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나와라
회담을 취소하라는 강력한 압력은 미국의 반북주류집단에서 나왔지만 회담취소에 대한 정중한 형식의 공개편지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문장을 다듬고 비문을 말이 되게 고치고 철자법을 교정해 준 건 최측근 참모들이겠지만, 상대를 자극하지 않는 최대한의 공손한 어법으로 제한적 반격을 하는 편지의 기본골격을 구성한 것은 도널드 트럼프 그 자신임이 분명하다.
이 공개편지가 발표되기 전 23 일 밤과 24 일 아침 사이에 백악관에서 숨막히는 긴장과 갈등이 벌어졌다는 것은 오늘 오전 나타난 트럼프 대통령의 평소 그답지 않은 초췌하고 긴장된 모습으로 미루어 추정할 수 있다. 놀라운 점은 이 톤다운되어 있으면서도 중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어색한 공개편지가, 트럼프 대통령이 일괄적 CVID가 아닌 단계적 거래해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파격적인 발언을 한 지 불과 몇 시간 후에 발표되었다는 점과, 이런 단계적 해법 발언 자체가 싱가포르 회담취소의 직접적 이유로 거론한 최선희 조선 외무성 부상의 마이크 펜스 '아둔한 멍텅구리'발언 이후에 나왔다는 점 등을 볼 때 매우 혼란스러운 내부 갈등과 격돌이 벌어졌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His Excellency Kim Jung-Un Chairman of the State Affairs Commission (김정은 국무위원장 각하)로 시작하는 이 공개편지의 핵심은 북미대화자체를 없던 일로 하자는 게 아니다. 6 월 12 일로 잠정결정되었던 북미정상회담이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으니 다름 기회에 가졌으면 좋겠다는 미국측의 의견을 담고 있다. 결정이 아니라 의견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대화재개 주도권을 조선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즉 '지금 화가 많이 나 있는 것 같으니 화가 풀린다음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면 언제든지 다시 만나는 약속을 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 아직 희망이 남아 있을까?
겉으로 보이는 당장의 상황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북미회담 취소에 대한 결정이 백악관의 통일된 대북전략에 따라 내려졌다기보다는, 미래의 대북관계를 해석하는 논쟁에서 조선의 현재 지도부를 전복하고 그 체제를 와해시키려는 개입주의 강경세력이 승리한 기조아래 이런 결정이 내려진 것이기에 그렇다. 트럼프 정권의 부통령이면서도 전형적인 반북개입론자인 마이크 펜스가 느닷없이 카다피를 들먹이며 김정은을 노골적으로 협박했을 때 내달 싱가포르에서 예정되었던 정상회담에 치명적인 암운이 드리워졌었다.
조선측의 두 차례에 걸친 대미공격은 미국 전체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존 볼튼과 마이크 펜스 같은 구체적인 인물로 대변되는 반북강경집단을 표적으로 한 것이었지만, 이게 오히려 미국의 반북강경세력을 자극해 그들을 단결하게 함으로써 트럼프로 하여금 그들에게 잠정적인 굴복선언을 하게 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미화해를 통해 대중국 전선을 재정비하려는 미국내 신보수(네오콘과는 다른 개념의)가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긴 것은 아니므로 장기적인 상황은 여전히 유동적이다.
다행히 트럼프 대통령의 공개편지가 발표된지 수 시간 만에 나온 조선의 입장은 미국의 반북강경집단이 영향력 확대를 위해 활용할 숙주를 효과적으로 차단할만큼 유화적이다. 조선 외무성 김계관 제 1 부상의 이름으로 오늘 발표된 담화는 트럼프 대통령의 공개편지에서 드러난 대화가능성 여백을 찾아 거기에 사려깊게 화답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다.
다음은 김계관 외무성 제 1 부상의 담화 마지막 부분-- "하지만 조선반도와 인류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하려는 우리의 목표와 의지에는 변함이 없으며 우리는 항상 대범하고 열린 마음으로 미국측에 시간과 기회를 줄 용의가 있다. 만나서 첫술에 배가 부를리는 없겠지만 한가지씩이라도 단계별로 해결해나간다면 지금보다 관계가 좋아지면 좋아졌지 더 나빠지기야 하겠는가 하는 것쯤은 미국도 깊이 숙고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아무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용의가 있음을 미국 측에 다시금 밝힌다."
핵강국 미국 대통령과 신흥 핵강국 조선 국무위원장이 벌이고 있는 진검승부의 현재국면은 '노망' '뚱보'와 같은 막말과 욕설이 난무했던 난투극에서 '국무위원장 각하' 또는 '대통령님'으로 시작하는 한층 격조있는 대화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쨌든 북미관계는 장기적인 틀에서 진화하고 있는 게 틀림없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공개편지에 대한 김계관 외무성 제 1 부상의 답변은 사려깊고 훌륭하다.
조선 지도부에 한 가지 충고하고 싶은 것은,,,
이런 내용의 담화를 다음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육성으로 발표하기 바란다.
그러면 미국의 좀 더 신중하고 의미있는 반응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2018. 5.24 1800 (MST) sarnia
Edmon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