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에 기록된 태국과 우리나라의 최초의 만남. 그 미스테리
역사서에 기록된 태국과 우리나라와의 최초의 만남은 고려사에 나와 있습니다.
우선 그 내용을 한번 봅시다.
高麗史 世家 卷第四十六
恭讓王 3年 七月三日
戊子 暹羅斛國遣奈工等八人來, 獻土物, 致書曰, “暹羅斛國王, 今差奈工等爲使, 管押舡隻裝載出産土物, 進奉高麗國王.” 無姓名封識, 但有小圓印, 亦不可考驗. 國家疑其僞, 議曰, “不可以信, 亦不可以不信. 且來者不拒, 待之以厚, 以禮遠人, 不受其書, 以示不惑 可也.” 王引見勞之, 對曰, “戊辰年, 受命發船, 至日本, 留一年, 今日至貴國, 得見殿下, 頓忘行役之勞.” 王問帆程遠近, 對曰 “北風, 四十日可至.” 其人或袒或跣, 尊者用白布韜髮, 其僕從見尊長, 脫衣露身, 三譯而達其意.
지금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사 세가 제46권
양력 1391년 8월 3일
싸얌(暹羅斛國)에서 사신으로 파견된 내공(奈工) 등 8명이 고려를 방문하여 토산물을 바치고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싸얌국왕께서 이번에 저희를 사신으로 임명하시고, 배에 토산물을 싣고 고려국왕께 바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제출한 문서에는 성명과 공식적인 봉인 없이 작은 동그란 도장만 찍혀 있어 신뢰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이에 조정에서는 해당 사신들이 위조된 신분일 가능성을 의심하며 논의하였다.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불신할 수도 없다. 또한, 먼 곳에서 찾아온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고 예우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이다. 다만, 이들이 가져온 글은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의혹을 피하는 것이 옳다.”
왕은 이들을 직접 접견하고 노고를 위로하였다. 이에 사신들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희는 무진년(1388년)에 명을 받아 배를 타고 일본에 갔으며, 그곳에서 1년간 머물렀습니다. 이제야 고려에 도착하여 전하를 뵙게 되었으니, 오랜 여정의 고단함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합니다.”
왕이 항해 경로와 거리 등을 묻자 그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북풍이 불면 40일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독특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웃통을 벗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맨발이었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흰 두건으로 머리를 감쌌으며, 수행원들은 존장(尊長)을 마주할 때 예를 표하기 위해 옷을 벗고 몸을 드러냈다. 이들과의 대화는 세 차례의 통역을 거쳐야 뜻이 제대로 전달될 정도로 언어의 차이가 컸다.
꽤 짧은 내용이고 요약하면 고려 공민왕이 태국에서 공물을 가지고온 사신을 직접 영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정말 태국의 사신이 왔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우선 1391년의 동아시아 정세는 다음과 같습니다.
1391년은 고려 공양왕 3년으로, 국력이 쇠퇴한 말기였습니다. 이듬해인 1392년에 고려는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집니다.
본문에서는 '섬라곡국暹羅斛國(싸얌과 그 전에 있던 나라인 라워를 합친 단어)'이라 나오는 나라는 1351년에 세워진 아유타야 왕조입니다. 1391년은 아직 주변국과의 외교 네트워크가 확립되기 전이었습니다.
중국은 원·명 교체기(1368년에 명 건국)로, 명과 동남아 간의 공식 외교 루트가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심지어 명은 건국 초기인 1371년에 해금령을 내려 바다를 봉쇄하고 다른 나라와의 교류를 금지합니다.
따라서 정식 외교 사절이 아유타야 왕으로부터 파견되어 한반도까지 왔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조공은 커녕 아유타야 국왕이 고려를 인식하고 있을지도 의문인 시기이죠.
위 고려사의 본문에도 이러한 정황은 나타납니다.
"문서에는 성명과 공식적인 봉인 없이 작은 동그란 도장만 찍혀 있어 신뢰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이에 조정에서는 해당 사신들이 위조된 신분일 가능성을 의심하며 논의하였다."
고려 조정이 보기에도 이상한 문서였습니다.
사실 동남아시아-중국-일본의 무역은 고대부터 중국의 복건, 광동 사람들 해온 일입니다. 바다와 항해에 능한 이들은 중계무역을 했고 사업을 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토착세력과 조정에도 이국의 물건들을 바쳤죠. 때로는 상업적 이익을 노리고 ‘조공’을 자칭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일본에서 상업 활동 중 귀국길에 "고려 왕에게 선물(공물)을 바친다."며 형식적인 외교문서를 꾸민 것은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조공–하사 관계'는 곧 안전 통행과 상업적 특혜를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상인들이 조공 형식을 빌려 안전을 확보하거나 무역 이익을 얻기 위한 행위였을 수 있습니다. 고려 입장에서도 외교적으로 거절하기 어려움이 있었겠지요. 왕조 말기 혼란기였지만, 왕은 '오는 자를 거부하지 않고 예로 대한다'고 한 것은 외교적 중립성과 체면을 유지하려는 선택이었죠.
그래서 '일본에 머물던 중국-태국(아유타야)계 해상 상인들이 외교 사절을 자칭하고 허위로 문서를 꾸며 고려에 접근했다.'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가설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도 해석이 안되는 것은 본문 말미의 "수행원들은 존장(尊長)을 마주할 때 예를 표하기 위해 옷을 벗고 몸을 드러냈다."라는 부분입니다.
즉, 아랫계급의 사람이 수장에게 옷을 벗어 예를 표했다는 말입니다. 원문에도 '脫衣露身' 나체의 상태로 옷을 벗었다라고 확실히 쓰여있습니다. 웃사람에게 예를 표할때는 옷을 벗는다는 태국의 예절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거든요... 과연 뭘까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