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말리는 듯한 일주일 이었습니다.
지난 일주일은 피를 말리는 듯한 일주일 이었습니다. 딱 10여년 전 IMF의 악몽이 이제는 극복되고 잘 치유되어 생활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는 이즈음 이번의 금융위기는 약혼자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깊은 우려까지 낳게 할 정도로 심각하게 저에게 다가왔었죠.
졸업하고 바로 IMF의 늪은 그 당시 동기와 선배들의 발을 잡고 쉽지 않은 취업의 험로를 걷게 합니다. 모두들 넋놓고 일자리를 고민할때 저는 귀향하여 학습지 선생이 됩니다. 직업에 귀천이 어디있으랴 했지만 모냥도 빠지고 무엇보다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셨지만 시골에서 저는 아이들과 학모들의 지지를 얻으며 승승장구 하여 백수 친구들과 후배들을 먹여 살리면서도 일년동안 2천만원을 손에 들고 서울로 상경하게 됩니다. 선생님이라며 스승의날 생닭을 그물에 넣어주시던 할머니, 판타롱 스타킹 열족 신문지에 싸서 제게 건네던 학모등 많은 사람이 믿고 지지해준 덕에 힘을 얻었지만 당시 서울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죠.
어렵사리 입사한 한 중소기업에 계약직 그것도 영업직으로 취업을 합니다. 그래도 열심히 달렸고 3개월의 수습기간을 프로모션을 통해 2개월도 채 안되는 기간에 끝내고 3달만에 전국 1위의 매출을 올립니다. 1년 만에 회사에 2억, 3억, 4억의 매출을 올려주며 수수료를 받고 사장님께 시상 받아 처음으로 가본 방콕과 파타야는 아직도 그 아련함이 기억속에 남아있죠.
1년 후 팀장으로 승진되고 드디어 정규직이 됩니다. 부족한 영업직 사원을 보충하기 위해 서울과 인천의 여상을 다니며 직접 교육하고 키워내 만든 8명의 팀원은 3개월만에 전국 팀 매출에서 1위를 차지 합니다.
회사는 교육팀을 신설하고 교육팀 부팀장이 된 저는 회사의 전 분야의 직원을 교육하게 되고 사내를 비롯 사외 강사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그 당시 정말 세상에서 무엇하나 부러울 것 없었고 열심히 하는 것은 기본이고 잘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루 걸러 하루 잠을 자고 교육한 직원들이 성장하고 제 몫을 해나가고 올려진 보고서가 바로 바로 채택 될 때의 그 희열은 정말 원하는 곳으로 비행기를 타고 떠날 때의 희열의 백배는 큰 행복을 안겨주었죠. 한때는 정신과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아 생리가 끝나도 멈추지 않고 하혈을 해 산부인과와 한의원을 다니며 보약을 먹어 찌운 살이 아직도 남아 있기도 하구요. 그 스트레스와 과도한 업무도 성장과 발전에 대한 저의 열정을 잠재울 수 없었습니다.
캐리어 패스에 목숨이라도 걸고 일할 즈음 2000년 전 후 '제2의 IMF'다 불리우는 경기 불안과 고용불안으로 다시 주춤하고 상장을 앞두었던 저희 회사는 경영진의 교체라는 큰 전환을 맞이하며 사장님을 비롯 본부장과 교육팀및 많은 부서가 구조조정을 겪으며 정리됩니다. 그때 고용보험을 받으며 산 베낭은 지금도 제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과거를 함께한 수비니어가 되어주고 광장공포나 대인기피를 하며 침잠해 있을때 그 베낭은 저를 여기저기 떠돌게 해줍니다.
나를 찾아 떠나고 버릴 것을 버리고 얻을 것을 얻고 그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와야 하는 많은 것을 안겨주는 여행에서 짜오프라야강은 어느덧 저의 마음 속에 제 2의 고향으로 자리하게 되죠.
다시 귀향하여 학원, 과외, 직업교육, 문화회관 등 흡사 보따리 강사처럼 입노동자의 길로 들어서고 자연과 느림의 미학과 함께 살아가는 삶은 그토록 성장과 발전에 대한 강박으로 빠르게 살아가던 제게 많은 깨달음을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거추장 스럽고 벗어나고 싶던 핏줄과 우정 그리고 많은 사람이 내게 주려했던 정신적 유산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계기도 됩니다.
자유로운 직업덕에 일년에 1개월은 베낭을 매고 떠날 수 있는 사이클을 만들고 예전 계획도 정보도 없이 떠나 부유하며 보아왔던 타이의 유적지, 휴양지, 캄보디아 앙코르 왓 등과는 다르게 공부하며 떠나는 태국은 다시 더 멋진 곳으로 다가오더군요
올해 2월 1개월 간의 베트남 종단은 동남아에 대한 여행기쁨을 접고 이제 다른 더 넓은 곳으로 관심을 돌려야지 하는 마음을 먹지만 어려울때는 힘이 들때는 언제나 항상 몽롱하게 부유하던 태국이 항상 떠오르고 자리하고 있어 쉽게 발목을 놓아주지 않더군요.
지난주 피를 말리는 듯한 일주일 이었습니다. 증권쪽에서 일하는 약혼자는 3-4일을을 연락도 못하고 구조조정의 칼바람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애를 쓰고 투자금은 반토막을 달리고 결혼 또한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까지 낳게 하는 심각한 상황이었죠. 변덕스러운 증시처럼 흔들리고 나약해지는 남자라면 그만 둬야지 이미 예전 일정 IMF를 몸으로 느낀 사람으로 담담하게 마음 먹고 기다리자 했지만 불안과 초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아 힘들었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그저 훌쩍 방콕으로 떠날까 하는 마음이 꿀뚝이었지만 환율은 천정이 어디 인지 모르고 오르는 힘든 상황이었죠.
제 나이 또래 미혼 여성들이 통계적으로 많은 것 아시나요?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운 남자들이 여자들을 제때 맞이하지 못하고 먹고 사는 문제에 고민하며 3-4년을 보내고 결혼을 생각할 즈음은 저희들보다 더 어린 여성과 결혼하는 ㅋㅋㅋ
어느 경제학자가 그렇게 분석하기도 하는데 저는 이번에도 결혼을 접어야 하나 참 고민 많이 했었죠. ^^ 돈이 있고 없고 직장이 있고 없고의 문제로 나눌 마음과 사랑이라면 언제든 때려치워야지 하는 아직도 어린 생각으로 살아가지만 남자들은 좀 다른가 봅니다. 그들의 책임감, 부담은 결혼을 앞두고는 여성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한국 남성들의 고난함을 엿보기도 하구요.
뭘 이리 장황하게 고백을 하는지 ㅋㅋㅋ 일주일이 힘들었지만 샤데이님이 여성들 이태원 비밀회동하자 문자도 주시고 젊은 열정에 들려 올라오는 여행기며 사진들을 보며 많은 위안을 얻고 태국이라는 교집합과 여행에 대한 열정, 일상의 소소함등을 유쾌하게 느껴지게 하는 이 공간에서 흡사 친정같은 느낌을 받았기에 '젊은 열정'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지도 모릅니다.
맘 같아서는 더 많은 분을 만나고 번개도 가고 하고 싶지만 그렇게 여의치는 않네요. ^^ 그래서 정모가 더욱 더 기다려 집니다.
다시 상경하여 서울 삶을 살게 되고 이 나이에 시간이 많지 않아 놀아주지 않는 애인, 대부분 결혼한 친구들, 한국에서 철 안 들고 언제나 여행과 새로움과의 조우 자유로움을 놓고 싶지 않은 아직 성장통에 고달퍼 하는 저는 놀데도 없고 외롭지만 많은이가 자신에게 맞고 교집합을 나눌 수 있는 모듬을 쉽게 찾지는 못하는데 '젊은열정'은 참 편하게 다가 옵니다.
저번 정모에서 만난 미리링님의 카메라에 자극 받아 저도 똑딱이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살아 있는 사진을 찍고 싶다는 마음이 동 해서 캐논EOS 5D바디에 24-70렌즈를 장만해 질러 볼까 고민중입니다. ^^ 다음에 만나면 카메라 잘 아시는 분들 많이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제 청명한 가을 하늘이 높은 날씨가 계속 되네요. 서울에 귀착하여 좀 여유로워지면 도시락 싸서 샤데이님을 비롯 앞으로 만나게될 분들과 이번 이태원 여성 비밀회동에 불참한 미안함을 피크닉이라도 가서 풀어야겠습니다. ^^
정모 공지 언제 뜨는지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들 감기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