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미국망명을 생각했을까?
이 고가의 주택을 매입한 소유주 이름은 한재옥으로 되어있다. 한재옥이 누구인가?
1979 년 11 월 3 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식을 TV 실황중계로 본 사람들이라면 당시 유족소개와 관련된 이상한 멘트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사회자가 '큰사위 부부'라는 용어로 어느 중년부부를 소개했는데, 큰딸 부부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큰사위 부부라는 괴상한 호칭을 난생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은 매우 어리둥절해 했었다. 사람들을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든 건 큰사위가 있으면 작은사위도 있다는 말인데, 당시 박정희 씨의 알려진 자녀 중 근혜씨와 근영(후에 이름을 두 번이나 개명함)씨는 모두 미혼이었는데 결혼한 딸이 두 명이나 더 있다는 말인가 하며 의아해했었다.
암튼 한재옥의 본명은 박재옥이다. 박재옥 씨는 박근혜 대통령보다 열 다섯 살이 많은 이복언니다. 남편이름이 한병기이므로 남편의 성을 따 주택매매계약서에는 한재옥으로 기입했을 것이다.
1976 년 11 월 30 일자 뉴욕타임스 기사는 당시 한국정부의 의심스런 주택구매과정을 폭로한 바 있는데,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다음과 같은 의혹소개를 덧붙였다.
"...... Mr. Han also recently bought a $205,500 house in Scadale N.Y. There are rumours in the Korean community that the large, red brick chateau style house would be a refuse for President Park if he is overthrown. But that could not be confirmed. ......"
미국언론이 연일 폭로기사를 내고 뉴욕동포사회에 의혹이 확산되자 한국정부는 부랴부랴 한재옥이라는 소유주가 죽어서 한국정부가 이 주택을 뉴욕총영사 관저로 싸게 매입한다며 뉴욕총영사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 주택을 총영사관저로 매입했다. 누가보아도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지만, 어쨌든 그 바람에 뉴욕총영사는 자신의 상급자인 주미대사보다 훨씬 크고 호화로운 공관이 난데없이 굴러들어온 것에 즐거워한대신 왕복 두 시간이나 걸리는 출퇴근거리에 짜증을 내기도 했을 것이다.
기밀해제 외교문서에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박동진 외무부장관과 남덕우 경제기획원장관은 이 주택소유주 한재옥이 사망함에 따라 주택을 시가보다 약 5 만 달러 정도 저렴하게 매입할 수 있었다는 내용의 사실이 날조된 공문을 주고받으며 외환은행을 통해 미화 20 여 만 달러를 불법반출하여 매도의향서에 사망자로 되어있는 주택소유주 한재옥에게 지급했다. 한병기 박재옥 부부는 사망하기는 커녕 40 년이 지난 오늘 이 시간에도 둘 다 생존해 있다.
당시 정도순 뉴욕총영사는 'Letter of Intent' 에 매도자 이름을 해리엇 드래난이라는 있지도 않은 가공인물로 기입했다. 사실상의 매도자 한재옥은 죽은 것으로 되어있으니 외환은행이 가짜서류들을 근거로 한재옥에게 불법대출해 준 20 만 달러는 온데간데없이 허공으로 사라진 셈이다. 웃기는 것은 당시로서는 거액인 이 돈을 대출해주면서 Westchester 카운티 등기소에 담보권설정을 하지도 않은 바람에 현지 등기소를 통해서는 이 대출금을 갚았는지 어쨌는지도 알 수가 없게 됐다. 외환은행 (지금의 하나은행)이 답변해야 할 대목이다.
싸르니아가 궁금한 건 1976 년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저질렀던 불법외화반출사건의 전말 따위가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왜 이 대저택을 무리한 방법으로 큰딸 명의로 구입했을까, 하는 점이야 말로 밝혀내야 할 핵심적 의문이다.
와이프 육영수 씨가 살아있었을때는 마음놓고 돌봐주지 못했던 큰딸이 불쌍해서 뉴욕에 그런 집을 사줬을지도 모른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긴 박재옥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스무살 때, 즉 철없을 때 난 딸이다. 그 이후 딸을 제대로 돌본 적도 없다. 그 딸이 결혼한 후 백수건달이나 다름없었던 사위 (큰사위라는 이상한 별명이 붙은) 한병기 씨를 뉴욕총영사, 칠레대사, 유엔차석대사, 캐나다대사 등, 그의 경력에 비해 얼토당토않게 직급이 높은 외교관으로 삼아 해외로 내보낸 이유가 두 가지일텐데 그 중 한 가지는 큰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물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싸르니아는 '딸에 대한 미안함'이 뉴욕주택 불법매입의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뉴욕주택과정은 뭔가 다급한 분위기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던 인상이 짙고 시간이 지나면 불법행위가 드러날 수 밖에 없는 범정부적 차원으로 진행됐다. 단순히 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면 이토록 무리하고 위험한 방법으로 해외주택을 불법으로 구입하는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이 사건이 내포하고 있는 다른 하나의 관전포인트는 1976 년이라는 시기다. 한국정부의 미의회불법로비사건 코리아게이트가 터지면서 박정희 정권의 운명이 풍전등화 신세가 되었던 때였다. 물론 이 시기는 박정희 정권이 핵개발의사는 포기한 후였지만, 그 해 연말부터 미국의 새 권력이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자마자 유신독재에 대해 고강도 압박을 본격화했던 시기기도 했다. 그런 시기에 박정희 일가족의 미국망명공작을 벌린 게 사실이라면 서로를 원수처럼 싫어했던 미국의 정권인수위, 또는 곧 이어지는 카터행정부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플랜B - 이중플레이가 실제로 진행됐었다는 의미가 된다.
이 대저택을 무리함을 무릅쓰고 한국정부명의가 아닌 딸 명의로 구입한 이유에 대해 뉴욕타임스가 소개한 의혹은 타당성이 있다. 망명을 염두에 둔 구입이라는 추론 이외에는 다른 타당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갑작스런 죽음으로 몰락을 맞았기 때문에 그 타당한 추론이 사실로 증명될 기회가 사라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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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주택의 현재 가격이 궁금하실 수도 있겠다. 일단 그 주택은 현재 더이상 한국정부 소유가 아니다. 뉴욕총영사관은 문제의 불법매입주택을 뉴욕지역의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기 휠씬 전인 1997 년 170 만 달러에 매각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매매가격은 알 수 없지만 비슷한 가격대에 매입했던 뉴욕지역 한국 공관들의 현재가격이 2 천 만 달러에서 3 천 만 달러 사이에 형성되어 있다. 이번에 기밀이 해제된 '주뉴욕총영사관 관저매입 1977' 에서 드러난 내용이다. 문제의 주택이 있는 지역 역시 맨하튼에 필적하는 부동산 부가가치에는 못미친다고 하더라도 환경이 우수한 고급주택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넓은 부지의 chateau 급 대저택이므로 맨하튼 소재 공관들에 못지않은 주택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