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의 동포입니다
한국말은 성의없이 설렁설렁하면 기막힌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국가와 민족에 의미가 없다고 했으니 당신은 동포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신 분이 계셔서요, 내심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저는 국가와 민족에 의미가 없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인식의 주체로서의 개인'과 역사적 집합산물로서의 공동체 간에 가치서열을 분명히 해야 혼란이 없을 것이기에 본질적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출발점은 국가/민족 보다는 개인이어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한 적은 많습니다. 맥락이 있는데 한 구절만 달랑 가져와 '니가 이런 주장했다'고 하시면 곤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이란 a natural person 이라는 말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지닙니다.
인식의 유일한 주체라는 의미입니다. 국가든 가정이든 개인 이외의 어떤 존재도 세계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근대철학에서 <개인의 발견> 이라고 할 때 그 개인과 개인주의 할 때 그 개인은 아주 다른 개념입니다.
개인의 발견이야말로 종교지배와 집단권력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인권-자유-평등-복지와 같은 새로운 사고와 제도를 보편화시킨 인식혁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인식의 유일한 주체로서의 개인은 지존의 존재로서 적어도 제도와 공적영역에서 차별과 소외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현대문명의 핵심입니다.
개인의 발견이 없었다면 국가나 교회 등 집단권력을 통제할 가치수단 자체가 생산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공리주의적 선택이 아무런 고민없이 선택되었을 것 입니다.
서구는 아직도 기독교가 지배하는 야만과 무지의 세월 안에 갇혀 있었을 것 입니다.
제도안에서 인종 종교 국적 사상 성별 및 성적성향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아니한다는 차별금지법 같은 것은 논의조차 시작될 근거가 없었을 것 입니다.
차별금지법은 양도소득세법 같은 일개 법률이 아니라 헌법 위에서 헌법을 통제하는 자유인권권리헌장로서의 최상위법 기능을 해야 하는 근거도 개인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에 대한 깨달음에서 출발합니다.
동성결혼 합법화, 이주아동보호법, 난민입국허가 등을 둘러싼 거의 모든 사회적 논쟁의 출발점 역시 깊게 들어가서 따지고보면 개인과 공동체의 가치서열을 둘러싼 철학적 사유 논쟁으로 귀착됩니다.
국가란 현실적이고도 이기적인 기능공동체라는 그 특성 때문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주류 문화와 정체성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주민과 난민 문제를 처리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동성결혼 합법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입하려는 새 인권보호정책의 이질성이 나라 공동체 정체성 유지에 치명적일 정도의 임계점에 가까울수록 그만큼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인권에 대한 사유와 고민이 깊고 치열하다고 간주해도 무방하겠습니다.
국가와 제도는 현상유지를 하려는 보수적 경향이 강한 반면, 개인은 정체를 거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 공동체 안에서의 갈등과 투쟁을 통해 국가를 변화시켜 나갑니다. (어제 독일이 동성결혼을 합법화 했군요. 축하합니다. 늦었지만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차이니스 타이페이 (타이완)에게도 축하의 인사를 보냅니다.)
그런데,,
촛불혁명이 성공할 정도로 제도 민주주의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탁월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왜 절대다수 네티즌이 이주민아동보호법을 결사반대했을까,
1 년에 30 명 미만으로 난민을 받았다는 것은 지금까지 개인의 인권과 국가 정체성 유지라는 딜레마의 전선에서 이 사회가 치열한 윤리적 고민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반증인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동성결혼 합법화 이야기만 나오면 보편적 시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평법한 사람들도 펄쩍 뛰면서 거부반응을 보일까,
이런 의문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 입니다.
이런 의문은
자국민의 인권과 이주민 아동 또는 성소수자의 인권이 기본권과 관련해서도 차별적이어야 한다는 인식의 토대 위에 서 있는 인권윤리를 고민없이 유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문으로 이어지는데,
저는 이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성립이 불가능한 논리결여된 가치가 성립 가능하게끔 엉뚱한 명분을 부여해 주고, 변화를 거부하는데 동력을 심어준 요인이 무엇일까 찾아보다가, 그것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독특한 민족주의와 혈통주의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두 글 건너 한 번 씩 한국의 독특한 민족주의를 비판적으로 언급해 왔습니다.
한국 온라인 공간에서 이런 식의 글쓰기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제가 모르지 않습니다.
엄연한 한국 국민인 이자스민 같은 사람도 저렇게 공격을 당하는데 국적법상 외국인인 저 같은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 입니다.
종족본능은 생물의 교유한 특질이므로 팔이 일단 안으로 굽는 것은 당연합니다.
국가는 국제적 관계에서 집단이익을 조직적으로 구사하는 유일한 단위이므로 때로 집단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싸움을 벌이는 것도 당연합니다.
근데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지요.
파시스트도 아닌 멀쩡한 촛불시민이 GDP 순위 세계 12 위인 나라에서 난민을 1 년에 30 명 받는 걸 잘하는 정책이라고 믿고 있고, 기본을 초과하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주민아동보호법에 80 퍼센트 이상의 네티즌이 욕설을 퍼부으며 반대해서 무산시킬 정도라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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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주의 민족주의 이야기 나왔으니까,
어디선가 한 말인데, 여기서는 한 적 없으니 제가 겪으면서 느낀 사례 하나 가져와 볼게요.
공적영역에서조차 제도화되어 있는 한국의 인종주의적 민족주의로 인해 제가 뜻밖의 혜택을 보는 사례가 하나 있기는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고 모르시는 분은 모르시겠지만 저는 한국여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공항에 입국할때는 ‘대한민국 여권’ 입국장을 통해 입국할 수 있습니다. Overseas Korean (해외동포)로서 법적으로는 외국인이지만 혈통이 한국계라 내국인 입국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제도 자체가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남기고 간 몇 안되는 좋은 정책이라고도 생각합니다.
2015 년엔가, 궁금해서 한국에 영주하는 외국인들 (이를테면 한국인들의 베트남 출신 배우자들)은 어디로 입국하는가를 알아보았더니 그들은 여전히 외국여권 줄에 오래 기다렸다가 입국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나서부터 저는 더 이상 대한민국 여권 줄에 서지 않습니다.
적어도 국가의 행정과 관련된 공적영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제도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한국에 영주의사와 합법적 status 를 가지고 한국에 거주하는 사람은 엄연히 한국이라는 나라의 합법적 구성원입니다. 적어도 혈통만 한국계인 비거주 외국인보다는 훨씬 더 한국 국민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Overseas Korean 에 대한 입국혜택을 만들 생각을 했다면 당연히 그들보다 더 한국국민에 가까운 자격을 갖추고 있는 합법적 레지던스, 그 중에서도 특히 영주권자들에 대해서는 함께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혜택을 주어야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국가기구의 그 사고방식 자체가 배타적 혈통주의의 강력한 멘탈이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진보진영 활동가들조차 식민지 역사에서 드러나는 거대담론에서만 민족문제를 이야기하곤 하는데,
한국사회 구석구석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의 디테일에서 이 문제를 함께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많은 부정적 사례들을 수집할 수 있을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