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이민 21 년 차다. 한국 떠난지 21 년 됐다는 이야기다.
북미 교포는 두 가지 종류의 세대로 나뉜다. 1 세 1. 5 세 그런 거 말고 다른 기준이 있다.
김포공항 세대와 인천공항 세대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김포공항 세대에 속한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때 무슨 이유로 캐나다 이민 결심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래됐기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니라 그 이유라는 게 별로 신통한 게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때 캐나다에 아주 살 생각을 하고 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누가 “sarnia 님은 왜 캐나다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다.
다른 분들은
“네 자녀교육 때문에 왔습니다”
라든가
“경쟁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싫어서 왔습니다”
라든가,
하다못해
“예, 군사독재가 지긋지긋해서 떠났습니다”
등등, 이런 저런 이유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이렇다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굳이 이유를 찾아보라고 채근한다면,
“네, 비행기 오래 타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아마 이게 사실에 가장 근접하는 대답이 될 지도 모르겠다.
누나 초청으로 이민수속절차를 밟긴 했지만 갈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그 해 4 월 초, 소공동 코오롱 빌딩 11 층에 있던 대사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5 월 말까지 입국 안 하면 영주권 취소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에라 몇 달 바람이나 쏘이고 오자고 왔는데...... 21 년이 흘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누나는 지금은 포트무디 (밴쿠버) 살지만 그 때는 리자이나 살았다. 따라서 내가 캐나다에서 가장 먼저 정착한 곳도 리자이나였다. 리자이나라는 곳에서는 딱 9 개월 살다 뛰쳐나왔다.
리자이나는……세계에서 제일 춥고 심심한 도시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렇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고, 인구 17 만에 불과한 소도시라 한국 커뮤니티도 없었다.
고국과의 문화적 교류(?)를 할 수 있는 수단이라곤 누나가 소장하고 있던 1985 년 판 ‘사랑과 야망’ 한 질이 전부였다. 한고은 나오는 ‘사랑과 야망’ 이 아니고 차화연 나오는 원조 ‘사람과 야망’ 말 하는 거다.
한국에서는 전혀 거들떠 보지도 않던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게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혼자 따블백 메고 알버타 주 캘거리로 떠날 때까지 그 소도시에서 지내는 동안 그 드라마를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심심한 곳에 살다가 북적거리는 도시에 들어서면서 “아 사람 사는 곳에 돌아왔구나” 하고 느꼈던 때가 두 번 있었다.
언젠가 허드슨 강을 건너 뉴욕 맨하튼에 들어선 순간 그렇게 느꼈고, 20 년 전 어느 겨울날 새벽 리자이나를 출발해서 가도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대평원 밀밭길을 달리고 달려 마침내 도착한 캘거리 도심에 들어서면서 그렇게 느꼈다.
평생 살 결심을 하고 온 것도 아니었으면서 왜 이 나라에서 21 년이나 살았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해답을 하나 찾긴 했는데, 정답인지는 확신이 서질 않는다.
그건......자유로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래 전, 이 자유로움을 처음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느낀 순간이 있었다.
이민 생활 시작 1 년 후인 1991 년 5 월 어느 날, 차를 몰고 록키를 향해 '트랜스캐나다 넘버원 하이웨이' 달려가던 중 Scott Hill 을 넘어서자마자 눈 앞이 확 트이면서 펼쳐지는 광활한 foothill. 그 장쾌한 풍경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순간 뇌리를 스쳤던 단어는 아름다움이나 광활함, 이런 게 아니었다.
'자-유' 바로 이 두 음절의 단어였던 것 같다.
얼마 전 한국에서 새로 오신 분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오래된 이민자들이 새 이민자들에게 정보 같은 걸 잘 주지 않는 이유가 ‘나는 고생해서 얻었는데 너는 공짜로 얻으려고?’ 하는 ‘고참의 질투심리’와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놀부심보’ 때문이라는, 뭐 이런 비슷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나는 사람들이란 본래 착하다고 믿기 때문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분의 이야기를 잘 이해할 수는 없었는데, 겪는 경험이란 사람마다 참 천차만별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우선 재수없이 초장에 나쁜 경험을 하신 그 분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렸다.
헌데...... 세상에는 좋은 분도 있고 나쁜 분도 있고 이상한 분도 있지만, 사실은 경우에 따라 내가 좋은 분이 되기도 하고 나쁜 분이 되기도 하고 이상한 분이 되기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세 가지 종류의 인간형 이야기를 어디에서 읽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데, 대신 갑자기 송강호 얼굴이 떠 오르네.
암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기가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이 세상 역시 절대로 변해주지 않는다는 거다.
내가 나쁜 놈 되면 천사도 나쁜 년 (남자 천사라면 나쁜 새끼) 되어 버리는 거고, 내가 좋은 분 착한 분이 되면 '진짜 짜증나는 진상'하고도 단짝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경험을 많이 했다.
뭐, 살다 보면 남 잘 되는 꼴 못 보는 분도 만날 수 있고, 못된 이민 고참 만날 수 있고 사기도 당할 수 있고, 차별을 당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주는 것도 없이 밉기만 한 인간을 만날 수 있지만, 누구나 서로 알고 친해지고 함께 오래 부대끼다 보면 증오할 정도로 나쁜 인간, 그래서 분을 삭이지 못해 온라인 게시판에서 털어 놓아야 화가 풀릴 정도로 나쁜 인간은 거의 없더라는 거다. (내 경험으론…… 그런 인간은 아직 단 한 명도 만난 적이 없는 거 같다)
본론 겸 결론이다.
무슨 일들인지 잘 모르겠고 내가 상관할 일도 아니지만......나쁜 경험 너무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고, 어차피 인생 별로 긴 것 같지도 않으니까 재미있고 씩씩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어차피 좋든 나쁘든 모든 경험이란 관계를 통해 발생하는 사건이고,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그 관계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주도권의 절반이상은 자기 손에 들어와 있다.
일단은 자기 하기 나름이란 말이지. 진인사대천명이란 말은 그래서 생겨난 거다. (아니라고? 아님 말고)
sarnia 님도 계속 쿨하고 행복하게~~
외롭고 외롭던 나날들
스스로에게 말하곤 했지
내 인생은 '자유'라고
그리고 나는
결코 태양이 비추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살아왔어
태양이 떠 오르기를 기다리게엔
나의 인생은 너무 짧아
계속 열심히 살아가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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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이젠 詩도 쓰느냐고요?
아니요.
시는요.
쓰는 재주는 커녕 읽는 재주도 없는데요.
지금 흐르는 노래 앞대가리 가사예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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