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도 힘든 이유
"문제는 ‘남성이 힘든 이유가 여성 때문인가’다. 남성의 삶이 힘든 이유는 남성 문화가 만든 계급, 인종, 지역 차별 등에 의한 것으로, 성별 제도의 피해 집단은 여성이지 남성이 아니다. 여성이 남성의 임금을 반으로 깎고, 여성이 남성을 성폭력하고, 가정에서 구타하고, 전업주부(主夫) 남성을 ‘대디 충’이라 하진 않는다. 물론 징병제는 문제지만 남성의 입대는 지배계급 남성이 자기들은 안 가고 ‘없는’ 남성들만 보내기 때문이지, 여성과 장애인이 남성을 군대에 보낸 건 아니다. 국민개병제는 이승만이 시행했으며, 모든 남성이 같은 조건에서 복무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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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지위가 ‘달라진’ 상황에 대한 남성의 반발 혹은 젊은 남성의 취업난 때문일까. 여성 관련 이슈가 나오면 꼭 따라붙는 말이 있다. “여자만 힘드냐, 남자도 힘들다(혹은 더 힘들다).” 이들은 ‘하소연’에 멈추지 않고 행동한다. 거의 절박하게 보일 지경이다. 어느 남자 고등학생은 지역 도서관에서 여성주의 책을 구입하는 게 세금 낭비이자 남성에 대한 성차별이라며 담당 사서를 고발하는 민원을 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별점 테러나 ‘XX년생 홍길동’의 삶은 왜 안 다루냐는 항의도 단골 메뉴다. 몇몇 대학에서는 일부 남학생들이 페미니즘을 포함한 인권 관련 강좌를 폐지하고 “의무 수강에서 자유로”를 주장하고 있다. 교육 프로그램 자체를 부정하는 신(新)운동권, ‘행동하는 양심’들이 계속 등장할 판이다.
이러한 상황은 일종의 ‘인지 오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당대 ‘여성주의의 대중화’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축적된 여성운동의 성과가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여성에게도 어쩔 수 없이 허용한 개인화의 여파다. 이제까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이등 시민(‘제2의 성’)으로서, 자신의 삶보다 성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고용의 종말은 가족 제도에 기반한 성별 분업을 해체하고 있다. 이전에는 “남성은 취직, 여성은 취집(취업+시집)” 논리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남성도 여성도 각자도생, 스스로 먹고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진실은 이것이다. ‘힘들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다 힘들다. 부자도, 백인도, 건강한 청춘도 고뇌와 고통에서 자유롭지 않다. 요지는 개인마다, 집단마다 힘든 이유가 다르다는 점이다. 백인이 힘든 이유는 백인들 간의 계급갈등 때문이지, 흑인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흑인은 백인 중심의 인종주의 때문에 힘들다. 이 구조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과정이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비장애인)’의 삶도 힘들지만 장애인 때문에 힘든 것은 아니다. 이성애자의 삶도 힘들다. 그러나 이 역시 동성애자 때문은 아니다. 장애인과 동성애자의 일상은 비장애인 중심 사회와 이성애 제도 때문에 ‘매우’ 힘들지만 이들이 겪는 억압과 차별 문제가 제기되면, “이성애자도, 비장애인도 힘들다”고 반박하는 이들은 드물다. 다른 반응, 이를테면, 동정이나 혐오가 따른다.
반면, 성차별 문제에서는 “남자도 힘들다”는 목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여성에 비해 남성의 공적 활동이 활발하기에, 더 위험한 삶을 사는 것은 사실이다. 남성은 사건, 사고, 범죄율 등으로 여성보다 수명이 짧다. 성비는 여아 대 남아의 탄생 비율을 말하는데, 남아가 좀 많이 태어나야 정상으로 본다. 생애 도중 사망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 남자는 힘들다.
문제는 ‘남성이 힘든 이유가 여성 때문인가’다. 남성의 삶이 힘든 이유는 남성 문화가 만든 계급, 인종, 지역 차별 등에 의한 것으로, 성별 제도의 피해 집단은 여성이지 남성이 아니다. 여성이 남성의 임금을 반으로 깎고, 여성이 남성을 성폭력하고, 가정에서 구타하고, 전업주부(主夫) 남성을 ‘대디 충’이라 하진 않는다. 물론 징병제는 문제지만 남성의 입대는 지배계급 남성이 자기들은 안 가고 ‘없는’ 남성들만 보내기 때문이지, 여성과 장애인이 남성을 군대에 보낸 건 아니다. 국민개병제는 이승만이 시행했으며, 모든 남성이 같은 조건에서 복무하지도 않는다.
‘남자도 힘들다’는 언설은 젠더를 사회 구조로 인식하지 않아서다. 다음 단어를 보자. 계급 ‘의식’, 지역 ‘감정’, 젠더·평화·인권 ‘감수성’? 계급 문제는 최상층의 인간의 의식이고, 지역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는 감정적이며, 젠더는 ‘따뜻한’ 감수성인가. 모든 사회적 억압과 차별은 인간 의지가 만들어낸 제도다. 피억압과 차별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런데 각기 다른 양상의 제도들에 위계를 두어 ‘사소한 문제와 중요한 문제’로 나누는 사고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발상인가.
한국 사회의 젠더 인식은 정부, 시민사회, 학계 모두 매우 낮다. 젠더 전문가 부재도 심각하다. 사회는 성차별 현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피해 상황을 묵살한다. 그 결과, 남성들은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슈를 끌어안고 고뇌에 시달린다. 남성들의 현실 인식 부재가 남성이 괴로운 이유다. 성별 제도는 인종주의, 계급주의, 학벌주의처럼 가해와 피해가 분명한 권력관계다. 현재 한국 사회 일부 남성의 모습은 백인 부자가 가난한 흑인들에게 “나도 힘들다”고 한탄하고 분노하고 심지어 증명하려는 것 같다.
동서고금, 인간의 앎의 목표는 비슷하다. “네 자신을 알라.” 자신을 알기 위해선 젠더 인식이 필수적이다. 여성주의는 여자만 힘들다는 주장이 아니다. 여성주의는 남녀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갖게 하고,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남성들도 이러한 즐거움에 동참하기 바란다. 여성주의는 시민의식의 기초이자 가성비 높은 인식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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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11262051025&code=990100#csidxf8bd1892bd1f958a6efd728e6eed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