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사태 ...꺼지지 않은 불씨 (1)
핫산
3
784
2009.04.16 19:34
태국 정국이 시위대의 자진 해산으로 외견상 평온을 찾았지만 이 평온이
깨지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인다.
먼저 태국 왕권의 근간인 짜끄리왕조의 피로 얼룩진 역사를 살펴본다면.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이 버마인들 에게 무너진후
*1767년 피야타크신 - -> 톤부리왕국 개국 -->폭정으로 처형됨(1782년)
- -> 장군 차오프라야 짜끄리가 즉위 하여 라마1세로 칭함.
*1782년 라마1세에 의해 방콕을 수도로 천도 하면서 짜끄리왕조 건국.
현.왓프라깨오(에메랄드사원)건축
*1851년 라마4세 뭉꿋왕.불교개혁주도(부인39명.자녀82명)
*1868년 라마5세 (쭐라롱코른 대왕)
근대화의 선구자.태국최고의대학 - - > 쭐라롱코른 대학교
*1932년 군사쿠테타로 라마7세(짜끄리왕조7대왕)가 영국으로 추방됨.
*1935년 라마8세즉위(현 푸미폰왕의 형)-->1946년 침실에서 총격피살됨.
*1946년 라마9세즉위(현 푸미폰국왕)
수난의 역사인 짜끄리왕조의 변천을 보면 근대의 태국에서 국왕은 원래부터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고 볼수있겠다.
1932년 왕정을 무너뜨린 군부는 이후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우려고 허수아비
왕(?)을 내세움.
1946년 즉위한 푸미폰왕 또한 아무힘이 없는 상태에서 집권 하였고
1957년 쿠테타를 일으킨 사릿장군으로 부터 충성서약을 받은뒤 그에게 "수도의
수호자"라는 임명장을 주고 정치적 동거(?)를 시작하였음.사릿은 국가
통합과 국민화합을 위해 불교와 국왕을 태국사회의 구심점으로 삼았고
푸미폰 국왕부부는 산간오지의 국민들과 서민층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국왕은 이시기에 소외계층을 위한 3000개의 국왕개발 프로젝트 시행.
이때부터 푸미폰왕의 국민을 대하는 진실한 겸손에 태국인들은 감동 하였다.
국민적 지지에 확신을 갖게된 푸미폰 국왕은 1973년 쿠테타 때에는
군인들 에게 쫒긴 시위대를 왕궁내에 보호하며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시위대를 보호하는 독자적 목소리를 내었다.
1991년 쿠테타를 일으키고 장군에서 총리가 된 수친타 와 잠롱 전방콕시장이
왕궁에 찾아와 국왕앞에 무릎을 끊은일은 국왕이 진정한 태국의
구심점이 되었음을 보여준 사건 이라 할수있다.
이후 수친타는 스웨덴으로 망명길에 오름.
그러나 과거 태국의 정치적 혼란기에 "중심"을 잡아줬던 푸미폰(bhumibol)
아둔야뎃(adulyadei : 팔리어 표기법)국왕은 이번 사태때 침묵하였다.
이번 친탁신 세력의 시위는 과거처럼 "군부와 민주화세력" 의 대결구도가
아니라 "전통권력'인 군부.국왕추종엘리트 지지층과 "신흥시민권력"인
친 탁신세력의 충돌 이라고 볼수있다.이번시위는 2006년9월 군사쿠테
로 실각하여 해외체류중인 탁신을 복귀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하였다
깨지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인다.
먼저 태국 왕권의 근간인 짜끄리왕조의 피로 얼룩진 역사를 살펴본다면.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이 버마인들 에게 무너진후
*1767년 피야타크신 - -> 톤부리왕국 개국 -->폭정으로 처형됨(1782년)
- -> 장군 차오프라야 짜끄리가 즉위 하여 라마1세로 칭함.
*1782년 라마1세에 의해 방콕을 수도로 천도 하면서 짜끄리왕조 건국.
현.왓프라깨오(에메랄드사원)건축
*1851년 라마4세 뭉꿋왕.불교개혁주도(부인39명.자녀82명)
*1868년 라마5세 (쭐라롱코른 대왕)
근대화의 선구자.태국최고의대학 - - > 쭐라롱코른 대학교
*1932년 군사쿠테타로 라마7세(짜끄리왕조7대왕)가 영국으로 추방됨.
*1935년 라마8세즉위(현 푸미폰왕의 형)-->1946년 침실에서 총격피살됨.
*1946년 라마9세즉위(현 푸미폰국왕)
수난의 역사인 짜끄리왕조의 변천을 보면 근대의 태국에서 국왕은 원래부터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고 볼수있겠다.
1932년 왕정을 무너뜨린 군부는 이후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우려고 허수아비
왕(?)을 내세움.
1946년 즉위한 푸미폰왕 또한 아무힘이 없는 상태에서 집권 하였고
1957년 쿠테타를 일으킨 사릿장군으로 부터 충성서약을 받은뒤 그에게 "수도의
수호자"라는 임명장을 주고 정치적 동거(?)를 시작하였음.사릿은 국가
통합과 국민화합을 위해 불교와 국왕을 태국사회의 구심점으로 삼았고
푸미폰 국왕부부는 산간오지의 국민들과 서민층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국왕은 이시기에 소외계층을 위한 3000개의 국왕개발 프로젝트 시행.
이때부터 푸미폰왕의 국민을 대하는 진실한 겸손에 태국인들은 감동 하였다.
국민적 지지에 확신을 갖게된 푸미폰 국왕은 1973년 쿠테타 때에는
군인들 에게 쫒긴 시위대를 왕궁내에 보호하며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시위대를 보호하는 독자적 목소리를 내었다.
1991년 쿠테타를 일으키고 장군에서 총리가 된 수친타 와 잠롱 전방콕시장이
왕궁에 찾아와 국왕앞에 무릎을 끊은일은 국왕이 진정한 태국의
구심점이 되었음을 보여준 사건 이라 할수있다.
이후 수친타는 스웨덴으로 망명길에 오름.
그러나 과거 태국의 정치적 혼란기에 "중심"을 잡아줬던 푸미폰(bhumibol)
아둔야뎃(adulyadei : 팔리어 표기법)국왕은 이번 사태때 침묵하였다.
이번 친탁신 세력의 시위는 과거처럼 "군부와 민주화세력" 의 대결구도가
아니라 "전통권력'인 군부.국왕추종엘리트 지지층과 "신흥시민권력"인
친 탁신세력의 충돌 이라고 볼수있다.이번시위는 2006년9월 군사쿠테
로 실각하여 해외체류중인 탁신을 복귀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