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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nia 4 209
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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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은애기 님의 질문은 어떤 역사적 사건의 진실 여부자체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진실 수용 여부가 공동체의 이익과 생존을 가늠할 정도로 중대한 영향을 미칠 때 수용과 은폐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를 잘못한 것인지는 모르나 그렇게 해석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답변은 지극히 철학적인 답변이 될 수 밖에 없는데, 그 골자는 이미 지난 답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질문하시니 다시 답변하되 이번에는 사례 제시를 겸한 역시 이야기를 좀 하도록 하겠습니다
삭은애기 님께 답변 겸 역사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쇼닉님께서 광주항쟁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는 1981 년 과 1985 년 총선결과에 대해서 제 소감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번부터 총선 통계 이야기를 하시길래 설마했더니 진짜 그 통계를 객관적인 자료라며 들고 오셨네요.
이 두 총선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요약부터 하겠습니다. <?xml:namespace prefix = o />

둘 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기에 치루어진 선거로서, 1981 년 총선은 비상계엄령이 해제된 지 2 개월만에, 전두환이 제 12 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3 주일만에, 거의 대부분의 구 야당 정치인들을 활동금지 또는 투옥시켜 놓고 공포분위기 속에서 치루어진 선거입니다. 저는 당시 투표권이 없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이 선거에는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투표권이 있었더라도 이 선거에 참여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1985 년 선거는 조금 다른 분위기에서 치루어진 선거입니다. 1983 년까지 서슬이 퍼렇던 전두환 정권이 1984 년 부터 이른바 유화국면을 조성하여 탄압을 완화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광범위한 학생운동의 전무후무한 줄기차고도 강력한 저항에 스스로의 전열이 흐트러졌기했기 때문이고, 둘째, 1982 년 일어난 장영자 이철희 어음사기사건으로 정권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벌어져 당시 군을 장악하고 있던 육사 17 기 세력이 전두환에 반기를 드는 사태로 인해 권력분산현상에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암튼 이런 분위기에서 전두환 정권은 양김을 제외한 야권 정치인들을 마지못해, 그것도 선거를 불과 두 달 여 앞두고, 해금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찬바람이 쌩쌩부는 엄동설한 (2 12 ) 에 치루어진 이 선거에서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두 선거 모두 지금처럼 한 선거구에 한 명을 뽑는 선거가 아니라 두 명을 뽑게 되어있어 여당후보는 가만히 있어도 당선되는 선거였는데, 놀랍게도 선거 두 달전에 창당한 신한민주당이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등 대도시에서 압승을 거두고 서울에서는 민정당 후보가 종로구의 이종찬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2 등으로 밀려나는가하면 부산에서는 6 개 선거구 중 세 명의 민정당 후보가 낙선하는 등 상상할 수도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 입니다.

당시 득표율 통계를 보면 민정당이 여당으로서 얻을 수 있는 최소득표율인 30 퍼센트 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완전한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는 사회에서라면 기본득표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공안당국이 총출동하고 북한의 1960 년대5호담당제같은 반상회 조직을 통해 동네 통반장까지 나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당시 분위기에서 여당이 30 퍼센트 대의 지지율을 기록했다는 것은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 길거리에 나 앉아야 마땅한 참패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쇼닉님 같은 분은 부정선거라는 개념이 3.15 부정선거 때처럼 투표함을 바꿔치는 선거로만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원래 선거란 그 형식이 비록 비밀투표라고 하더라도 완벽한 민주주의가 제도와 정서 모든 부분에서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 않으면 투표자 개인의 진정한 의사와는 다른 투표양상을 보일 수 있게됩니다. 21 세기의 대한민국에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파쇼권력의 감시손길이 직장과 도시의 동네 시골마을까지 겹겹이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공포분위기 아래서 ‘A 후보에게 투표하고 B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거짓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것저것 눈치보지 않는 자주적인 사람 아니라면, 그냥 뭔가 소외되고 찍히는 거 싫어하는 소시민이라면 그냥저냥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여당 후보를 찍게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 입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항상 99 퍼센트 투표율에 98 퍼센트 찬성율을 기록하는 것도, 북한의 인민대표자 선거에서 98 퍼센트 투표율에 97 퍼센트 찬성율이 나타나는 것도, 1981 3 월 제 11 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민주정의당이 상식밖의 득표율로 승리한 것도 다 이런 파쇼위축 심리현상이 어느정도 반영된 결과이지, 무식하게 투표함 바꿔치기 했기 때문에 나온 선거결과는 아니라는 것 입니다. 금권선거나 관권선거같은 지나치게 흔한 항목은 다루지 않겠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우 파쇼정권에 의한 심리위축현상이 선거를 지배했던 시기는 정확하게 1972 10 17 일부터 1987 6 29 일까지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1972 년 10 월 17 일은 박정희가 유신쿠데타를 일으킨 날이고, 1987 년 6 월 29 일은 6 월항쟁으로 겁을 집어먹은 미국의 압력으로 전두환 정권이 그들로서는 굴욕적인 대국민 항복선언을 한 날 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시기에 치루어진 선거의 득표결과를 객관적인 자료라며 리퍼런스로 사용하는 것은 민망하고도 또 민망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이 시기의 선거결과를 민심의 자료라며 제시하는 것을 이 곳에서 난생 처음 목격했습니다. 일생에 한 번 볼까말까한 특이하고 희귀한 퍼포먼스를 연출해 주신 쇼닉 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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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삭은애기님의 견해와 질문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저는 이미 삭은애기님이 하신 비슷한 질문에 답변을 드렸지만 다시 질문하시니 다시 답변하겠습니다.

공동체의 존립기반이 위험해지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명분과 가치의 열세 때문이 아니라 진실로 믿었던 그 무언가가 나중에와서 거짓말로 판명날 때라고 하겠습니다.

보통 서양에서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양자로 들일 때 아이가 말귀를 알아들을 무렵부터 친생(biological)관계가 아닌 양자녀 양부모 관계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 이해 를 바탕으로 가족관계나 그 결합의 형태가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어렸을때부터 이해시킵니다. 비단 양자녀 양부모 관계 뿐 아니라 이혼 부부 자녀 별거 부부 자녀 동거 커플 심지어 동성 커플 자녀들도 그런 적응과정을 통해 정서적 안정을 위협할만한 충격없이 흡수 적응해 나간다는 말이죠. 

그러지 않고 만일 가족관계가 깨질까봐 진실을 숨기고 감춘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사춘기나 성인이 되었을 때에 그 사실이 밝혀져 알게 되었다면 그 충격의 정도가 어느 정도일까요?

제가 전에 드린 답글에서 categorical imperative 라는 말을 사용했을 겁니다. 이 말은 원래 독일 철학자 칸트가 정립한 개념이지만, 이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개인이나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는 모든 가치가 송두리채 무너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지켜야할 최소한의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위험천만한 상황은 해석을 잘못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팩트 자체를 은폐하거나 숨기려할 때 발생합니다.

혹시 김영환 씨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은 지난 3 26 일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안전청에 의해 다른 네 명의 간부와 수 미상의 조직원들과 함께 체포되어 국가안전청 단둥 수사국에서 국가안전위해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중국이 이 사건을 중시하는 이유는 이 사람들이 NGO 차원의 북한민주화운동을 했기 때문이어서가 아니고 미국 특수전 사령부와 연계된 간첩활동을 수행한 혐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정보수사당국이 이 사람들을 검거했을 때 제시한 죄명이 단순히 외국인의 국내불법활동에 근거한 일반형사범죄가 아니라 국가안전위해죄라는 간첩혐의자들에게 적용되는 죄명을 들이댄 것만 봐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한민국 영사접견조차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현재 중국 수사당국은 이들이 반미국가 (북한 등)를 대상으로 하는 저강도 전쟁 (내부반란을 야기해 주권 국가의 정부를 전복시키는 공작) 을 추진하는 미국 특수전 부대의 5027 작전과 연계된 민간 외부조직이라는 의심을 품고 이 사건에 접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육군 장교 출신이시니 5027 작전과 5029 작전에 대해서는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작년에 이 작전에 대해 대한민국방 어디엔가 올린 글이 있을 겁니다)

제가 뚱딴지 같이 김영환 씨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현재 중국 당국으로부터 미국 간첩 혐의를 받고 있는 이 사람이 관계된 어떤 사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1940 년대 이래 1990 년대까지 대한민국이 해 온 어떤 거짓말이 이 사람 개인의 인생과 1980 년대 대한민국 학생운동에 어떤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지, 도대체 진보진영 내부NL-주사 계보의 장기권력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한 예를 드는 데 아주 적절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왜?그리고 1980 년대의 그 많은 학생들은 왜?? 그토록 열광적인 김일성 북한 주석의 팬이 되었던 것일까요? ( 이 사람이 단순한 사상적 변절을 했는지, 아니면 미국 정보기관의 전향프락치 공작에 넘어갔는지 아직 모릅니다. 다만 이 사람은 1985 년 경부터 남한 사회의 사회구성체 논쟁이 벌어질 무렵부터 '강철서신'이라는 핌플렛으로 NL 의 주사 (주체사상) 계열에 대한 이론지도를 해 온 사람입니다)
혹시 삭은애기 님도 군 시절 사병들에게 김일성은 가짜라는 정훈교육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지금은 그런 교육은 안 하겠지요.

아래는 제가 언젠가 김일성은 가짜라는 주장을 굽하지 않으시는 어느 어르신께 드린 글 입니다. 약간 깁니다. 대층 읽어보시구요. 그리고 결론 내겠습니다.
아래는 sarnia 가 어느 어르신께 드렸던 글

김일성을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김일성을 가짜라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전자는 가치판단이니만큼 그 판단에 대한 논리적 정합성이 전제돼 있다면 시비 걸 게 없는 일이지만 후자는 다릅니다.

후자는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로 자기기만을 하고 있거나 당췌 모르거나……
이승만 정권이 한 일 중 가장 바보 같은 짓 중 하나는 자기들의 주적인 김일성을 영웅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 입니다.

몇 개의 항일전투를 승리로 이끈 청년 부대장 김일성을 백두산을 호령하던 김일성 장군으로 격상시킨 것은 역설적으로 가짜 김일성을 폄훼하기 위해  ‘진짜 김일성’을 열심히 우상화해 온 이승만 박정희 정권이라는 말이지요.    

후에 김일성으로 개명한 김성주는 동북항일연군 제 1 로군 6 사의 사장 (부대장)으로 유격투쟁을 전개했었던 인물입니다. 김일성은 6 사의 전신인 3 사 간부 시절부터 노령전투, 서강전투, 동강전투 (모두 1936 ) 등 항일무장투쟁 전선에서 일본 정규군과 전투를 벌여왔습니다. 1937 년 압록강을 넘어 조선의 평북 갑산 보천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른바 보천보 사건이 그를 다소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이승만 빼고 거의 몽땅 친일파로 구성된 당시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북한 주석 김일성의 이 정도 유명세도 견디기 어려웠는지 난데없이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 입니다.

그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면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다가 연해주로 가서 소련군 장교가 된 그 진짜 김일성은 행방불명이라도 됐다는 이야기인가요?

이 엉뚱깽뚱한 가짜 김일성론은 갈수록 점입가경이 됩니다. 진짜 김일성은 백두산을 호령하던 호호백발 할아버지라느니 진짜 김일성은 김좌진을 죽인 김일성 (金一星 : 고려공산당 소속 김봉환의 가명)) 이라느니 아, 근데 김좌진을 죽인 김일성이 사실은 북한 주석 김일성이라느니 하며 앞 뒤가 전혀 맞지 않는 횡설수설을 지껄이기에 이르렀고, 이 바람에 一 자와 日 자를 구별할 수 없었던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이 그 김일성이 저 김일성인가 긴가민가하다가 우익 주먹 조직을 총동원해서 남한의 좌익 활동가 1 천 여명을 백색테러로 살해하는 비극을 불러오기에 이릅니다.

북한 주석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1 로군 6 사장으로 보천보 전투를 승리로 이끈 그 김일성이라는 사실을 최초로 양심선언 (?) 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1963 년부터 1969 년까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이었습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그는 중정에 있으면서 전에 몰랐던 두 가지 진실을 목격했는데 하나는 박정희의 화려한 좌익 활약상이고 또 하나는 북한 주석 김일성의 진짜 자료를 중정부장의 위치에서 확인했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회고록 제 2 (?) 에서 사실은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오히려 반공교육을 하는데 떳떳하지 않을까 하는 요지의 의견을 남깁니다. (제 기억으로 김형욱이 회고록에서 김일성의 구체적인 직책까지는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제 도큐먼트를 검색해 보니 지난 여름 제가 올린 이 문제에 대한 글이 있군요. 복사해서 올립니다. ```````````````  (ㅎㅎ 제 글이긴 하지만 두 번 복사하니 좀 미안하네요~)      

한반도의 비극을 잉태시킨 이 두 명의 정치지도자가 과연 처음부터 그 자격이 있는 자들이었을까요? 이승만 이야기는 많이 아실 테니까 저는 김일성 이야기를 좀 하지요.

독립운동을 취미생활 겸 향후 정치권력을 위한 경력관리 정도로 삼아 미국과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 상해 등지를 시계불알처럼 왔다 갔다 한 것이 독립운동 경력의 전부인 이승만이 국내 기반이 취약하고 남한 주민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손 치더라도 김일성의 경우는 약간 특이합니다. 그는 성장배경도 무난하고 항일투쟁 경력도 화려합니다. (저 누누이 말했지만 친북좌파 절대 아니고 김정일 정권 무지 안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선입관 갖지 말고 읽어 보세요)  

알려진 대로 그는 북한사회에서 말하는 기본계급 출신은 아닙니다. 친가와 외가 모두 비교적 ‘쟁쟁한’ 집안입니다. 외조부 강돈욱은 창덕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이고, 부친 김형직은 조선국민회를 결성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은 둘 다 숭실학교를 졸업한 인텔리였는데 외가 쪽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입니다. 1926 년 김형직이 사망하자 그는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자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손정도 목사의 극진한 사랑과 돌봄을 받으며 만주의 명문 육문중학교에 입학합니다.

김성주(김일성의 어릴 적 이름)의 사람됨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그의 후견인 역할을 맡은 손정도 목사는 아시다시피 그의 큰 아들(손원일 대한민국 초대 해군참모총장)은 남한의 국립묘지에, 작은 아들(재미교포 손원태 박사)은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각각 묻혀 있는, 한반도 분단 비극을 상징하고 있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아버지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비교적 반듯한 집안과 교육풍토, 올바른 역사관을 가진 후견인과 학교 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어린 김성주는 1920 년대 판 ‘촛불소년’으로 자라날 수 있었고, 15 세 나이에 길림시에서 강연회를 한 도산 안창호에게 계몽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는 질문을 할 정도로 뚜렷한 역사의식 또한 갖출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잠깐 여기서 1927 년 있었던 소년 김성주와 안창호의 재미있는 노선갈등 (?) 일화를 소개할까요? 당대의 지식인 안창호에게 당돌한 질문을 퍼 부었던 그 홍안의 소년 김성주는 당시 길림시 소재 육문중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아이였습니다. 1927 년의 일이니 만 15 세 때 일이지요. 다음이 그 질문 내용입니다. 첫째, 연사는 조선의 산업과 교육을 진흥시켜 조선민족의 실력배양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일본놈 들로부터 나라를 통째로 빼앗긴 상황에서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가? 둘째, 연사는 우리 민족이 정신수양이 부족한 민족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어떤 점이 그러한가? 셋째, 연사는 미국과 영국 같은 나라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게 과연 올바른 길인가, 그리고 우리가 그 나라들의 도움으로 독립을 이룰 수 있겠는가? 기록에 의하면 당시 소년으로부터 이런 내용의 쪽지 질문을 받은 안창호는 답변을 못했다고 합니다. 답변을 못한 이유는 답을 몰라서였다기 보다 답을 하기가 난감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항일운동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입장 자체가 달랐으니까요.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안창호 강연장 사건만 해도 남한에서는 북한 측의 날조라고 주장해 왔지만 이런 종류의 역사적 사건이란 날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요. 증인만 해도 4 백 여명이 넘으니까요.

그러나 북한측 자료 불멸의 총서는 적어도 저 같은 자유민주주의자가 보기에 심각한 왜곡의 흔적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당시 안창호가 김성주의 질문을 받고 당황한 나머지 질문을 제대로 못해 강연장 분위기가 흐지부지됐다’ 는 식의 이야기를 첨가함으로써 이 강연회 사건의 의미를 오히려 퇴색시켰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몇 년 전 도올 선생이 어느 교육방송 프로그램에서 이 사건을 인용하면서 비슷한 해석을 하더군요. 그 분이 현대사학자는 아니지만 저는 그 분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그래서 다시 찾아 읽어 본 자료가 손원태 박사가 쓴 ‘Kim Il Sung and Struggle-An Unconventional History’ 입니다. 이 분이 김일성의 어릴 적 친구이긴 하지만 재미교포라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습니다. 그 책의 Chapter 7 A Campaign to Get Ahn Chang Ho Release From Detention 71 쪽부터 당시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역시 이 자료에서는 안창호가 당황했다느니 하는 소리는 없고, 다만 친구 (김성주)의 질문쪽지를 받아 읽은 안창호가 잠시 멈칫했는데 그 짧은 정지된 순간이 길게 느껴졌다고 술회하고 잇습니다. 북한자료하고는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좀 더 사실에 가까운 진술이지만 소년의 당돌한 질문에 노선이 다른 안창호가 그의 질문에 대답하기는 좀 난감했을 거라는 정도의 생각은 듭니다.

암튼, 보다시피 그는 성장배경은 물론이고 항일투쟁 경력 역시 비교적 화려했지만, 그가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북한의 권력을 장악하기에는 좀 어려운 요인과 여건이 있었습니다. 첫째, 남한과는 달리 북한에는 엄청난 수의 쟁쟁한 항일투쟁경력을 가진 인사들이 몰려들어 그가 지명도면에서 상대적인 열세를 면할 수가 없었지요. 둘째, 중일전쟁 발발 이후 관동군의 강화된 토벌작전으로 그가 이끄는 항일연군이 소련지역으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는데, 1941 년경부터 1945 8 9 일 소련의 대일참전이 선포되기까지는 그의 알려진 활동이 별로 없는 공백기였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4 년 간의 기간 중, 해방 후 실제로 조선에 진주한 소련군 지도부와 끈끈한 인맥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는 게 그 개인에게는 전화위복의 기회였는지 모르나, 정치적 열세와 소련인맥, 이 두 가지 사실의 묘한 결합은 1945 년부터 ‘종파사건’으로 연안파가 숙청된 1956 년까지 김일성의 무리한 권력장악과정을 배태시킨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싫은 건 싫은 거고 사실은 사실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진짜를 가짜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또 김일성 북한주석의 항일유격투쟁 당시의 공이 아무리 크더라도 한국전쟁과정에서 저지른 일정한 과오나 전쟁 후 무리한 노선투쟁과 같은 문제들이 용서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상대가 밉다고 가짜 운운하며 거짓말까지 하는 너절한 자세는 버리자……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

삭은애기 님,

1980 년대 NL-주사권력은 가짜 김일성이라는 거짓말이 거짓말이었고 실은 진짜 였다고 사실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생겨난 대한민국의 필연적인 사회현상이었습니다. 만일 이승만 -박정희 정권이 김일성이 가짜였다는 쌩 거짓말만 안 했다면 1980 년대 이래 수 십 년간 지속되어 온 이념의 혼란과 왜곡은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진실규명을 위한 논쟁과 토론은 절대로 위험천만한 것이 아니고, 결국 공동체를 훨씬 건강하고 강고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다소 지루한 이 긴 글이 삭은애기 님께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적법한가, 이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대힌민국은 아직 사유를 통제하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수치스러은 법이 엄연히 존재하는나라이니까요. 제가 대한민국 검사가 아니라 기소여부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뭐, 불법이겠지요.

진지하게 질문하고 의견을 개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 )
4 Comments
먼지 2012.06.28 14:27  
진실규명을 위한 논쟁과 토론은 절대로 위험천만한 것이 아니고, 결국 공동체를 훨씬 건강하고 강고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저도  만일 몸에 이상이 느껴지면 당장의 불편,불이익을 감수하고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게  이를 외면하여 결국 자멸의 길을 선택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여 내가 모르던 불편한 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는성격입니다. 하지만  사르니아님의 글로 제가 모르던 또는 간과했던 사실들을 알게 되는 것에는 고맙게 생각하는데 종종 님의 글에서 님의 성격이 짙게 묻어 나올때는  종북주의자인지,기회주의자인지,회의주의자인지,이상주의자인지 궁금증이 생기게 되고 이중 어떤 주의을 가졌던 그 주의로 인해 사실이 과소,과대 포장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사실에근거한 님의 글을 다 받아들이지는 못하는게 현실입니다.이점을 참고하셔서 사실의 가감,포장 없는 객관적 역사를 찾아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쇼닉 2012.06.28 23:35  
Sarinia님 .. 님의 이 글에 대한 답변은 첨부자료가 필요하여 별도의 답변글을 올립니다. 그러니, 이글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제글 [Sarnia님의 81년/85년 총선결과 해석에 대한 답글]을 님이 쓰신 이글에 대한 답글로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뭘 시덥지 않은 사람들이 제가 Sarinia님의 글을 케무시한다고 하셔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어서, 몇자 적습니다.
sarnia 2012.06.29 10:14  
먼지 님, 안녕하세요? 모든 걸 페어하게 접근하려고 하는 자세가 중요한 거 아닐까요? 저는 20 대에는 철저한 당파주의자였다가 30 대 부터 리버럴리스트가 된 것 같은데 나이보다는 환경이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생각해요. 누구나 조금만 노력하면 거의 모든 전문분야의 고급정보를 취득할 수 있는 세상에 살면서 무슨 주의를 바탕으로 한 왜곡이나 거짓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파성이란 이제 지조나 신념으로 해석되기 보다는 패거리 문화로 인식되기 십상이죠.

쇼닉 님, 열라 답답하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일이 있다면 말이 안 통하는 상대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것일 겁니다. 영어로는 polemical argument 라고 하는데, 소모전이 벌어질 때 시간낭비를 줄이는 방법은 비교적 말이 통할만한 주제로 바꾸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입니다. 상대에게 감정같은 걸 가질 필요는 전혀 없지요. 공격목표는 상대의 사물을 보는 시각이나 관점이지 일면식도 없는 자연인으로서의 상대 자체가 아니니까요.

각자 바람 한 번 쐬고 와서 다시 시작할까요?
sarnia 2012.06.29 13:37  
아, 그리고......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 올린 '싸르니아님의 말죽거리 잔혹사'까지 읽고 오셨으니 이것도 읽으셨을 가능성이 아주 많은데 혹시나해서 링크합니다.

대한민국방의 싸르니아와 그냥암꺼나방의 싸르니아의 조금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답니다.

 https://thailove.net/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104797&page=2&sca=&sfl=wr_name%2C1&stx=sarnia&sst=&sod=&spt=0&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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