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호치민에서 가볼만 한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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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호치민에서 가볼만 한곳

부산 갈매기 8 669
* 전쟁박물관(War Remnants Museum)

전쟁박물관은 현재 호치민시에 있는 박물관 중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중의 하나이다. 박물관이 있는 자리는 원래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정보사령부가 위치했던 곳이다. 박물관 앞마당에 들어서면 미군 장갑차들, 대포, 폭탄, 보병 무기, 단두대 등이 야외에 전시 되어 있다. 미군의 잔학행위를 입증하는 많은 사진들은 미국측에서 나온 것으로, 1968년 3월 16일에 발생했던 꽝 응아이 (Quang Ngai)성 미 라이 (My Lai) 마을 양민 504명이 집단 학살된 사건 현장의 사진을 비롯한 참혹한 각종 사진들이 전시실을 장식하고 있다. 꼰 다오(Con Dao)에 민족해방전선 포로들을 가두기 위해 남베트남 군대가 사용한 악명 높은 호랑이 우리 모형도 있다. 또한 미국이 광범위하게 살포한 고엽제의 영향으로 태어난 기형아들의 사진들도 있다. 인접한 방에는 1975년 이후 베트남 국내 방해분자들이 저지른 ‘반혁명적’ 전쟁 범죄 관련 전시물이 있다. 반혁명 분자들은 미국과 중국 제국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통일 이전으로 되돌리려고 반동적 모의를 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박물관측 자료에 의하면 베트남 전쟁에 동원된 미군의 총수는 6백 5십만 명이고 많을 때는 한꺼번에 5십 4만 명이 주둔했었다. 미국은 2만 2천개의 공장에서 군수품을 생산하여 전쟁물자를 조달했고 7백 8십만 톤의 폭탄을 베트남 땅에 퍼부었다. 2차 대전 때 미군이 사용한 폭탄이 2백만 톤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양인지 짐작이 간다. 피해자 본인뿐만 아니라 자손에게도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고엽제가 7천 5백만 리터가 살포되었고, 미국이 쏟아 부은 전쟁비용은 총 3천 5백 2십억 달러였다. 또한 정확한 숫자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약 3백만 명의 베트남 사람들이 사망했고 약 4백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전시내용이 다소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느낌이 있지만 이곳처럼 전쟁의 잔혹함과 민간인의 희생을 절실히 느낄 수 있는 박물관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전쟁을 지지했던 사람들도 미군의 폭격과 네이팜탄으로 고통을 당한 어린이들의 사진을 보면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고문 장면 사진들도 전시되는데, 비위가 강한 사람이라야 볼 수 있을 것이다. 플레세트(flechette: 작은 파편 수천 개로 채워진 폭탄)처럼 전시 중 사용된 실험 무기도 볼 수 있다.

별관에는 1945년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하고 있던 시기에 미군장교들이 호치민 주석이 주도하는 베트민군에게 군사훈련을 시켜주고 있는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비록 전쟁 때는 적이었지만 전쟁도 끝나고 냉전도 종식되었으니, 이제는 번영과 공존의 새 시대를 만들기 위해서 다시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느낌이 든다.

주 소 : 28 Vo Van Tan St., Dist.3 HCMC
전 화 : (08)930-5587
시 간 : 매일 7:30am - 11:45am & 1:30pm - 5:15pm
입장료 : 10,000동




* 통일궁

통일궁은 베트남 근현대사상의 변천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옛 총독부 건물이었던 이곳은 1868년 프랑스에 의해 세워졌으며, 구월남 정부하에서 대통령궁이었던 곳을 현재는 통일궁이란 이름으로 박물관겸 회의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1975년 4월 30일에 베트남 공화국 정부가 항복을 했던 역사적인 장소로서 1962년 쿠데타에 가담했던 공군조종사의 폭격을 받았던 곳이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응오 딘 지엠(Ngo Dinh Diem)은 손상된 건물을 헐어버리고 “吉” 모양으로 다시 지었으나 1963년 쿠데타로 목숨을 잃음으로서 건물의 완공을 보지 못하였다. 이 건물은 1968년에 완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54년 제네바 협정에 따라 프랑스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면서 프랑스 총독부 청사였던 이 건물은 남베트남 정부에 이양됐다. 당시 남베트남 정부수반이었던 응오 딘 지엠은 이름을 독립궁으로 바꾸었다. 1962년 쿠데타 가담 조종사가 독립궁의 왼편에 폭격을 가해 회복하기 힘든 큰 손상을 입었다. 그러자 응오 딘 지엠은 구건물을 완전히 철거하고, 건축가 응오 비엣 투(Ngo Viet Thu)의 디자인에 따라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신축된 건물은 과거의 건축양식과 현대적인 양식을 절묘하게 반영하고 있다.

남베트남 대통령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던 독립궁은 지하와 지층 위에 지어진 3층 건물로 옥상에는 헬기 이착륙장도 갖추고 있다. 대회의실, 각료회의실, 연회실 등 각기 다른 실내장식으로 꾸며진 100개의 방이 있는데 총 건평이 2만 평방미터나 된다. 응오 딘 지엠이 건설했던 이 건물을 응웬 반 티에우 정권에서도 계속 사용했다. 월남 마지막 대통령 즈엉 반 민(Duong Van Minh)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사진, 소련제 탱크가 대통령궁 철문을 부수며 진입하는 장면 등 30여장의 흑백사진이 있다.

대통령 접견실과 국무회의실이 있던 1층의 널따란 홀에는 새 주인이 된 호치민 흉상이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뒷벽에는 "강물은 둘로 가를 수 없다"라는 호치민 어록이 걸려있다. 월남군 총사령관실은 월남군과 베트콩의 배치 상황 및 이동로가 그려진 12개의 지도가 네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1968년 6월 29일 현재로 되어 있는 상황판에 적힌 월남군의 총병력은 54만 1천 9백 43명 그 아래에는 "한국군 5만 3백 55명", "필리핀군 1천 8백 25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지하에는 전쟁시 종합상황실이 현재에도 실물 그대로 전시되어 있어 당시 긴박하였던 역사자료로서의 가치가 관광객들에게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하는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최근 호치민 동상과 다국어를 지원하는 베트남 역사 비디오를 시청할 수 있는 영상실이 추가되었다. 비디오 상영이 끝날 무렵 국가가 연주되는데, 이때 일어서지 않으면 무례하다고 여겨진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독립궁에 게양된 국기가 남베트남기에서 북베트남기로 교체됐다. 건물의 이름도 통일궁으로 개칭됐다. 독립궁이라는 이름은 미국의 지원 하에 남베트남 정권이 분단국가 체제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통일궁은 각료회의를 개최하고 외국의 국가원수를 영접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고, 또한 역사문화유적으로 정비되어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호치민시의 명소가 됐다.

주 소 : 106 Nguyen Du St., Dist.1 HCMC
전 화 : (08)829-4117
시 간 : 매일 7:30am - 11am & 1pm - 4pm
입장료 : 15,000동



*노틀담성당

1877년부터 1883년까지 건립된 노틀담성당은 동 커이(Dong Khoi) 거리의 북쪽 끝에 중앙우체국과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이 성당은 1877년 착공되어 1883년에 완공되었고 건축비용은 약 2백 5십만 프랑스 프랑이 소요되었다. 쇠로 된 첨탑이 얹힌 40m 높이의 두 사각첨탑은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압도하는 신로마네스크(Neo-Romanesque) 양식이다. 성당 앞(중앙 우체국이 면한 광장중심)에 성모상이 있다. 정문이 잠겨 있다면 통일궁 맞은편 문을 이용할 수 도 있다.

다른 성당과는 달리 호치민시의 노틀담성당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없다. 2차 대전 중 전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많은 외국인 여행객들이 이곳에서 예배를 보기 때문에 사제들은 베트남어 강론 끝에 짧게 프랑스어나 영어로 덧붙이기도 한다. 여행객에는 9:30am의 주일 미사가 가장 좋을 것이다.



* 역사박물관

역사박물관이 있는 멋진 중국-프랑스 양식의 건물은 1929년 프랑스 인도차이나 학회에서 지은 것이다. 건축의 감상을 위 해서라도 한번 가 볼 가치가 있다. 호치민시 역사박물관이 현재와 같이 개관한 것은 1979년이었다. 1929년부터 1959년까지는 불란서어로 “Musee Blanchard de la Brosse"라 불렸고 1956년에서 1975년까지는 “베트남 국립박물관”이었다. 1975년 통일이후 일반대중의 역사교육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역사 연구를 촉진하기 위해 시설을 확장하고, 베트남 역사의 특질과 남부지역의 문화적 특징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전시내용을 바꾸었다. 시대 및 출토지 별로 총 16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박물관에는 청동기 동 썬(Dong Son)문명(BC 13-AD 1세기)부터 옥 에오(Oc 때)문명(AD 1-6세기), 참족, 크메르족, 베트남족의 문명까지 베트남 문화발전사를 보여주는 훌륭한 전시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또한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서 가져온 값진 유물들도 많다. 건물의 뒤쪽 3층에는 프랑스 식민 시대에 발간된 인도차이나 관련 서적들이 다수 소장된 사료관이 있다.

현재 이 박물관의 전시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첫 번째 부분은 베트남에서 인류출현의 흔적에서부터 1930년 베트남 공산당 탄생 전까지이다. 원시시대의 베트남(1번 전시실), 훙 브엉(Hung Vuong)의 국가 설립(2번 전시실), 독립을 향한 투쟁시기(3번 전시실), 솜 까이(Xom Cai)에서 발견된 고대무덤(4번 전시실), 리(Ly)왕조(5번 전시실), 쩐(Tran)왕조(6번 전시실), 레 (Le)왕조(7번 전시실), 떠이 썬(Tay Son)왕조(8번 전시실), 응웬(Nguyen)왕조(9번 전시실) 등 모두 9개의 전시실로 꾸며져 있다.

두 번째 부분은 중남부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베트남과 아시아 각국의 도자기(10번 전시실), 옥 에오(Oc Eo)문화(11번 전시실), 메콩 델타(Mekong Delta)의 예술(12번 전시실), 벤 응에(Ben Nghe)-사이공(Saigon)역사(13번 전시실), 참파(Champa)의 예술(14번 전시실), 남부지역의 민족들(15번 전시실), 베트남과 아시아 각국의 부처상(16번 전시실) 등 모두 7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호치민시 역사박물관은 베트남 중남부지역에서 출토된 풍부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롱 안(Long An)지역에서 출토된 5세기의 목조불상과 짜 빙(Tra Vinh)지역에서 나온 사암으로 조각된 7,8세기경의 관세음보살상은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유물이다.

메콩 델타지역은 인도계통의 문화가 이식되었던 곳이다. 서기 2세기경 메콩델타 지역의 푸 남(Phu Nam)왕국에는 여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 지역에 장사하러 온 인도상인과 토착사회를 지배하는 여왕이 결혼함으로써 인도문화가 정착하게 되었다. 롱 안과 짜 빙에서 출토된 불상 두 구에서도 인도 힌두양식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주 소 : 2 Nguyen Van Khiem St., Dist.1 HCMC
전 화 : (08)829-8146
시 간 : 8am - 11am & 1:30pm - 4pm
입장료 : 10,000동







* 중앙우체국

1986년부터 6년간 베이지색으로 산뜻하게 단장을 하는 등 공사를 거친 후에 완공된 호치민 시의 대표적인 현대 건축물이다. 철강돔이 지붕의 기본구조를 이루고, 벽은 대형유리로 장식되었으며, 정문입구 상부에는 큼지막한 시계가 시간을 알리고 있습니다. 우체국 내부에는 20세기의 사이공 지도가 그려져 있고, 중앙벽면에는 대형 호치민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천장이 시원하게 높은 건물이다. 우편업무뿐만 아니라 국제전화, 팩스, 전보, 텔렉스가 가능하고 공중전화 카드도 구입할 수 있다.







* 인민위원회청사

호치민 시의 대표적이 상징물이자 화려한 외관이 눈길을 끄는 구식민시대에 건축된 대표적인 건물로 몇 년 동안 프랑스인 특유의 건축 논쟁이 벌어진 뒤 1901년에 착공되어 1908년에 완공되었다. 응우옌 후에(Nguyen Hue) 거리의 북서쪽 끝, 강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이 옛 건물은 화려한 외관,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빛나는 우아한 실내 장식으로 유명하다. 여행객들이 베트남에서 찍은 사진에 배경으로 가장 많이 나오는 건물이기도하다. 밤에는 벌레를 잡아먹는 수천 마리의 도마뱀들이 외관을 뒤덮는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내부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







* 레 반 주엣(Le Van Duyet) 사당

호치민시 중심가에서 약 3킬로 거리에 있는 이 사당은 레 반 주엣(Le Van Duyet) 장군 부처가 묻힌 곳이기도 하다. 레 반 주엣은 1763년 미 토(My Tho)에서 출생하여 17세 때인 1780년 환관이 되었다. 1787년 별장으로 발탁된 후 군사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떠이 썬(Tay Son)군을 축출하는데 눈부신 전공을 세워 지아 롱(Gia Long)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19세기 초 응웬 왕조가 성립된 후 최고 건국공신으로 평가되는 응웬 반 타잉(Nguyen Van Thanh)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레 반 주엣은 지아 롱제의 4번째 아들이었던 민 망(Minh Mang)제의 왕위 계승을 반대했지만 지아 롱제의 요청으로 민 망제를 적극 보필한다.

응웬 왕조가 제 2대 민 망제의 통치기로 이행하면서 지역적으로 남부, 주로 무장출신이었던 초기 개국공신들을 숙청하기 시작한다. 민 망제는 즉위하자 곧바로 중앙에서 개국공신을 몰아내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개국공신 중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레 반 주엣을 지아 딘(Gia Dinh)성 총진관으로 임명했다. 개국공신을 축출하고 강력한 절대군주로 군림하려는 민 망제는 과거를 통해 관계에 진출한 문신들을 우대하여 요직에 임명하고, 지아 롱제가 개국공신들과 권력을 분점하기 위해 만들었던 지방행정제도를 중앙집권적인 방향으로 개혁했다. 1832년 레 반 주엣이 사망하자 그를 눈에 가시로 여기고 있던 민 망제는 지아 딘성총진을 폐지하고 그의 관직을 삭탈하고 분묘를 파헤치고 양자인 레 반 코이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감옥을 탈출한 레 반 코이가 지아 진에서 반란을 일으킴으로서 민 망제는 이를 진압하는데 3년이라는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레 반 쥬엣은 자신의 묘가 없어졌다 다시 생길 것이라고 생전에 예측했다고 한다. 헌데 그러한 예측은 정확하게 맞았다. 민 망제가 파헤쳤던 묘를 다음 황제인 티에우 찌(Thieu Tri)제가 복원시켰던 것이다. 비록 환관이었지만 인품이 관대하고 도량이 넓었던 레 반 주엣은 많은 사람들, 특히 남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매년 음력 1월 1일 구정과 레 반 주엣이 사망한 7월 30일에는 많은 순례자들이 레 반 주엣의 사당을 찾아 향을 피우고 행복을 기원하고 있다.

레 반 주엣 사당은 건물배치가 짜임새가 있고 주위의 커다란 나무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본전에 모셔진 레 반 주엣의 초상화는 특징을 간결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사당은1937년 중수를 비롯하여 수차례의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루고 있다. 이 사당은 다른 사당이나 절 건축과 비교할 때 대단히 현대적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것은 20세기 초 지아 딘 미술학교가 근처에 있어서 레 반 주엣 사원의 인테리어, 조각에 이 학교의 조력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사당내부는 연꽃, 대나무, 복숭아나무, 국화 등 식물류와 베트남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용, 기린, 거북, 불사조 등 4가지 동물로 장식되어 있다. 1930년 이전 베트남에는 도자기 파편으로 모자이크를 만들어 장식하는 소위 “카이 딘(Khai Dinh)양식”이 유행했다. 카이 딘제가 ‘서양문명의 지혜’라고 극찬했던 카이 딘 양식이 이 사당에도 구현되어 있다.




* 구찌터널

호치민시에서 구찌 터널까지는 75km정도이며 약 2시간 정도 소요된다.

구찌 터널은 프랑스 식민통치시대인 1940년대부터 무기를 감추거나 비밀통로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지방 게릴라들이 파기 시작한 것이다. 이 지역은 굳고 점성이 강한 흙으로 덮여있어 땅굴을 파기에 안성맞춤인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베트남전쟁이 일어나자 베트콩들은 미국측의 강력한 화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이 터널을 보수하고 확장해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터널은 지하 약 7m내외의 굴을 거미줄처럼 파내고 통풍구를 만들었는데 이 통풍구는 불에 잘 타지 않는 나뭇잎으로 위장하거나 지뢰를 설치하여 보호하였다. 땅굴을 파는 데 사용된 도구는 호미와 바구니뿐이며 파낸 흙은 노인들이나 어린이들에 의해 땅에 얇게 뿌려지고 나뭇잎으로 덮거나 강물에 풀어 흔적을 없앴다.

굴의 크기는 대개 폭 50cm, 높이 70cm로 웬만한 외국인은 거동할 수가 없게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적이 굴의 구조를 모르고 추적할 경우 함정에 빠지게 과학적으로 설계되어 있기도 하다. 이리하여 구찌 지역의 지하에는 회의실, 부엌, 병원, 화장실, 지하수 등의 시설이 갖추어진 최대 수용인원 약 15,000명이 활동할 수 있는 지하세계가 구축되어 사이공을 위협하는 거대한 요새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군측은 이 지역을 토벌하기 위하여 본격적인 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우선 이 구찌 지역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그리고는 B-52로 하루에 80톤가량의 폭탄으로 무차별 폭격을 가하였다. 이것이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자 미군측은 이 지역을 고엽제로 초토화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다른 식물들의 성장을 막기 위해 생육이 빠른 잔디 씨를 부렸다. 건기에 이 잔디는 신속히 말라갔고, 폭격에 의한 불꽃으로 이 마른 풀에 불이 붙어 은폐된 기지나 은둔지를 노출시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고엽제에 의하여 농작물이 손실되고 사람들이 신체적인 이상을 일으키자 이에 자극된 일부 주민들이 다시 이 지역으로 돌아와 베트콩과 합류하여 땅굴은 더욱 깊고 넓게 확장되어나갔다. 그리하여 총연장 약 250km에 지하 30m지점까지 개미굴 같은 땅굴이 형성되어 베트콩들은 신출귀몰하는 게릴라전으로 미군측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지역주민들도 발자국 없이 걷기, 소리 없이 이야기하기, 연기 없이 요리하기, 보이지 않게 행동하기 등 생존을 위한 철칙을 지키며 작전을 수행하여 미군측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이 지역은 또한 미군측에 치명적인 피해를 준 1968년의 구경 대공세(The Ofensie)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 터널 주변에는 전쟁 당시의 부서진 탱크나 헬기 등이 산재되어 있고 대나무를 이용한 함정 등이 보전되어 있어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터널은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도 확실하게 신경을 써 적군이 이 터널을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배제해 놓았다. 이를테면 안에서 취사를 위해 불을 피울 때, 그 연기는 3단계의 정화과정을 거쳐 밖으로 배출되게 하는 식이다. 그 치밀함과 세심함이 감탄스러울 정도이다. 식당은 역시 관광객을 위한 시설이 되어 있는 곳으로, 여기에서는 당시 전사들이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해 먹었다는 '얌'이란 음식을 먹어 볼 수 있다. 고구마와 비슷한 맛의 작물을 쪄놓은 음식이다. 현재 이곳은 국방부 산하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손꼽히고 있는 데 관광객들은 안내를 받으면서 땅굴속의 주요 시설물들을 직접 둘러 볼 수 있다. 아울러 땅굴 근처의 미니 사격장에서는 진짜 총으로 직접 사격도 가능하다. 

-입장료 : 65,000동
8 Comments
당당그녀 2007.04.26 23:15  
  노틀담성당에 갔을땐 안에 못들어가게 하더군요..
예배시간이있어서 그 시간엔 관람이 안돼던데..
그래서 아주 많이 아쉬웠던~~
jinsun 2007.04.27 22:07  
  안녕하세요~~
방콕에 왔어요..베트남에서 연락드릴꼐여~~
부산 갈매기 2007.04.27 22:38  
  안녕 하세요
여행 출발 하셨군요 좋은 여행 하세요
오시면 연락 주세요
이곳에서 여행사에 근무하는 친구가 있어요
베선상에서 음식대접 할께요
가이드가 예약해 주면은 아주저렴 합니다
그때 뵙지요 저의 집사람하고 나가겠습니다
호텔 예약 필요 하시면 미리 연락 주세요
10불 선이면 여행자 거리에 깨끗하고 친절한
미니호텔 많아요
좋은 여행 하세요
Cyon 현 2007.04.28 08:33  
  여기서 가시는분마다  우리 부산갈매기님 찾으면 부산갈매기님 힘드시게써여~~! 큰일이네...갈매기님께 연락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ㅋㅋㅋ 전 5월17일날 출발이거든요... ^^
부산 갈매기 2007.04.28 18:01  
  누구든지 이곳에 오시면 연락 주세요
째즈나라 2007.04.28 22:55  
  베트남에 가셔서 좋은 곳 많이 구경하시면 되죠!! ㅎㅎㅎ
jinsun 2007.04.29 00:06  
  cyon 현...님
저도 그때쯤 베트남에 있을꺼여요..혹시 일정이 맞으면 같이 움직이는건 어떨까여?? 라오스에서 베트남으로 넘어갑니다..쪽지주세요~~
jinsun 2007.04.29 00:58  
  민폐가 되는건 아닌가여?
그래도 넘 죠아요..염치없지만...^^ 한사람 안다는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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