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0일에 읽는 시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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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0일에 읽는 시 한편^^

필리핀 0 21



누군가 내 어깨를 치고 있다

이곳은 강서의 끝, 몇 대의 버스 종점과 

번지수보다 더 많은 가구들이 사는 곳

날마다 불도저 삽질소리 요란하게 

남부순환도로의 한 끝이 파헤져지고 

확인할 수 없는 서울의 한 끝이 허물어지고 있다

누구인가, 오랜 친구처럼

내 어깨 위에 쌓이는 이 눈은

또 어느 슬픈 죽음이 삐라처럼 휘날리고 있는가

언제부터인지 가난한 이웃은 

도시의 외곽으로만 밀려다니고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땅을 위하여 

이곳은 아이들은 종이배를 접지만

그들이 가닿을 꿈의 항구는 눈발에 가려 아득하고

밤이면 저 먼 샛강 위로 

휘황한 서울의 생애가 떠내려 간다

오늘 하루 눈이 내려

강남과 강북으로 통하는 모든 길이 막히고 

우리들 삶의 귀가 길도 아득한데

지친 하루를 살고 돌아오는 젊은 가장이여

이제 당신들의 서울은 

어디로 시린 발목 뻗을 것인가

인간이 사는 마지막 동네를 찾아 떠나온

집배원 우편낭 속으로 눈발이 날려

기억할 수 없는 몇몇의 주소가 지워지고 

매운 바람에 코를 씻으며 돌아다니는

아이들 한쪽 어깨가 젖고 있다

―「신월동의 눈」


「신월동의 눈」은 198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심사위원이셨던 신경림 선생님께서 이렇게 평을 해주셨다. 

"「신월동의 눈」은 표현이 간결하고 시를 제대로 아는 사람의 시 같다. 

변두리 사람들의 가난하면서도 따스한 삶의 모습들이 어떤 대목에서는 구체적으로 

또 어떤 대목에서는 상징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어 시종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는 이 시를 1985년 겨울에 썼다. 

그때 나는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을 중퇴하고 학습지 교사로 취직했다. 

내가 맡은 구역 중 한 곳이 서울 강서구 신월동이었다. 

당시 신월동은 신흥 주택가로 자리를 잡아가던 동네였다. 

1주일에 한번씩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신월동에 가면 

아직 포장되지 않은 도로 위로 흙먼지가 풀풀 날리고 

갓난아기를 들쳐 업은 새댁들이 골목을 서성이고 있었다. 

청운의 꿈을 품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지만 

거대한 지옥굴에 빠진 일개미로 전락해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젊은 가장들. 

간신히 따낸 서울특별시민의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 

기를 쓰고 서울의 한 귀퉁이에 붙어사는 그들의 모습이 못내 안쓰러웠다.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으니까.

지금의 서울은 그때보다 몇 배나 더 큰 공룡이 되어 버렸다. 

이제 신월동은 서울의 중심부가 되었고 

아직도 서울이라는 지옥굴에 홀려서 꾸역꾸역 몰려드는 사람들은 

근교의 신도시로 밀려나고 있다. 

신월동 비포장도로 위에서 코를 질질 흘리며 뛰놀던 그 아이들은 

지금쯤 어느 곳에서 보금자리를 꾸려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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