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집이나 차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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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집이나 차려볼까?

봄길 3 420

아이들은 아빠를 여러모로 시덥잖게 여기면서도 무엇인가 음식을 만들어주면 좋아한다. 아빠가 만들면 무엇이든 너무 맛있다고 한다.
음식이라야 라면삶는 것, 밥짓는 것, 볶음밥 만드는것, 자장볶는 것, 카레만드는 것 그리고 김치찌개 끓이는 것이 모두 다이다. 그런데 아빠가 하면 다 맛있다 한다.
내게 대해서 아이들이 칭찬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워낙 맛있게 그 음식들을 잘 만드는건지...아니면 다른 불만들이 내게 너무 많아 상보효과로 그러는건지 햇갈리기도 한다.

아내는 거의 후각맹이다. 그때문에 음식만들기를 별로 즐기지 않는다. 결국 아내가 만드는 음식의 맛도 무언가 2%가 부족하다. 그렇지만 그게 내 인생에 가장 큰 이익이 됐기에 나는 전혀 불만이 없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엄마는 종종 나에게, 너는 입에서 냄새가 나서 연애는 못할거라고 퉁을 주셨다. 그 후 나는 다른 건 몰라도 늘 치솔은 가지고 다녔다.
그렇지만 너무 속병이 많고 어릴 때 거의 구강위생을 돌볼 여유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연애를 할 때 아내는 전혀 나의 그런 약점을 내색하지 않았다. 사랑은 맹목적이라는 속담처럼... 그 때문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아내는 후각맹이었다. 그것은 까다로운 성격의 아내가 나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데 도움을 주었다.

나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과자나 빵으로는 허기를 채울 수가 없다. 죽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약간 밥맛 떨어지는 얘기일지 모르지만 나는 1968년도가 되어서야 밥을 주식으로 사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죽이 주식이었다. 그것도 그야말로 죽지않을 정도로 먹는 죽 말이다.
엄마 혼자 벌어 사는 생활은 늘 그랬다. 그런 생활은 내 위에 형과 누이들이 거친 사회에 나가 자기 입벌이를 하게 되고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재난은 이어졌고 33살에 결혼을 하고서야 비로서 하루 세끼를 챙겨먹을 수 있게 되었다.

죽이야기를 좀 할까보다. 제일 먹기 싫은 죽이 뭘까? 나는 랭킹을 매길 수가 있다.
그 소스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말분가루로 쑨 수제비가 정말 최악이었다. 말분이란 아마 쌀이나 보리를 도정하고 나온 거친 가루가 아닌가싶다.
쿠데타와 함께 화폐개혁이 있은 후 그런 죽을 얼마간 먹은 것같다. 어린 아이의 입에 그것은 너무 거친 것이었다. 소금으로만 맛을 낸 그 죽을 먹자면 나는 늘 약한 입천장이 벗겨져 쓰라렸다.
울면서 안먹으려고 하면 엄마는 먹어야 산다고 하며 얼마라도 먹이려고 하셨다. 그때 엄마의 안스러워하는 표정과 눈물을 머금은 듯한 모습을 잊어버리기가 어렵다.
그 다음은 좁쌀로 쑨 죽이다. 그것은 말이 죽이지 뭐라할까 정말 비참한 것이었다. 소위 찰기라고는 없다. 죽사발을 받아들고 막상 먹으려 하면 금방 가라앉아 멀건 물이 된다. 그러면 휘휘 저어가며 먹어야한다.
그냥 조밥이라도 해서 먹고 물을 마시면 될 터인데 그리 할 수가 없었다. 밥을 지을만큼 좁쌀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기억난다. 하도 먹는 것같지 않아 조금이라도 좁쌀을 더 넣었으면 해서 작은 주먹으로 좁쌀을 더 넣던 일이...그러면 내일 먹을 거없다고 말리시던 엄마...적지 않은 기간을 그렇게 살았다.
얼마가 지나자 미국에서 옥수수를 원조한다고 한다. 그때부터 옥수수가루로 죽을 쑤어먹었다. 그건 꽤 고소하고 또 제법 뻑뻑해서 먹을 맛이 났다. 동생이랑 먹으면서 덩어리져 있는 것을 식탁옆에 따로 두곤 했다. 그건 과자라고 생각하면서 맨 뒤에 먹기 위해서 아끼는 것이었다.
종종 8살 위에 형이 그것을 몰래 먹어치웠다. 그러면 집안은 울고불고 난리가 나는거다. 지금이라면 사춘기에 해당할 형이 그 작은 체구로 공장을 다니며 배고픈 시기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엄마는 늘 그러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언제부터인가 미국이 옥수수 대신 밀가루를 원조한다고 한다. 덕분에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게 됐다. 소금국에 수제비라도 참 좋았다. 둘러앉아 수제비를 뜯어 넣던 일, 배를 채우기 위해 반죽을 질게 해서 먹다가 나중에는 칼국수를 해서 먹을 만큼 형편이 좋아졌을 때의 행복감...멸치를 다시로까지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말할 나위가 없었다.
지금은 미국에 대해 사람마다 부정적인 생각이 많지만 그 시절 미국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대안이었다. 어쩌겠는가?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인데...지금도 나는 종종 칼국수를 만들어먹는다.
드디어 쌀로 죽을 쑤어먹게 된게 언제든가...시래기랑 멸치를 넣고 밥죽을 먹게 되었을 때 그 환상적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어쨌든 우리 가족은 내가 5학년 때까지 죽으로 먹고사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해 초겨울에 세상을 떠나셨다. 사람들은 복이 없어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고 위로한다. 사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후부터 우리는 밥을 세끼 먹게 되었다.
종종 별미죽을 해먹을 기회도 없잖아 있었다. 그것은 집이 바닷가라 해변에서 해초를 뜯어다 해먹는 죽이다. 지금은 오염이 돼서 어림없지만 배를 채우는데 그것은 상당히 도움이 됐다.

우리 집은 소위 엥겔계수가 엄청 높은 편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일상적인 식사는 몰라도 간식과 별식은 넉넉하게 준비해준다. 먹는 것에 너무 어렵게 자란 것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테이크아웃식당이나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뷔페를 종종 가기도 하는 편이다. 그러자면 굉장히 머리를 써야한다. 다행히 강릉에 살기에 자주 안 가도 되니 부담은 적다.
무엇보다 육식을 넉넉하게 한다. 대개 할인점을 저녁 늦게 간다. 보통 30~50% 할인할 때 삼겹살, 우유, 떡, 빵, 생선, 과일, 당일 요리들을 산다. 거기다 상품권을 할인해서 사 쓰거나 쿠폰을 함께 쓴다.
피자나 뷔페, 패밀리 레스토랑들도 최소 40% 이상 할인해서 찾는다. 어제 아내가, 우리가 쓰는 이런 쇼핑 비용이 얼마나 되나하고 물어본다. 이마트에만 50만원 되겠지 한다.

극단적인 어려움 속에서 넉넉한 마음을 지키는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기에 나는 항상 마음 속에서부터 내가 여유와 즐거움을 간직하고 있는지 늘 묻게 된다. 괜찮아. 마음이 웅크려들진 않아. 그렇게 물어본다.

3 Comments
흰곰 2007.07.08 19:29  
  다음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와너 2007.07.09 03:16  
  오늘 저녁 고등학교 동기와의 저녁모임에서 비슷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저 배만 부르면 되는 시절을 겪었는데.. 지금은 입이 너무 간사해졌다구요....
덧니공주 2007.07.10 08:56  
  음,엥겔계수,왜 난,높은거야?ㅋㅋㅋ[[낭패]]
죽이 요즘은,별미죠.밥보다 비싼 죽~ㅋㅋㅋ
아버지가 음식두 해주시고,참,다정하세요~[[원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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