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또는 지식인의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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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또는 지식인의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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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11테러 직후, 수전 손택은 부시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반(反)이성적인 분위기에 휩싸인 미국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부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고 알고 있다면 그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수전 손택에게 “애국심이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문제를 명확히 제기하고, 널리 만연된 경건함을 반박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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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뉴욕에서 태어난 수전 손택은 세 살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다. 시련도 일찍 찾아왔다.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모피 사업가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던 수전 손택의 아버지는 딸이 다섯 살 되던 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외국에서 돌아가셨어요.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지도 몰랐습니다. 몇 달이 지난 후에야 알았어요.” 아버지의 부재는 직격탄이었다. 가세가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전 손택은 천식을 앓았다. 뉴욕에서 플로리다로, 또다시 애리조나로 이사를 반복했다.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자신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크게 특권적인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굶거나 동냥 그릇을 들고 거리에 서 있지는 않았으니” 자신의 처지를 쉽게 비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여전히 아버지의 죽음은 거짓말 같았고, 정처 없이 떠도는 삶은 쓸쓸하고 허무했다. 현실을 잊고 싶었다.

수전 손택은 책을 읽을 때만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 여섯 살 무렵, 퀴리 부인의 전기를 읽었다. 화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이 더욱 의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열두 살 되던 해에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을 굳혔다. “문학이 저를 집어삼켰죠. 제가 정말 원했던 건 다양한 삶을 살아보는 것이었고, 작가의 삶이 가장 포용적으로 보였어요.” 수전 손택은 앙드레 지드,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버지니아 울프, 셰익스피어, 찰스 디킨스, 에드거 앨런 포, 브론테 자매, 빅토르 위고, 월터 페이터, 찰스 램, 잭 런던 등의 작품들을 사랑했다.

10대 초반에 수많은 고전을 외우다시피 한 수전 손택에게 학교 공부는 수월했다. 15세에 버클리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새로운 학풍을 익히고 싶어 시카고대학교로 옮겼다. 그곳에서 만난 필립 리프와 사랑에 빠졌다. 사귄 지 일주일 만에 부부가 되기로 했다. 17세에 결혼한 수전 손택은 2년 후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절망적이었다. “나는 전쟁 같은 결혼 생활로 겁에 질리고 마비되어 버렸다. 이러한 전투는 치명적이고 사람을 말려 죽이며, 날카롭고 고통스러운 연인들의 투쟁과는 정반대에 서 있는 안티테제다.” 변화가 필요했다.

1958년, 수전 손택은 유럽으로 향한다. 옥스퍼드대학교와 소르본대학교에서 공부하며 삶의 기쁨을 되찾았다. 빠른 속도로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한다. 수전 손택은 25세에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자신감이 생겼다. 이혼 후 혼자서 아들을 키우며 자주 일기장을 펼쳤다. “어떤 장애가 가로막든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정신”을 붙들고 싶었다. 자신의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 “난 글을 쓰고 싶다. 나는 지적인 환경에서 살고 싶다. 음악을 많이 들을 수 있는 문화의 중심에서 살고 싶다. 이 모든 것과 그 이상을 원한다.” 읽어야 할 책도 쓰고 싶은 글도 넘쳐났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강의를 맡았지만, 학자보다 작가의 삶이 더욱 궁금했다. 대학 강단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괜찮은 글을 만들어 내려면 쓰고 다시 쓰고 또다시 쓰면서 수천 시간 동안 방 안에 혼자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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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은 “다른 사람과 힘을 합쳐서 뭔가를 만드는” 영화, 연극, 사진, 음악, 춤, 방송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른바 고급 예술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허물고 싶었다. 1966년 수전 손택은 평론집 <해석에 반대한다>를 출간하며 파격적인 질문을 던진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가하는 복수다.” 전 세계 지식인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현실정치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1966년 ‘파르티잔 리뷰’에 ‘지금 미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기고하고, 베트남전쟁의 폐해와 미국 사회의 허상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수전 손택은 “예술의 주된 과업은 대립 의식을 강화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고, 인간의 행동과 사유는 “역사적인 창조물”이라고 믿었다. 그의 생각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순탄할 것만 같았던 수전 손택의 앞날에 큰 위기가 닥친다.

1974년, 수전 손택은 유방암 4기 판정을 받았다. 겨우 40대 초반에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통보를 받자 분노에 휩싸였다. 곧 이성을 되찾았다. “암 환자는 왜 암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심리적인 벌을 받는가?” 사실 왜 이런 가혹한 벌을 받아야만 하는지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죄를 지어 암에 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치료를 받을 것인가? 문제 해결의 관건은 오직 치료에 달려 있었다. “질병은 그저 질병이며, 치료해야 할 그 무엇일 뿐이다.” 수전 손택은 질병을 주제로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암이라는 질병에 걸렸다는 사실 때문에 겁에 질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는 생각을 제공”하고 싶었다. 그는 1977년까지 약 3년 동안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1978년,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을 출간한다.

수전 손택은 유방암을 극복했다. “살아 있어서 기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행복해요.” 죽음의 위기를 한 차례 넘긴 수전 손택은 개인의 병은 의학으로 고칠 수 있지만, 사회적인 모순과 갈등은 해결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사회적인 질병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긴 투병 끝에 자신의 삶이 “여러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고” 결론지었다. 타인의 고통은 나와 무관하지 않았다. 수전 손택은 인권 운동가로 활동했다. 1989년 2월, 이란의 호메이니가 <악마의 시>를 출간한 살만 루슈디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자, 수전 손택은 즉각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무엇보다 전쟁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사회적 재앙이었다. 베트남전쟁 당시 ‘하노이 여행기’를 발표해서 미국 내에서 반전 여론을 주도한 바 있었던 수전 손택은 1993년에 내전 중인 사라예보를 방문해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무대에 올렸다. “세르비아의 대공포에 의해 격추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 유엔군 비행기를 타고” 갔다. 전쟁의 폭력성을 고발하면서도 아름다움과 희망의 가치를 전달하는 데 문학과 예술이 가장 적합하고 효과적이라고 믿었다. “문학이라는 모험의 옹호자” 수전 손택은 1998년에 또다시 암과 사투를 벌였다. 수전 손택은 두 번째 치료를 잘 마쳤지만, 미국 사회는 점차 병들어가고 있었다. “이타주의가 공격을 받고” 있었다. 수전 손택은 용기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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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은 전쟁 중이던 사라예보 한가운데서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해 반전 메시지를 전했다. 사라예보에 조성된 수전 손택 거리.



2001년 9·11테러 직후, 수전 손택은 부시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반(反)이성적인 분위기에 휩싸인 미국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부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고 알고 있다면 그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수전 손택에게 “애국심이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문제를 명확히 제기하고, 널리 만연된 경건함을 반박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2003년 프랑크푸르트국제도서전에서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한 수전 손택은 문학을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라고 정의하며, 문학을 선택했기에 “국가적 허영심, 속물근성, 강제적인 편협성, 어리석은 교육, 불완전한 운명, 불안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다행스러워했다. 다만 죽음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듬해인 2004년 12월, 71세의 수전 손택은 골수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투병의 경험을 작가의 사회적 책무로 확장시켰던 수전 손택은 병들어가는 사회를 치료하기 위해 문학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믿었고, 자신의 신념을 마지막 순간까지 실천했다. 그는 “독서와 내면의 가치가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문학을 옹호하고 있을 것이다. 글쓰는 여자는 세상을 포용한다.

 

원문보기 : 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2977161?fbclid=IwAR29xK5Abo9MF3xj7av179FdFJQk7uZHnQFrcRXvYn-kW2RH6uh3Z1QGgj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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