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린에서의 생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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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린에서의 생활이..

entendu 3 420

파이 이야기 라는 책을 읽고..

갑자기 수린에서의 생활이 그리워 졌습니다.

여름 휴가가 다가오고 있어요...

지금쯤 수린은 아무도 없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혼자 쉬고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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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바다를 이루고 , 그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내렸다 한다.



파이이야기라는 책을 처음 봤던 것은 몇 년 전..


어디론가를 향하던
공항의 서점 안이었
다.


보딩 타임은 넉넉했지만 여행을 가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해야 했던


한 달 여간의

총총거림에 익숙해져 버린 나는 갑작스런 여유로운 시간


이 오히려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기내에서 읽힐 요량으로 잔뜩 진열되어 있는 여러 페이퍼 백의 홍수


속에서도

파란 바다위에 오렌지빛 털을 가진 큰 호랑이 한 마리와 상대


적으로 왜소해 보이는

인간이 몸을 쪼그리고 있는 하얀 배가 떠있는


표지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이 나무도시에서 오직 미어캣들을 벗 삼아 외로운 시간을 얼마나


많이 보냈을까?


행복한 삶이 지나가는 꿈을 얼마나 많이 꾸었을까?


얼마나 많은 희망이 헛되이 끝났을까?


입박으로 토해내지 못하고 가슴에 간직한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


227일간 배위에서 한 마리의 길들여지지 않은 호랑이와, 발밑의 상어

들, 일각으로 다가오

는 죽음보다 고통스런 기아의 생활은 나에게 수린

의 기억을 되살려 놓았다.

뗏목 밑으로 보여지는 수많은 어종과 거북이와 상어들의 묘사는 수린에


서 기도처럼 반복
되던 나의 일상이었으니까.


열대 섬으로의 여행은 수린이 처음도 아니고 유일한 경험도 아니었지


만.
수린처럼 야생상태의 섬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밤이면 야생원숭이의 긴 울음소리로 뒤덮이고
아침이면 소라게가 줄지


어 어디론가 떠나는 해
변가,


밤에는 별이 쏟아질
듯이 덮쳐 내리고. 밤바다는 야광플랑크톤으로 눈


이 부시게 화려했다.


그러나 열대 섬의 실제 생활은 결코 아름답지도 인간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동물적이고 원시적이다.


매트리스를 아무리 2,3개 겹쳐 깔아도 슬리핑 백 밑으로 느껴지는 모래


톨 한 알 한알은
을 쑤시게 한다.


아무리 쓸고 쓸어도 하룻밤만 지나면 텐트는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해풍


을 따라 들어온
래들로 하얗게 덮여있다.


모든 옷들에서 서걱거리는 모래가 느껴지고..


밥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메뉴이외에는 사먹을 수 없다.


밤 7시에 해가 지면 섬에서 유일한 등불은 중앙 식당밖에 없고 그 곳에


서 시간을 죽이는

일한 방법은 마시고 또 마셔서 고독을 잊어 없애는


것 ,
그렇게 술을 마셔대고 나면 이른 새벽이 찾아온다.


다행히-?- 술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광란의 술파티에서 해방될 수 밖에


없었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해가 지면 랜턴 불빛을 이용해 책을 읽다가


눈과 팔이 피로해져
잠이 드는 날의 연속이었다.


이른 아침 해변을 나가면 넓디 넓은 백사장은 소라게 무리와 나뿐이었


고.

흔들리는 해먹에 누워 하늘을 보다가. 바다를 보다가.


소라게를 보다가..
시계를 보다가.


해먹위에 할 일 없이 놓여져 있는 내 발가락을 유심히 관찰하거나..


그건 정말 묘한 경험이다.


멋진 경험이라기 보다는 묘하다는게 정확하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시계속의 시침과 분침의 움직임을 하나 하나


세어 본적이 있는지..



초침은 정말 쉬지 않고 부지런히 시계 자판 위를 움직인다.


아무리 부지런히 움직여도 어짜피 위치는 원주율에서 한 뼘도 변할 수


없다.


일정한 속도로 일정한 자판을 일정하게 움직이는 초침을 보고 있자면..


그게 무엇을 의미하게 되는지를 깨닫게 되자면..


초침을 눈이 빠지도록 보다가 분침을 보면..


기껏해야 5분이 흘렀을 뿐이다.


시침이 움직이는 것을 보기 위해 기다리다 포기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 눈이 피로해 지면 소라게를 집어 들고 소라게의 머리가 나왔다


들어갔다 몇차례

복하다가 죽은 듯이 딱딱한 껍질 안으로 숨는 것을


기다린다.


살며시 다시 땅위에 놓아두면 그에게는 빛의 속도로 기어가는 그들을


볼 수 있다.



그렇게 1,2 시간을 죽이고 있자면 서서히 사람들이 깨어난다.


또다른 열대의 시작이다.


사람들은 모두 무료해 하며 어그적거리며 걸어 간다.


그 누구도 뛰거나 조급해 하거나 달리지 않는다.


섬을 오가는 정기선이 들어오는 배시간을 제외하면 섬안의 사람들은


나무 늘보처럼
늘어져 있다.

방콕에서 우연히 만나 수린으로 함께 여행을 갔던 3명의 친구들이 있었

다. 그들은 밤이면 술판과 포커판을 벌여 태국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

다. 바람이 불어오는 선선한 오후 무렵에는 다국적 족구대회를 열기도

했다. 술판이 지치면 역시 다국적 포커판이나 젠가 시합을 하기도 했다.

모두들 제 나름의 시간 죽이는 방법을 찾아내어 미친 듯이 매달렸다.


그렇게 3일 정도를 지내고 나면 두 종류로 나뉘어 진다.


거의 대부분은 주인없이 떠도는 시간을 없애는 방법을 찾다 지쳐 다시


시간의 흐름을

찾아 섬을 떠난다.


섬에 남게 되는 사람들은 새로운 친구를 찾아 낸다.


바닷바람속에 섞여 녹아있는 새로운 시간의 흐름이 바로 그것이다.


난 전자와 후자의 중간쯤에 속하는 것 같다.


섬에서 5일을 머물렀지만.. 섬의 일상에서 자유로웠다고는 말하지 못하


겠다.
계속 어리둥절해 하며 신기로와 했다고나 할까..


본능적으로 계획을 짜고 - 하물며 널부러져 노는 것도 몇 시부터 몇 시


까지..

이렇게 짜놓아야 맘이 편하다. - 시간을 맞추는것에 안정감을 느


끼는 나로서는..
5일간의 완벽한 자유는 뭐랄까.. 신기한 체험같았다.


무엇을 하건, 무엇을 하지 않건. 모든 것은 자유였다.


무엇을 하건간에 그 무엇의 종류는 다양하지 않았으며 원시적이고 본능


적이었다.

화장실은 수세식이었지만 분비물을 보지 않을 정도의 교양만


을 갖추었을 뿐이었고.

식당의 메뉴는 죽, 볶음밥, 국수,빵 등이 갖추어


져 있었지만 3끼를 연속으로 먹고 난 후
맛이 그 맛인걸 깨달았다.


아침, 저녁으로 조수의 흐름은 바뀌었으나 바다는 여전히 푸르른 색이었


고 아름다웠다.


커다란 바다거북과 등골을 얼려버린 상어의 출현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바다는 평화로왔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친구는 시간이었다.


쉬지 않고 시침을 따라 내 주변을 휘감던 시간.


5일 후 .. 나는 그 섬을 떠났다.


서울로 돌아왔고 일상으로 복귀했고..


여전히 오늘도 시간과 다투며 일을 해댄다.


그러는 동안 가끔씩..


맹그로브 나무에 묶어 놓은 해먹에 누워 시간을 세던 그 순간이 떠오르


곤 한다.


온통 적막뿐인 바닷속을 헤엄치던 작은 물고기 떼의 요란했던 소리를


기억한다.
경이롭게 보이던 큰 바닷 거북의 수영을 추억한다.

풍요로운 선택을 빼앗긴 인간에게 자연은 경외의 다른 이름이 된다.

넉넉한 물질에서 멀어진 인간에게 생존은 치열한 전투가 된다.


무엇보다 넘치게 주어진 시간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거울이 되기


도 한다. 배위에서 오로지 태양과 시간과 주황색 털을 가진 짐승만을 벗


으로 삼고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던 10대의 소년.



구명보트에서 마지막으로 그를 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를 약간 자극해서, 그의 마음에 내가 남아있게 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에게 말을 걸었으면 좋았을걸.

390매에 해당하는 얇지 않은 책을 단 하루만에 읽어버릴 정도로 흡입력


있는 소설이었다.


다 읽고 난 후.. 파이의 호랑이에 대한 정의하기 힘든 감정이 마치 내게


남아있는 수린의

억 아니 기억같아서 종일 수린에서의 시간들을 되새


김질 하고 있다.


돌아온 후.. 참 많은 질문을 받았었다.


그 다양하지만 비슷한 종류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하나같이 막연하고


불투명했고
나로서도 단언하기 힘든 느낌의 여행이었는데..

파이 이야기의 느낌도 그러하다.

재미있었냐. 즐거웠냐. 좋았냐.

파이는 호랑이를 사랑했을까. 파이의 인생은 해피엔딩인가.

살고자 하는 의지가 그를 생에 붙들었을까..


3 Comments
앨리즈맘 2008.07.04 00:43  
  갑자기 3주나 보낸 쁘렌 띠안이 그리워집니다 정말 그날이 그날이고 늘 같은 음식,, 정전. 아침 해뜨면 바닷가 끝에서 끝으로의 산책.. 님은5일 보내셧군요

 전 3주..
이 미나 2008.07.04 10:33  
  섬의 여왕..entendu 님.
타일랜드 세일 정보를 주실 때와 다른 모습이^^

분주히..
여행짐을 꾸리다..잠시 멍해졌어요.
만지작 2008.07.09 17:20  
  많은 여행을 해본건 아니지만.

수린.
가는데 하루. 돌아오는데 하루가 걸리더라도.
갈때마다 꼭 다시 와보고 싶은 곳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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