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재활원에서의 2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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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재활원에서의 2년간

봄길 4 212
돌지난 첫애를 안고 장애인재활원인 ***학원으로 이사를 했다. 사택은 2년전에 100% 정부 지원을 받아 지은 것이다. 얼마나 부실하게 지어졌는지 겉은 번드레한데 벽마다 갈라져서 심한 데는 거의 어른 오른손이 들락거릴 만큼 벌어져 있다. 복지사업현장이 거의 그런 수준이다.
보일러는 아예 작동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원장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지금 생각하니 그게 단지 보일러를 바꿔서 될 문제가 아니니 그랬던 것같다. 바닥시공 자체가 완전히 엉터리니... 정부 지원을 다시 받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기 돈(?)을 들여 고치고 싶을 리도 없는 것이다.
그 곳을 갈 때 아내는 둘째를 가진 상태였다. 몸은 무거워져 오는데 방은 어느 한 군데도 온기라곤 없었다. 벽마다 갈라져서, 허허벌판 언덕위에 지어진 방안에는 삭풍이 몰아치는데 다가오는 겨울이 꿈만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아내의 고통을 제대로 몰랐다. 왜냐하면 나는 늘 그렇게 척박하게 살아왔기때문이다. 배가 불러오는 아내를 보면서도 누울 곳만 있으면 되지 않느냐 나는 그렇게 버텼다. 지나고 나니 그 때 나에 대한 아내의 신뢰가 큰 타격을 받았던 것 같다.
아내는 삼척 바닷가에서 중학생 때까지 성장했다. 장인은 큰 전복어장을 경영했다. 소위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공부만 하면서 성장했다. 중학교때까지 항상 옷은 마춤으로만 입고 자랐고 아내는 사는게 그런 것인 줄 알고 자랐다.
그 후에 강릉여고로 진학을 했다. 고생은 그때부터 겪었지만 그래도 늘 할머니가 대학을 가기까지 돌봐주었다. 아내는 나와 너무 다른 가족사를 가졌기에 어려운 신혼시기에 일체 자기의 성장사를 얘기하지 않았다. 그때문에 나는 나의 성장사를 기준으로 매사를 대응했다.
4월이다. 5월 말에 둘째가 태어났으니 그 애를 해산할 날이 거의 임박했다. 겨울 내내 만원주고 산 전기장판 하나에 세 식구가 옹크리고 잠을 자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날도 그렇게 눈을 붙이고 있었다. 갑자기 아내가 말한다. 여보, 내 배 위에 뭔가 움직이는 것같아요.
아이가 태동을 하는 거겠지. 내가 무심히 얘기했다. 첫 애때는 그렇게 신기하고 놀랍기만 하던 일이었다. 2년이 되자 그리 시큰둥해졌다.
근데 아니라 한다. 배위에서 꿈틀대는 게 있다고 한다. 혹시나...나는 정신이 펄쩍 들었다.
허허벌판에 지어진 사택 주변에는 두 가지가 엄청 나게 많이 들끓었다. 그것은 모기와 지네였다. 한 마디로 그건 헤아릴 수 없는 수준이었다. 모기가 거의 물가에 하루살이 노는 것처럼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지네가 많이 다니는 것도 처음이었다. 아내야 기겁을 하지만, 나는 늘 지네도 약에 쓰려면 돈을 많이 줘야 하는 거니...마, 그러려니 하고 보면 된다는 식이었다.
조심스레 얇은 담요를 들춰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만삭인 아내의 배위에 거의 한뼘은 더 되는 지네가 떡 버티고 있었다. 배꼽 옆이다. 가장 민감한 단전 부위다. 아내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다. 혹시나 지네 독이라도 쏘인다면...위험을 직감했다.
안전 장갑도 없었다. 방구석에서 비닐봉지 큰 것을 주어들었다. 손에 둘렀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는 지네를 나꿔채었다. 다행히 단번에 성공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만일 만삭인 아내가 지네에 쏘였다면 둘째가 무사했을까...그렇게 4월도 지나가고 있었다.
딸애의 백일이다. 백일을 준비했다. 첫애의 돌도 하지 않았지만 딸애의 백일을 준비했다. 원장에게 백일날 방문해달라고 했다. 원장은 대학원 입학 때 수석을 한 동료의 아버지였다. 그 당시 나를 형님이라 부르며 나를 참 존중하던 친구였다.
거제도의 낙도에 있던 내게 자기 아버지의 꿈이 재활원을 장애학교로 바꾸는 것이니 도와주면 좋겠다 한다. 나는 계산하지 않는다. 나는 그 친구를 사랑했고 또 약자들을 향해 늘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냥 하나님의 부르심이니 하면서 아무 조건없이 아내를 설득해 가게 되었다.
아내가 결혼전에 받은 봉급이 55만원이었다. 그냥 그곳에 가서 시각장애아들과 청각장애아들을 아내는 가르쳤다. 아마 23만원인가 받은 것같다. 나는 그곳의 아이들을 돌보고 직원들과 함께 채플들을 가졌다. 그리고 16만원인가를 받았다.
그런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다. 정말 아무 문제도 아니다. 다만 정말 그곳에서 그곳에 적합한 일을 할 수 있었는가? 아내와 나는, 거기는 아니기를 기대했는데 소위 복지의 암울한 현장을 다시 보았을 뿐이다. 무력감이 엄습해왔다.
시스템도 경영철학도 윤리도... 그곳에는, 정작 그곳의 주인공들인 아이들과 봉사자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버려진 장애아들은 오직 특정인을 위한 기회일 뿐이었다.
백일이다. 아내와 나는 항상 그러듯이 최고의 손님을 접대할 최선의 잔치를 준비했다. 주로 삼척의 처가에서 가져온 것들이 특별난 것들이다. 그리고 아내가 늘 시골의 가난한 목회자들을 접대할 때 하던 준비들이다. 150명 아이들을 위해서는 과일과 떡을 준비했다.
그리고 막장같은 곳에서 조악한 처우를 불평하며 애들에게 분풀이하기를 반복하는 그곳의 모든 직원들 30명을 초대했다. 엘에이갈비며 탕수육이며 화채들이며 전복죽이며 떡들이며 과일들이며 여러 가지 회요리들이며 무엇보다 전복을 아마 한 200개는 가져왔으리라. 그렇게 모든 이들을 대접하였다.
처음에 원장은 애를 위해 애기옷 하나를 가져왔었다. 식사가 시작되니 직원을 시켜 반지를 사오게한다. 원장은 자기만 조촐하게 초대할 줄로 알았다고 한다. 참 가소로운 웃음이 희미하게 마음 한 켠에 일어남을 느낀다. 수양이 덜 된 내가 우습기만 하다. 여전히 나는 심뽀가 못된 것을 느낀다.
그렇게 그곳에 2년을 더 있지 못하고 우리 가족은 또 의령 어느 벽지로 옮겨가게 되었다. 원장의 얘기인즉 리더십이 분산되는 걸 못견디겠다나...허긴 나를 무능하다고 욕하고 쫓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게 어디인가?
4 Comments
시골길 2007.07.16 12:13  
  참 어려운 시기에, 암울하기만 했던 우리의 바닥현실이었지요..
장애인이나 소외계층에게 실질적인 수혜가 시작된 것이 불과 오래지 않은 때부터인데요...
그러나 그런 시절에 대해서 대개는 너무 빨리 잊어버리고...
사족을 달자면 우리의 불우한 이웃들과 시설에 조금 더 나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보는데, 우짠 불법체류 외국인을 위한 노동자인권단체는 그리도 많고..목소리는 큰지 .. 이러한 것들도 결국은 "오직 특정인을 위한 기회'일 뿐이라고 해야겠지요?

우리 안의 문제에 관심을 좀 더 가졌으면 좋으련만..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고양웃음]]
덧니공주 2007.07.17 20:53  
  봄길님,사모님은,참 대단하신분이네요...
귀뚜라미에 기절하는 저인데,지네라,,,,,[[낭패]]
지금은,그랬었지,,,,,하면서 얘기할찌라두,가슴이
짠하시겠어요....
맘존산적 2007.07.18 09:23  
  지금까지의 우리 역사가 그 원장님같은 분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면, 앞으로의 역사는 봄길님같은 분들이 이끌어지겠지요. 격려의 박수라도 보내고 싶습니다.
경기랑 2007.07.18 14:18  
  그냥 읽고만  가기에는 마음이 아파네요,,,,,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 하시기를 바랍니다[[원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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