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하지 못해 아쉬운 삶
소위 득도한 사람은 모든 아쉬움을 털어내고 매일매일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렇게 보면 예수는 득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분이겠지요. 
성경은 자족(自足)하는 삶에 대해 자주 말합니다. 
그것은 서양의 스토아철학과 동양에서는 도교와 가장 닮아 보이는 듯한 처세관이고 행복론같아 보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동서양의 안빈낙도사상이 철저히 자기(인간)를 위한 행복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차이 정도겠지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나 도덕경 등이 종교의 교의처럼 되기 힘든 하나의 이유도 아마 그와 같은데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형편에서도 자기의 삶을 감사하고 기쁘게 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 좋겠지요. 
그러나 거기에 더해 이웃과 세상의 혼란과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내게 있는 것으로 항상 그들을 보담으며 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사람으로 사는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요. 
그럴 때마다 사람이기때문에 충분히 그러지 못하는 자기 상처를 간직한 채 말입니다. 
저는, 성숙한 인간은 다소 마조히즘적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기 속에 도드라지는 프로메테우스적 상처를 싫어하지 않고 그마저 즐기며 사는 그런 성향 말입니다. 
때때로 생각합니다. 저도 브루스 올마이티처럼 되기를...하여 내가 내 가족과 이웃들에게 충분치 못하여 내 속에 돋아나는 상처를 싹 걷어낼 수 있을만큼 넉넉하여지기를...
불가능하겠죠. 아니 그런 것은 어쩌면 인간이 넘봐서는 안될 행복이겠죠. 그렇지만 자기만 부인한다고 다가 아니라 자기 십자가도 져야된다는 것을...이 말씀을 가슴에 새길 때마다 그 상처가 커져가는 것을 느끼며 또한 살아갑니다. 
흉흉한 소문때문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사람들때문에 마음이 좀더 쓰이는 때입니다. 아직 정신으로는 부르조아지이기 때문일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