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딜레마
이번 총선에서 더민주가 1당이 되고 국민의당이 약진한 것에는 ‘호남표’가 큰 작용을 했지요. 그런데, 더민주를 1당으로 만든 호남표와 국민의당을 약진하게 만든 호남표는 다릅니다. 더민주의 호남표는 수도권 호남표이고, 국민의당의 호남표는 호남지역 호남표죠.
국민의당 호남표에 대해 김어준은 “호남지역 이외의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세력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면서 “앞으로 호남이 다시 고립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5.18 때는 독재에 의해 고립되었지만, 이번에는 스스로에 의해 고립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했죠.
광주지역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광주대 노경수 교수는 <한겨례>와의 인터뷰에서 “다른 곳에서 이제 광주에 빚진 느낌이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했으며,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최민석 신부는 “가치를 보고 투표해온 광주가 이젠 정치 1번지라는 말을 못하게 됐다.”고 했지요.
바로 이것이 광주, 아니 호남의 딜레마인 것이죠.
필리버스터 1번 주자였던 김광진 의원이 지역구 출마하려고 순천에 갔더니, 선거 참모들이 표를 얻으려면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지역에서 존경을 받는 어른이겠거니 하고 찾아갔더니만, 그분 말씀이 “빈손으로 왔는가? 나는 자네가 인사하러 온다기에 한 2천만 원은 들고 올줄 알았네.” 하더랍니다. 결국 김광진 의원은 공천 경쟁에서 아슬아슬하게 탈락했고, 더민주 후보는 새누리당 후보에게 패하고 말았죠.
호남지역에서 더민주 지지율이 급락하자 문재인 씨는 당장 호남지역으로 달려가겠다고 했는데, 당 지도부에서는 계속 말렸답니다. 호남지역 출마자들도 문재인 씨가 온다는 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고, 어떤 정신 나간 후보는 문재인 씨더러 대선 출마 포기 선언하라고 삼보일배까지 했더군요. 결국 문재인 씨가 독자적 판단으로 호남으로 달려갔는데, 그 이후부터 호남에서 더민주 지지도가 치솟기 시작했죠. 그러나 너무 늦어서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고.
호남지역의 많은 분들은 이 땅에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아직도 지니고 있지요. 하지만 김광진 의원의 경우를 보면, 어떤 세력이 정권을 잡는지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기득권 유지에만 혈안이 된 세력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 세력의 집합체가 바로 국민의당이고. 결국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당을 지지한 호남표는 정권 교체나 민주주의 실현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세력이지요.
이번 총선이 새누리당의 폭망으로 끝나서 다행이지 만약 더민주가 폭망했다면, 국민의당 호남표에 대한 후폭풍은 엄청 났을 겁니다. 호남이라고 다 깨끗하고 다 민주적인 게 아닙니다. 그곳에도 반민주적이고 권력욕에 불탄 기득권 세력들이 존재합니다. 그동안은 5.18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에 그런 부분까지 함께 감싸주고 이해하려고 했다면, 앞으로는 확실하게 분리해서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함께 할 것은 함께 하고 그래야 합니다.
앞으로 더민주를 비롯하여 정권 교체를 바라는 정치 집단은 이와 같은 호남의 일부 왜곡된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서 엄청난 공을 들여야 할 겁니다. 하지만 김어준의 지적처럼, 호남 이외 지역의 민주 세력에게 남겨진 상처를 누가, 어떻게 치유해줄지도 관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상처로만 끝나지 않고 덧이 나면 의심이나 불신, 나아가 갈등이나 대립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