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에게 날아 온 편지 한 통 "우리 함께 죽자"
한국뉴스를 자주 찾아서 보는 편은 아닌데, 오늘 아침 우연히 재미있는 뉴스를 접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에 관한 것이다. 외교부가 비밀문서 해제규정에 따라 1985 년에 작성된 외교기밀문서 25 만 여 쪽을 공개했는데, 거기 느닷없이 반기문 현 유엔사무총장의 자발적 독재부역에 대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기자들이 발견한 모양이다. 아직 자세한 해설기사는 나오지 않고 있고, 단지 1985 년 당시 하버드대학에서 연수 중이던 반기문 참사관이 미국에 머물고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귀국동향보고를 했다는 내용의 짧은 사실보도만 나왔다. 그 중 한 기사가 정곡을 찔렀다. 당시 반기문 참사관은 해외동포 동향에 대한 정보수집이나 보고의무가 없는 연수생 신분이었던만큼 그의 이런 행위가 자발적이었을거라는 게 그 기사의 추측이다.
그런 추측을 한 기자는 추측의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기사의 의도성에 대한 오해를 막기위해 그랬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싸르니아가 그 기자 대신 왜 반기문 참사관의 해외민주인사에 대한 정보수집과 동향파악이 자발적이었을 가능성이 압도적일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들을 지금부터 줏어모아보려한다.
보통 생각하기를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같은 무지막지한 독재정권 아래서는 소속부서에 관계없이 아무 공무원에게 아무 업무나 수행하라고 얼토당토 않은 명령을 마구잡이로 내릴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특히 김대중 파랍 및 살해미수사건으로 국가적인 개망신을 당한 1973 년 이후에는 외무부 (지금의 외교부) 소속 공무원들을 마구잡이로 차출하여 해외에서 무리한 작전에 가담시키는 일이 현격히 줄어들었다. 알려진대로 김대중 피랍사건의 행동대원들은 놀랍게도 일본 각 지역에 파견된 고급외교관들이었다. 이들에게 공식 명령을 내린 인물은 당시 일본 주재 공사 김기완 (김 성 전 주한미국대사의 선친)이었지만 실제로 이들을 지휘한 인물은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된 제 8 국 소속의 해외공작단장이었다.
김대중 피랍 사건의 내막이 백일하에 폭로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박동선 로비사건 까지 터지면서 김기완 주일공사를 비롯한 고위급 외교관들과 주미대사관 소속 외교관들이 대거 미국으로 망명하는가 하면, 한 나라의 부총리급인 중앙정보부장까지 지냈던 자가 미국에서 빌빌거리고 있다가 갑자기 망명을 선언하고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하여 한국 외교관 조직의 불법적인 해외공작을 미주알고주알 폭로하자 중앙정보부 제 1 차장 산하의 해외공작업무 전체가 한동안 마비되는 사태까지 벌어졌었다.
반기문 외무부 연수생이 미국에서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공작원으로 활약했다는 (이건 싸르니아의 이야기가 아니고 대한민국 외무부 기밀문서 기록에서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다) 1985 년에는 어땠을까?
우선 1985 년은 전두환 정권에 있어서 분수령이 될만큼 중요한 해였다. 이 해에 있었던 2.12 총선을 기준으로 그 전과 후가 확연히 달랐다. 반기문 참사관이 공작원으로 활동하면서 DJ 와 관련된 정보수집과 동향보고를 했다면 DJ 가 귀국한 2 월 8 일 이전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기밀문서에는 빈 참사관이 해당보고를 올린 날짜가 1985 년 1 월 7 일로 명시되어 있다. 당시 외무부 장관은 이원경이었으며 주미대사는 사성장군 출신의 류병현이었고 국가안전기획부장은 노신영이었다.
이 시기는 전두환 정권이 극도의 위기에 몰렸던 1983 년 말부터 1985 년 2 . 12 총선 까지 이르는 상대적 유화국면에 포함된다. 상대적 유화국면이란 노동-학생운동권에 대한 탄압의 강도가 약해졌던 시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정권의 통치력과 장악력이 상대적으로 이완된 시기였음을 의미한다. 공무원 조직에 대한 통제력도 업무범위에서만 강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완된 시기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만일 반기문 참사관이 국가안전기획부장의 지휘를 받는 주미공사 휘하의 외교관이었다면 시기의 성격 여하에 관계없이 DJ 귀국동향에 대한 정보수집과 보고가 행정적 강제력을 지닌 명령에 의해 수행된 것 일 수 있다. 그러나 기밀문서에 나타난 보고계통은 주미공사를 통해 국가안전기획부 제 1 차장에게 올라간 것이 아니라, 류병현 주미대사를 통해 이원경 외무부장관에게 올라갔다.
싸르니아의 짐작에는 류병현 대사가 이원경 장관을 거치지 않고 전두환에게 직보했을 것이다. 원래 주미대사라는 자리 자체가 외무장관의 위상을 능가하는 경우가 허다할 뿐 아니라, 특히 류병현은 박정희가 피살되고 전두환이 12.12 로 집권하던 1979 년 전환기에 한미연합사 부사령관과 합참의장의 자리에 있으면서 미국과 신군부의 관계를 안정시키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던 인물로서 한마디로 실세대사라고 볼 수 있다.
반기문 참사관은 본국에서 파견된 연수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주미대사관의 공식업무지휘계통에 있지 않았다. 물론 상부에서 업무협조요청을 할 수는 있고, 그 업무협조요청이 사실상의 강요였을 수는 있으나, 만일 그가 원칙을 중시하는 공무원이었다면 거부할 수도 있는 입장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당시 본국의 많은 청소년들이 형편이 어려워 주경야독하는 경우는 많았으나, 하버드대학에서 연수하는 멀쩡한 3 급 공무원이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첩보활동을 하는 주독야경을 하라니 어처구니가 없고 더러워서라도 '노' 했을 것 같다
참고로 당시 전두환 정권은 DJ 가 귀국하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으려 했다. 그의 귀국길에는 그의 안전을 염려한 미국의 각계인사 수 십 명이 DJ를 수행해 한국까지 따라왔었다. 미국이 우려했던 것은 그때로부터 불과 1 년 6 개월 전 필리핀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발생했던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 저격 피살사건 같은 게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전두환 정권은 만일 DJ 가 귀국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신호를 여러 번 보냈다.
전두환 정권이 DJ를 저격 살해하지는 않았지만 귀국 당일 김포국제공항을 2 만 여명의 전투경찰과 백골단으로 에워싸고 각급 정보기관에서 차출된 무술 수사관들을 비행기 안에까지 들여보내 동행한 미국측 동행인사들을 거칠게 밀어부치고 DJ 를 끌어내는 과정에서 항의하는 동행인사들과 탑승객들에게까지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러 부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외신에서는 반기문 총장을 유엔이 조직된 이래 가장 무능한 총장이라고 허구헌날 두들겨대고 있는데, 유엔사무총장 반기문은 무능한지 어쩐지 몰라도 왕년의 참사관 겸 하버드 연수생 반기문은 주독야경하는 부지런한 학생이었는지, 아니면 그 외교문서가 뭔가 잘못됐는지, 특히 이 기기묘묘한 시기에 기밀이 해제된 그 외교문서가 25 만 여 쪽이라는 데, 어떻게 그 한 장의 문서를 그토록 신속하게 발견했는지 그 흥미진진할지도 모를 배경이 조금씩 궁금해지려고 한다.
2016. 4. 17 1900(MST) sar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