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성의 눈에 비친 제주난민...
지난 주말 제주도로 휴가를 다녀왔다. 여행은 대체로 순조로웠는데 막바지에 불쾌한 일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일행과 대기하는 중에 어떤 남성 노인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대번에 그가 우리와 대화하려고 말을 건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 동안 자신보다 나이가 적고 여성인, 만만한 상대에게 농이나 치려는 의도가 뻔히 드러났다. 왜냐하면 그가 웃으면서 우리에게 “공주님들은 어디서 오셨나?”라고 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서른일곱살인데, 무방비 상태에서 알지도 못하는 노인에게, 디즈니 영화의 공주가 되고 싶은 네댓살 아동한테 어울릴 법한 호칭으로 불린 것이다. 화가 나서 시선을 주지 않으면서 건성으로 답했지만 그는 계속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아가씨라는 호칭을 쓰면서 반말로, 우리도 다 아는 버스 노선을 알려준다. 서서히 짜증이 밀려올 때쯤 나는 예의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냥 참아.’
목소리가 아니라도 나는 참는다. 너무나 당연하게, 이런 일이 열번 일어나면 열번 다 참는다. 참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나도 마음은,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면서 불쾌하니까 말 걸지 말라고 받아치고 싶다. 하지만 외지에서, 그것도 여행 중에 그만한 용기를 내는 게 쉽지 않다. 분노한 노인과 드잡이를 하다가 폭행이라도 당하면 노인이 호의로 한 말에, 젊은 여자가 버릇없이 대들었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 와중에 그 일이, 여행하던 무리에서 남자들이 나가고 여자들만 남자마자 일어났다는 게 타이밍상 매우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주도에 얽힌 유감스러운 기억은 이게 다가 아니다. ‘여자’와 ‘여행’에 ‘혼자’가 더해지면 이와는 또 다른 새로운 양상이 펼쳐진다. 나는 지금까지 제주도에서 혼자 여행한 적이 많다. 가장 기억에 남는 때는 제주도에 올레길이 처음 생기고 제주도 붐이 시작될 무렵의 여름이다. 얼굴이 빨갛게 익은 채로 올레 1길을 걸었다. 성산일출봉 부근까지 가서 우도로 들어가는 배를 탈 예정이었다.
이렇게 도보 여행을 하면 밭일을 하거나 작은 가게를 보는 어멍과 할망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그들은 내가 어디에서 차를 타야 하는지 알려주고 시원한 물을 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면서 잔소리도 잊지 않았다. ‘혼자 다니지 마’, ‘결혼해서 남편이랑 다녀’는 그나마 무난하다. ‘여행하던 여자가 죽은 것 모르냐’는 협박성 꾸지람과 ‘이렇게 혼자 다니는 걸 엄마가 아시느냐’는 말까지 들어봤다. 나중에는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가 분쟁지역도 아니고 그때도 내 나이는 서른살 언저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멍과 할망의 잔소리에 마냥 짜증을 낼 수는 없는 것이, 당시는 올레 1길을 걷던 여성 관광객이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나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또 그 일이 아니라도 제주도에서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가 적지 않게 발생한다. 이런 이유로 올레길을 가장 많이 걷고 알린 이들이 혼자 여행하는 여성임에도, 우리는 현지인들에게 ‘왜 위험하게 혼자 다니느냐'는 꾸지람을 듣곤 했다. 그런 말을 자꾸 들으면 마치 우리 존재가 위험을 유발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생각에 잠긴 사이에 노인이 떠났고 버스가 도착했다. 내부가 한산했기에 짐이 많은 일행과 나는 한자리씩, 따로 앉았다. 앉은 채로 잠깐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는데 대각선 방향에 앉은 외국인 남성이 나를 보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릴 때까지, 나는 그가 왜 웃는지 알 수 없었다. 굳은 얼굴로 대응했으나 그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고 옆자리 남자와 대화하는 간간이 힐끔거리면서 웃었다. 결국 또 참아야 했다. 나라는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노인의 무례한 농담도, 어멍들의 꾸지람도, 외국인 남자의 기분 나쁜 시선과 웃음도 받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주말 내내 인터넷에는 제주도에 정착하게 된 예멘 난민에 관한 치열한 논쟁이 계속됐다. 그러나 제주도에 머무는 사람들의 얼굴엔 공포는커녕 웃음과 여유가 가시지 않았다. 여느 해와 다를 바 없는,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초여름의 제주도였다. 나 또한 그 속에서 쉴 새 없이 웃으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스마트폰만 켜면 평온함과는 상반되는 감정이 몰아쳤다.
나는 난민을 악마화하며 사지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주장이나 청원, 자극적인 가짜 뉴스를 옹호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무가치하고 위악적이다. 그럼에도 처음 난민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제주도에서 혼자 사는 친구들을 떠올렸다. 한국 안에서도 상대적으로 여성 인권이 낮은 지역인 제주도에 국교가 이슬람교인 외국인 남성 504명이 들어왔다고 하니, 안전에 취약한 여성들이 두려워하지 않을까?
이때의 두려움은 위험을 감지했을 때 울리는 경보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서 ‘저 길로 가면 위험하지 않을까?’, ‘아까 그 남자가 지은 표정이 어떤 암시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모두 이러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여성은 무수한 사례와 간접 경험으로 위험을 감지하는 법을 체득했고 그때마다 경보가 울린다.
그러나 난민 이슈에 있어서 유독 여성이 느끼는 두려움은 인정받지 못한다. 어떤 논지, 어떤 어조로 목소리를 내더라도 돌아오는 것은 공포와 무지에 호도된 인종차별이라는 비난뿐이었다. 그래서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서도 수도 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는 정말 인종차별주의자인가?’
나를 공주님이라고 부르던 노인, 웃음과 시선을 보내던 외국인 남자, 심지어 같은 여성인 어멍들도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가 여자임을 인지하게끔 하고 불안을 자극했다. 예로 든 사건들은 나름의 맥락이 있고 사소함, 또는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여성이므로 겪는 일이라는 점에서 보면 본질은 같다. 그러므로 제주도에 난민인 예멘 남성이 아니라 서구권의 백인 남성 504명이 들어왔다고 해도 경보는 발동했을 것이다.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을 하든 안전을 최우선으로 걱정하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측하고 한발 앞서서 조심하고 행동을 단속하는 것은 ‘여성의 일’이기 때문이다. 숨을 쉬듯 익숙한 삶의 양식이고 우리는 평생 이러한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차라리 여행 중에 페이스북에서 읽은, 무수한 글을 쏟아낸 사람들처럼 명쾌하게 사고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희가 걱정하는 폭력이나 범죄는 없을 거니까 미리부터 유난 떨지 마’ 혹은 ‘그 남자들 너희 안 꼬셔’ 등등. 비꼼이 아니라 진심이다.
그러한 면에서 난민 이슈는 이 사회가 여성의 두려움을 어떻게 다루는지 보여주는 또 하나의 계기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여성의 두려움에 향하는 적대적이고 무자비한 시선이 인종차별주의자 낙인보다도 더 아프게 박혔다.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조차 여성의 두려움에 멋대로 이름을 붙이고 아무렇게나 그것을 호출한다. 이번 난민 이슈 앞에서는 그것은 유난 떨기와 지나친 예민함, 무지에 근거한 공포라고 불렸다. 나는 그것이 하루아침에 부주의함이나 조심성 부족, 사악한 의도나 거짓말 등으로 둔갑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더욱 끔찍한 것은, 여성이 이러한 시선에 익숙해지면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도 확신을 갖지 못한다는 점이다. 두려움을 존중받지 못한 여성들은 ‘왜 이렇게 예민해?’와 ‘조심했어야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눈치나 보게 된다. 그리고 상당수의 여성은 지금보다 더 조심하는 쪽을 선택한다. 불쾌한 농담이나 시선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참는 조심, 종국에는 여성의 자유를 제한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그 ‘조심’ 말이다. 우리는 여성의 조심만으로 두려움을 잠재우고 폭력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수차례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런데도 언제나 가장 쉬운, 여성의 조심에 기댄다. 언제나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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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6월30일(토)자 <한겨레> 신문에 실린 어느 여성의 기고문이다.
(원문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1343.html)
제주난민 문제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서 다양하게 인식된다.
여성이냐 남성이냐, 전쟁을 경험한 세대냐 아니냐, 취업자냐 미취업자냐, 제주도민이냐 아니냐 등등...
근거 없는 이슬람 포비아를 무분별하게 퍼트리는 것은 문제가 많다.
난민에 찬성하면 좋은 사람이고 반대하면 나쁜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단정 짓고 편을 갈라서 비난하는 것도 옳지 못한 태도이다.
제주도는 4.3의 처참한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지역이다.
70여 년 동안 피해자로 살면서 말도 제대로 못해온 그곳의 사람들에게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다’ ‘게거품을 물고 있다’는 식의 표현은 과연 온당할까?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비이성적 언어로 욕설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는 것은 결국 폭력일 뿐이다.
그게 누구이든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