년 6 월 27 일부터 극비리에 시작된 이승만 도주행각의 괴상하기 짝이없는 루트를 보면 그의 당초 목적지가 대구나 부산이 아닌 일본이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이승만이 부인과 각료들을 데리고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특별열차편으로 서울을 탈출한 것은 1950 년 6 월 27 일 세벽 두 시 경이었다. 침실로 뛰어든 곽영주 등 경무대 경호요원들에게 둘러싸여 잠옷바람으로 도망길에 오른 그는 용산역으로 향하는 승용차 안에서 경호원들이 챙겨 온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잘못 알려지기로는 그가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수원-대전-대구-부산 루트, 즉 임시수도 이전 동선을 따라 남하함으로써 마치 작전상 후퇴라도 한 것 처럼 되어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그는 경부선 루트로 남하하지 않았다. 서대전을 거쳐 호남선을 타고 이리 (지금의 익산) 까지 간 다음 계속 목포로 내려가서 난데없이 배를 집어 탔다.
그는 왜 대구나 부산으로 가지 않고 목포로가서 배를 탄 것 일까?
그는 항전할 생각을 일찌감치 내팽개친 채 망명정부를 세운다는 핑계로 일본으로 튈 결심을 했기 때문에 이동동선이 짧은 목포로 가서 해상으로 도주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서울을 기점으로 목포는 부산보다 약 40 km 정도 이동동선이 짧을 뿐 아니라, 교통량이 많은 경부선보다는 보안유지하는데도 용이하므로 그 루트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가 일본으로 가지 않고 배를 돌려 부산으로 향한 이유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파병이 늦어지거나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던 미국군 지상군 선발대가 7 월 5 일 도착하여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미국군 지상군 보병 제 24 사단이 금강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항전태세를 벌이자 다시 기고만장해진 이승만은 어깨가 으쓱해서 부산에서 대구로 갔다가, 믿었던 미국군 제 24 사단의 금강교두보가 허망하게 무너지고 사단장이 인민군에게 생포되는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자 다시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부산으로 도망갔다.
도대체 대통령을 비롯해 국가의 지도부라는 작자들이 전쟁이 발발한 지 만 46 시간 만에 수도를 내 주고 외국으로 도망갈 생각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머리가 어떻게 된 작자들 아닐까?
그 이유를 찾는데는 이것저것 어려운 거 생각할 필요없다. 한 마디로 이승만은 익숙하지 않은 육체적 정신적 고난을 체질적으로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전란을 현장에서 책임지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끔찍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추정된다.
한 예로,,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을 지낸 적이 있는데 이 때도 비슷한 모습을 보였었다..
임정수반으로 선출된 1919 년 부터 미국교포들의 독립운동자금을 떼어먹은 도둑놈으로 몰려 그 직에서 쫓겨나는 1925 년 까지 5 년 6 개월 간을 봉직했다. 그는 교포들의 모금을 착복했을 뿐 아니라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쓸개빠진 매국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대통령직에서 탄핵 파면됐는데, 어쨌든 대통령으로 봉직하는 그 기간 동안 임시정부가 소재하고 있던 상하이에는 코빼기도 비춘 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임정과의 좋지 않은 사이 때문이라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상하이 임시정부 사무실과 숙소에 수세식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정치인이 사람관계 때문에 현장에 안 나타났다는 것은 말이 안되고, 아마도 수세식 화장실이 없어서 상하이에 가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통령이 잠옷차람으로 각료들과 함께 서울을 탈출한 지 만 하루가 다 되어가는 1950 년 6 월 27 일 자정, 서울 시내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중앙방송국에서 반복해서 들려주는 대통령 육성녹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서울시민 여러분, 움직이지 마시고 현재 위치에서 가만히 있어 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과 정부는 시울시민여러분과 함께 수도 서울을 지킬 것 입니다”
그 날 서울시민 150 만 명 중 110 만 명이 북코리아군 수중에 떨어진 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고립됐다. 잠옷바람으로 탈출한 대통령의 말을 듣지 않고 서울을 스스로 빠져나간 40 만 명 중 약 32 만 명은 탈북자, 군경가족, 우익인사, 상공인 등 이었다.
서울을 향해 진격하고 있던 북코리아측 부대는 조선인민군 제 1 군단 소속 3 개 사단과 1 개전차여단 이었다. 이들 3 개 사단 중 제 6 사단은 말이 보병부대지 부대원 대다수가 중국에서 항일전과 국공내전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하사관 이상으로 조직된 특수부대나 다름 없었다. 조선로동당 정치위원 겸 전선사령관 김책이 서울전선까지 직접 나와 지휘관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남한의 대통령과 각료들은 해상도주를 위해 수도와 국민을 팽개친 채 나라의 최남단 항구를 향해 도망가고, 북코리아의 최고위급 정치지도자중 한 사람은 자기가 직접 전선사령관이 되어 최전선에서 일선부대의 전투를 지휘하는 대조적인 모습이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대통령의 거짓말 육성방송이 남긴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인 28 일 여명의 새벽, 의정부-창동-미아리 저지선을 차례로 돌파하고 돈암동 혜화동 원남동 안국동을 거쳐 드디어 중앙청에 인공기를 계양하는 인민군의 모습을 보고 당시 서울시민들은 과연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그 어처구니없는 배신감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신채호 선생은 이승만을 가리켜 사기꾼이라고 한 적은 있어도 매국노라고 한 적은 없다. 이승만이 조선에 대한 위임통치를 미국에 읍소하는 꼴을 보고 신채호 선생이 한 말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으니 매국노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하니 사기꾼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싸르니아는 내일, 6 월 27 일,, 이승만을 매국노라고 부르겠다.
이승만의 일본 도주계획이 사실로 확정 판명나게되면, 그의 전직 대한민국 대통령 지위를 추탈하고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그의 묘지를 이장해야 할 것이다. 이장될 그의 유해는 부인의 유해와 함께 처가인 오스트리아로 보내든가 아니면 그가 일생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미국 하와이 오아후섬의 바다가 바라보이는 언덕 위에 묻어주는 게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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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간으로 내일 6 월 27 일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정부가 서을시민들을 그 자리에 있으라고 하면서, 또 국민들을 사지에 팽개쳐 둔 채, 자기들끼리 외국으로 탈출할 작심을 하고 도망길에 오른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