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외국인 500 만 시대, 견딜 수 있을까?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인구는 현재 205 만 명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최소 500 만 명에서 최대 1 천 만 명까지 늘어난다고 한다.
국토연구원이 예측한 통계다.
이 기관은 2009 년에는 2020 년 한국의 외국인 인구를 254 만 명으로 예측했었다.
지금으로부터 3 년 후니까 이만하면 정확한 예측이었던 셈이다.
대한민국 통계청은 2017 년 한국 합산출산율을 1.17 로 집계했다.
청장년 인구의 위혐적 감소를 피할 수 없으므로 외국에서 연간 수 십 만 명 단위의 노동인구를 모셔와야 한다.
한국언론은 인구절벽에 대해서는 가끔 언급하지만 인구구조변경에 대해서는 잘 보도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예측가능한 미래의 한국 디모그래피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이민이 밀려들어오는 것은 잘사는 나라의 운명이다.
노동인구의 유지나 증가가 필요하다면 더더구나 피할 도리가 없다.
유엔과 미국은 한국에 일정 수준의 난민까지 받으라고 요구할 것이다.
한국의 급격한 인구구조변경은 기정사실처럼 보인다.
이민나라 하면 미국이나 캐나다를 떠 올리지만,
새 이민나라 한국의 청사진에 이 두 나라를 비교모델로 삼는것은 적절치 않다.
두 나라는 인구구성비를 놓고 볼 때 어떤 에스닉그룹도 다수를 차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민족이 절대다수로 호스트 역할을 하는 한국과는 환경이 완전히 다르다.
한국의 이민환경은 북미 두 나라보다는 북유럽이나 서유럽 나라들과 유사한 면이 있다.
오랜 세월 한 지역에서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면서 살아왔던 호스트집단이 존재한다는 면에서 그렇다.
어쨌든 멀지 않은 미래에 '한국인의 얼굴과 피부색'이 다양해지는 것 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싸르니아의 예측이 아니고 남들이 너도나도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줄로 알고 있는 것이다.
나라 생일행사에 참가한 에드먼튼 시민들 (2017.7.1)
서울 인구 절반 이상이
여러가지 외국말로 이야기하며, 서울이 우리나라 수도라고 여기며,
내 나라 주인들 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사람마다 여러가지 새로운 느낌이 들것 같다.
생소한 느낌 슬픈 느낌 기대하는 느낌 두려운 느낌 등등
제각기 생각이 복잡할 것이다.
외국인이 인구의 절반 이상인 서울 이야기를 한 이유는 런던의 외국인 거주비율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서울보다 약간 인구가 적은 런던 전체 인구 9 백 만 명 중 60 퍼센트가 외국인이다.
그 중 상당수는 영국시민일테니까 외국인이 아니라 외국계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된다.
전체 인구 중 절반은 코캐시언(백인)이 아니다.
하긴 런던은 시장부터가 파키스탄계다.
이런 생각을 해봤다.
애국심이라는 게 있다면
런던시민의 애국심과 영국 토종 90 퍼센트가 사는 북서부 어느 소도시 시민의 애국심은 그 개념이 사뭇 다를거라는 생각이다.
나라공동체의 가치와 정체성을 느끼는 현지의 환경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는 도시가 아닌 나라로 사례를 확대해야 이야기가 편할 것 같다.
섞여살아본 경험이 없는 나라의 가치와 정체성은 민족과 전통에서 나온다.
반면 섞여사는 환경에서 배우는 최고의 가치는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하는 생활태도일 수 밖에 없다.
모자이크든 멜팅팟이든 법치와 제도 안에서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는 미덕이 가치와 정체성 그 자체가 된다.
이런 나라에서 민족주의는 미덕이기는 커녕 불온사상 취급을 받는다.
정치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특정한 에스닉 그룹이 강고하게 존재하든 아니든 마찬가지다.
각급 학교 사회시간에는 반드시 ethnocentricity (자기민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상)에 대한 비판적 지문과 함께 에세이 과제가 나올 정도다.
이런 나라 사람들에게 당신 나라가 추구하고 있는 최고의 가치와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보면 망설임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Diversity!!!"
당연하다.
이 ethic 이 무너지면 섞여사는 나라공동체는 순식간에 붕괴한다.
분리독립하든지 최악의 경우 코소보나 르완다에서 벌어진 사태 비슷한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거리에서 수 십 명 단위의 반이슬람 시위가 벌어진 적이 있다.
그런 시위가 일어나면 그 시위대 숫자보다 훨씬 많은 전혀 조직된 적도 없는 길가던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순식간에 모여들어 야유를 보내고 카운터 시위를 한다.
그들이 무슨 똘레랑스 이념으로 무장한 관용천사여서가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 국민이기도 한 어떤 사람들을 슬프게 하는 너네같은 시위는 비윤리적일 뿐 아니라 비애국적이라는 본능적인 감각이 체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가능한거다. 개인적으로는 무슬림을 싫어하든 어쨌든 이런 카운터 시위에는 참가하는 것을 나라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그런 자리에서는 의례 논쟁이 벌어진다.
때로는 서로간의 야유와 욕설로 끝날 때도 있지만, 의미있는 설전을 벌일 때도 있다.
나라를 사랑하는 서로 다른 방법론을 확인하는 흥미진진한 민주주의 교육장이다.
이제 이런 에피소드들이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이 머지않은 미래에 그런 성격의 인구구조로 바뀌어나갈 것이므로 한국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으로 대략 30 년 후면 북미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의 서유럽 어느 나라 수준 정도로는 다문화 밀도가 높아질 전망이다.
2050 년 이라면 싸르니아가 은퇴한 후이긴 하지만, 그 즈음에 한국에 살면서 활동할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다.
1970 년대 한국인들의 나라사랑은 민족과 겨례가 그 뿌리였다.
2050 년대 한국인들의 나라사랑은 무엇에 가치의 그라운드를 두어야 할까?
지금 한국에서 사용하는 다문화라는 말 자체가 캐나다의 국가모토인 multiculturalism 에서 번역된 새 단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르니아는 캐나다를 한국의 미래모델로 삼는 것은 반대한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모든 환경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떨까? 다른 점이 좀 적을까?
다문화 국가이면서도 한국과 비슷한 애국심 개념을 가지고 있는 특이한 나라가 있는데 미국이 그 나라다.
미국에서 역시 민족주의는 불온사상이지만 대신 국가를 희생적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온 천지사방에 군대를 파견하고 있는 제국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군대에 가서 해외에서 복무하고 돌아오는 것을 최고의 나라사랑 중 하나로 친다.
군복무를 마친 이민자는 시민권 일순위다.
미국은 출신국이 어디건 미국에 충성하라고 요구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할아버지가 독일에서 온 이민자지만 그는 스스로 독일인이 아니고 미국인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이 자기 모국인데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아니 다른 나라 보다 더 매몰차게 취급한다.
자기 모국의 국가원수와 악수하는 것조차 거절했다.
아마 한국 출신이 미국 대통령이 되어 한국을 그 따위로 취급했다면 당장 조국을 배반한 매국노 취급을 당했을 거다.
이제 유럽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은 캐나다나 미국보다 유럽을 잘 관찰하고 반면교사로 삼는 게 좋을 것 같다.
유럽의 이민정책은 실패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분명한 것은
이민정책이 실패했던 아니든
이제와서 이민국가를 비이민국가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설령 이민정책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이민을 포기하는 것이 살 길이 아니라
무슨 수를 쓰든 이민정책을 무조건 성공시켜야 하는 게 이 나라들의 운명이 되었다.
이민을 대폭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은 영국의 경우 우익정당 독립당에서 주로 하는데
이 당은 이번 총선에서 한 자릿수 지지를 얻는데 그쳤다.
하루가 멀다하고 테러가 난 프랑스에서 르팽당의 고정 충성 지지율은 15 퍼센트 정도다.
많은 매체에서 독립당이나 프랑스의 국민전선 같은 정당을 극우라고 하지만, 사실 극우라는 말은 함부로 쓰면 안된다.
극우는 나치나 KKK (정치단체는 아니지만) 같은 완전한 순혈배타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집단을 말한다.
어쨌든 영국도 프랑스도 이민문제로 내전 일보직전이라도 다가간 것 처럼 호틀갑을 떨어댄 매체의 보도와는 많이 다른 결과가 나왔다.
보수당마저 소수집권당으로 전락했다.
왜 그랬을까?
토종 보수 유럽인들은 배알이 없는 바보들이어서 그랬을까?
속으로야 싫든 좋든 그들은 19 세기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나라 당 수 백 만 명 씩의 이민자를 껴안고 사는 유럽사람들은 이제와서 반이민 정치세력에게 정권을 줄 도리가 없다.
그들에게 정권이 돌아가 본들 상황이 바뀌지도 않는다.
갈등만 증폭되어 사회가 불안해 지다가 테러가 아닌 내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 사람들은 차별의 역사를 처절하게 경험한 사람들이라 그 끔찍한 결말을 잘 알고 있어서 그런지 이민문제에 있어서는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유럽에서는 혈통적 개념으로서의 민족주의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지정학적 조건상 교류와 전쟁이 동시에 활발할 수밖에 없었던 관계로 혈통이라는 의미가 그다지 중요한 가치로 작용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고대시대부터 그랬다.
시오노 나나미가 고대 로마를 그토록 사랑했던 이유는 로마가 지금의 미국보다도 보편적 가치가 일반화됐던 놀라운 제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작가가 자기책 로마인 이야기에 그렇게 써 놓았다.
이 일본 아줌마는 로마사랑이 지나쳤는지 이태리 신랑과 결혼까지 했다.
싸르니아는 로마가 망한 이유를 기독교라는 지극히 비관용적이고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진 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한다.
어쨌든 유럽인들은 그 좁은 구역에서 서로간의 차별과 전쟁을 무수히 겪었다.
앵글로색슨은 웨일즈와 스캇티시를 차별했고 또 그들은 아이리쉬를 차별했다.
또 그들은 자신들의 선생이나 다름없는 이탤리언을 업신여겼다.
또 그들은 동유럽 사람들과 무슬림들을 적대시했다.
이런 과정은 유럽에서 뿐 아니라 미국으로 이주해 온 후에도 그대로 겪었다.
그리고 나서
인류역사상 씻을 수 없는 대비극인 홀로코스트를 경험했다.
유럽은 아시아 아프리카를 상대로 약탈행위를 했지만,
이면에서는 고통의 역사가 이처럼 극단적으로 치열했다.
서구사회에 때로는 주목할만큼 지나친 관용사상이 전파된 것은 홀로코스트 비극을 경험하고 나서일 것이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 탄생한 관용적 태도가 문화와 제도로 확산되고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는 대개 1968 년 전후다.
싸르니아는 유럽의 이민정책이 잠정적 개념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큰 이유는 한 가지다.
유럽에 유입된 이민은 북미와는 달리 의미있는 다수가 주류로 진입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일부 엘리트가 시장도 되고 정치인도 되고 검찰총장도 되고 교수도 됬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이민자가 두 세대 안에 그 나라의 중산층으로 진입하여 주류계급안에 안착하느냐다.
여기서 주류란 생활과 문화가 안정된 평균적 시민계급을 말한다.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차별과 텃세때문에 중산층에 진입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진짜 이유가 아닌 것 같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계층상승을 이룰만한 지력과 재산을 가지고 있는 이민보다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평생 하층민 신세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경제난민 비숫한 사람들이 이주민의 다수를 이루었다.
이주민 대부분은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 들어왔는데, 이들의 종교적 특성 역시 타문화와 어울리기 힘든 요소가 있었다.
한국에는 어떤 종류의 이주민들이 들어오게 될까?
미래의 이주민들에 대해 현재의 한국인들은 어떤 생각이나 의견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 한국인들은 지금 두 가지 정도로 의견이 나뉘어 있을 것 같다.
(우리라니 ??? 당신은 한국사람 아니니까 우리라는 말은 빼 !!!
......흑흑)
첫째 의견은 이민을 완전히 차단하고 옛날처럼 완벽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공유하는 한국인들만의 나라로 되 돌아가자는 의견이다.
외국인 인구를 전체인구의 0.5 퍼센트인 25 만 명 이하로만 유지하는 'Make Korea Korean Again'을 외치는 사람들이 이들이다.
그런데 이 분들의 의견이 실현되려면 동반수행해야 할 과제가 있다.
현재 2 백 만 명이 넘는 외국인 대부분을 나라 바깥으로 다시 추방해야 한다.
이들을 국내에 둔 상태에서 이민차단 정책을 벌이면 이들은 분명히 정치세력화하여 이민차단에 대한 강력한 반발과 저항운동을 벌일 것이다.
아울러 여성의 신체를 국가의 공공재로 선포하고 출산율을 2.5 퍼센트 이상 강제로 끌어 올리는 인구유지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정책을 수행하려면 아마 비상계엄령을 선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둘째 의견은 이민유입을 인정하고 이주민을 새 국민으로 받아들이되 주류문화를 유지하고 보존하자는 의견이다.
정책으로 치면 멜팅팟 정책이 될 것이다.
가능하면 한국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한국문화에 동화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만을 받아들여야 이 정책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27 년 간 전형적 이민나라에 살면서 느낀 점을 바탕으로 편견섞인 의견을 조금 말하자면,
종교색채가 옅은 동아시아 나라 사람들이 비교적 성실하면서도 현지문화 친화적이다.
동유럽계 코캐시언들도 한국인들과 비슷한 정서가 많아 금방 친해진다.
참 하기 싫은 소리지만
이민나라가 실패하지 않으려면 미래에 안정된 직업을 가질 능력이 되는 이민자를 받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유럽 여러나라들은 육지봉쇄가 어려웠던 점도 있지만, 과거 이 점에 소흘했기 때문에 지금 다소 소란과 진통을 겪고 있다.
1 년에 약 30 만 명 정도의 이민을 받는 캐나다는 가족초청을 제외한 모든 카테고리의 이민조건이 매우 가혹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옛날에 내가 올 때 와는 완전히 달라진 것 같은데,
돈이 많거나, 고학력이거나, 전문가 수준의 숙련노동자 아니면 영주권을 받기가 대단히 어려운 네거티브 이민정책을 구사하고 있는 중이다.
이민에 대한 반감이 별로 없는데도 그렇다.
2015 년 겨울 시리아에서 난민 2 만 5 천 명을 받을 때 뒷이야기를 들으면 가관이다.
당시 캐나다는 마치 천사나 된 것 처럼 전 세계에 은근히 온갖 생색을 다 냈는데,
속으로는 원래의 이민기준에 합당한 난민들만 추려서 2 만 5 천 명 인원수를 채우느라고 진땀깨나 흘려야 했다.
난민심사는 이민심사와 달라서 시스템이 붕괴한 난민들의 모국에서 서류의 진위여부를 확인할 도리가 없다.
정보수사분야의 프로들은 물론이고 문학박사에서부터 목수에 이르기까지 온갖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사자문인력으로 대거 동원되어 면접과정을 통해 병아리감별사처럼 캐나다 사회에 보탬이 될 가능성이 있는 난민들을 추려냈다. 테러리스트를 결러내기 위해 심사과정이 복잡하고 길어졌다는 그럴듯하고도 당연해 보이는 설명이 뒤따랐다.
기왕에 이민을 피할 수 없다면,
한국사회에 짐이 되지 않고 보탬이 될 가능성이 높은 우수인력을 추려내는 이민심사 프로그램을 수립하는 게 참 중요할 것 같다.
우수한 이민자가 들어오면 대체로 그 가족이나 후손들도 덩달아 우수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나라가 전체적으로 별로 손해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세상에 외국인에게 관대한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도 새 국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어서 결코 관대하거나 나이브해서는 안된다는 것에 동의한다.
단, 일단 새 거주민으로 받아들인 영주거주민들에 대해서는 장차 절차에 따라 새 국민이 될 사람들이니만큼, 이 새 식구들을 "우리 민족으로 동화해 !!" 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닌, 국가라는 민주적 제도의 틀 안에서 '공존하는 타자'로 존중하면서 함께 살아가다보면 앞으로 생각보다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 같다.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맘을 수술해서라도 너그럽게 고치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