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정치 이야기
안녕하세요. 명입니다.
오늘 탁신 전 총리가 귀국해서 감옥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오늘 태국의 총리는 탁신의 정당인 프어타이당 스레타 타위신이 선출되었습니다. 이번 총리 선출은 탁신과 군부가 연합 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이뤄진 결과입니다.
그동안 군부와 태국 왕실은 탁신을 죽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두 번의 군사 쿠데타와 개헌으로 군부가 상원의원 250명을 지명할 수 있게 하는 등 선거만 하면 승리해 왔던 탁신을 견제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해 왔습니다.
그런데 궐석 재판으로 징역 8년을 선고 받은 탁신은 오늘 귀국을 하며 징역을 살겠다고 얘기하고 제발로 깜빵으로 들어갔고 태국의 총리는 탁신과 군부가 손을 잡고 선출했습니다. 태국의 정치 지형이 완전 변해버렸습니다.
탁신은 치앙마이 출신입니다. 그래서 그는 태국 북부와 동북부(이싼) 지방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왔습니다. 물론 수도 방콕에서도 탁신의 정당은 언제나 1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 이변이 발생합니다. 전진당(Move forward Party 까우끌라이당)을 이끄는 피타가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탁신은 정치적 고향인 치앙마이에서 10석 중 고작 2석만을 챙겼고 피타가 7석을 가져갔습니다. 방콕에서는 피타 32석, 탁신은 단 1석만을 차지했을 뿐입니다.
피타의 구호는 쁠리안 쁘라텟 타이 빠이 두어이깐” (태국을 함께 변화시키자!)
피타가 내세운 가장 변화 중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로 왕실모독죄의 폐지입니다. 그외 동성결혼 허용, 징병제 폐지 등이 있지만 태국의 민중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바로 왕실 모독죄의 폐지였습니다.
태국은 상속세가 없습니다. 이것은 부의 대물림이 제도적으로 뒷받침 된다는 얘기입니다.
현재 태국의 왕조인 짜끄리 왕조의 태조 라마1세 짜오프라야 짜끄리가 지금 태국 국경을 확정할 때 당시 피정복자였던 각 지방의 영주들은 왕조에 충성을 맹세하고 당시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실제 당시의 왕권은 강력하지 않았고 지방의 영주들의 지지가 없으면 통치가 어려운 측면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18세기부터 현재의 왕조가 이어져 오면서 그 당시 봉건 영주들의 가문도 똑같이 이어져 내려와 지금 태국의 특권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태국은 사실상 모든 사람이 평등하지 않습니다. 특권 계급은 사법 체계의 밖에 존재합니다. 그들은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습니다. 꼬따오에서 있었던 영국 여대생 살인사건, 레드불 가문 3세의 교통사고, 방콕 경찰서장 아들의 나이트클럽에서의 권총 살해 사건 등등, 많은 사례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특권 계급의 기득권을 깨뜨리려는 첫번째 움직임이 바로 왕실모독죄의 폐지인 것입니다. 왕실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태국 기득권의 특권을 지켜주는 대들보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타는 왕실모독죄 폐지를 첫번째 공약으로 내걸었고 태국의 민중들은 피타의 정당을 제1당으로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피타는 상원의원 250명의 반대로 총리로 선출되지 못하고 지금은 언론사의 주식을 소유했다는 죄목으로 의원직 정지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지금까지 언론사 주식을 소유헸던 70여명의 국회의원 그 누구도 의원직이 정지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틈을 타서 탁신은 군부와 왕실과 손을 잡고 정권을 탈취했습니다.
피타는 총리 선출에서 프어타이 당에 반대표를 던졌고 최근 태국국립개발연구원이 행한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64.5%가 프어타이당과 군부의 연정에 대해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앞으로의 태국 정치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피타의 등장으로 탁신의 포퓰리즘에서 피타의 제도화된 민주주의로 한발 더 나간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