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번째, 5.18 광주사태에 이용당한 나의 행보 /내전이냐, 폭동이냐, 사태냐, 민주화 운동이냐? /망국의 위기에 미얀마,북한,남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 부끄러운 참회록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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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번째, 5.18 광주사태에 이용당한 나의 행보 /내전이냐, 폭동이냐, 사태냐, 민주화 운동이냐? /망국의 위기에 미얀마…

바혀겨 0 126

73번째, 5.18 광주사태에 이용당한 이대호의 행보

/내전이냐폭동이냐사태냐민주화 운동이냐?

/망국의 위기에 미얀마,북한,남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대호의 부끄러운 참회록 2

 

<이 글은 202557일 

이대호블로그 (http://blog.naver.com/daeho7103

이대호다음블로그(https://daehod.tistory.com/에 올린 글입니다>

 

잘못 다루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 주제를 두고 

금기(禁忌또는 성역(聖域)이라고 부른다.

판도라의 상자를 꺼리지않고 열어 온 

나는 또 한번 이 상자를 열어 보려고 한다.

 

지역감정에 세뇌되지않는 자유로운 영혼

내 청춘의 중고교 시절은 꿈도 많았고

아름다운 추억도 많이 갖고 있다.

박정희대통령 시절 대구에서 초중고를 다닌 나는

지역감정에 세뇌될만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성향이 자유로운 영혼인지라 

열린 마음으로 지역감정에 반응했다.

대구시청 만년 과장이셨던 아버님은 늘 박정희대통령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통령에 관한 덕담을 많이 들려주셨다.

그러면서 김대중은 빨갱이고 뇌물도 많이 받아

엄청 부자다고 하시는데 어린 마음에도 다 믿지는 않았다.

대학다닐 때 전라도 사투리가 너무 귀엽게 들려

나는 전라도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더니

부모님들은 펄쩍 뛰면서 전라도 사람은 배신도 잘 하고

앞에서는 아부하는 척 하지만 뒷통수를 잘 친다고 반대를 하셨다.

나는 정형화된 논리에 반대했고 

어른들의 충고에 다 사람 나름이다고 

반발하는 독특한 성향을 보였다.

대학 시절하루는 다른 대학에 다니는 

한 고교 동기가 연세대 캠퍼스에 놀러왔다.

세 사람이 놀다가 하숙집으로 돌아오는데 

같은 하숙집에 사는 전라도가 고향인 친구를 조우했다.

우리 일행과 마주쳐 소개시키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놀러온 동기가 하숙집 친구의 말투를 듣더니

대뜸 야 이새끼전라도 놈이네하는 것이었다.

당황한 전라도 친구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데

나와 또 한 친구가 욕한 고교 동기를 뜯어 말리고

화해시켜 겨우 전라도 친구를 보내주었다.

나중에 옆에서 같이 말렸던 내 친구가 한 에피소드를 말해주었다.

욕한 그 친구가 사람은 재미있지만,

길가다가 젊은 여성들한테 다가가 가슴을 확 만지고

도망가는 장난을 잘 치는 골때리는 별종” 이라고....

이날 이후 나는 1970년대 경상도에 비해

소외감을 느끼고 살아가던 전라도 사람들을

대하는 내 소신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다 사람 나름이지지역감정은 잘못된 거라고....”

 

하루는 연고전을 마치고 고교 동기들이

신촌로타리에서 술을 마시러 가고 있었다.

신촌은 축제 분위기에 들떠있었고 한쪽에서 웅성거리는

무리가 있어 가보니 한 청년이 몰매를 맞고 있었다.

고교 동기 중에 순박해서 내가 좋아하던 한 친구가 

같이 동참해 발로 차고 난 뒤에 씩씩거리면서 

우리 동기들 무리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다들 궁금해서 왜 때렸냐고 물었더니 

고려대 녀석인데 우리 연대 구역인 신촌에

와서 고려대 응원가를 불러 두들겨 팼다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열이 받친 나는 고대 학생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발로 밟는 게 말이 되냐고 소리를 꽥 질렀다.

옆에 있던 다른 친구들이 놀라 나를 보면서 .....‘

하면서 웃었고때린 그 친구는 머쓱해져 말문을 닫았다.

친구들끼리 의기투합하는 분위기에서

의리없이 낯선 이방인(고려대생)의 편을 드는 

내가 별종으로 보였던 것같다.

나는 진영 논리에 사로잡혀 좌파니 우파니 하는 것도 

생리에 맞지않아 정치인되기는 어려울 것같다.

그래서 이렇게 돈도 못 벌고 고생하는지도 모르겠다.

 

중대원 구타 사건은 지역 감정을 이용한 각본

육군 일병 시절중대원 구타사건(71번째 글)에 

대해서 추가할 것이 있다.

사건 전에내가 경상도(대구)출신 중사와 

정승화참모총장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기에 

각본,연출의 주도권은 경상도 중사에게 있었던 것같다.

원래 짜여진 그들의 각본은 이랬다.

전라도 출신 중사가 전라도 일병에 빠따를 칠때는 내가 개입하지않고

경상도 출신 중사가 경상도 병장을 구타할 때만 개입해서 

나를 경상도 전우들 한테 특히 총애받는 군부 라인으로 

편입시키기를 원했던 것같다.

 

기억을 돌이켜보니 사건 며칠전경상도 출신 친한 동기가 

치료받으러 의무실에 온 기억이 난다

엉덩이 전체에 피멍이 시뻘겋게 난 상태로 나를 찾아왔다.

전라도 출신 모 일병에게 밤에 불려가 빠따를 맞았다길래

우리랑 동기뻘인데 때린다고 맞냐고 물었다.

전라도 일병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동기뻘이라 생각했지만 

자대 배치가 20일 정도 빠르다는 명분으로

운전,정비병들 기수 정리도 할겸(고참들의 지시가 있었겠지만) 

밤에 내 동기들을 불러내 군기를 잡았던 것이다.

내가 친한 동기를 때린 ’20일 빠른 전라도 일병에 대해

당연히 반감을 가질 것으로 보고 짠 각본이다.

그가 공개적으로 내무반에서 빠따를 맞을 때 

말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런 각본을 모르는 나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벌어지는 구타에

깜짝 놀라 의협심을 발휘해 전라도 중사를 말렸던 것이다.

다음날 경상도 중사가 구타할때는 짜여진 각본임을 

간파했기에 자연스런 의협심이 발동될 수없었고

의도가 의심되어 개입을 망설였던 것이다.

내 성격이 단순해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보이는

상황에 용감하게 나서는 척은 할 수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실생활에서 수없이 맞닥드린다.

막후권력자들과 초일류재벌들(세계정부 세력)이 

재고무기 판매,전쟁준비금 빼돌리기,돈세탁을 위해 일으킨 전쟁에서 

죽고 부상당한 전쟁 난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TV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해 동정심을 유발한다.

거대한 연극인줄 모르면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후원금을 보낸다.

철없는 어린이의 푼돈부터 재벌들의 성금까지

싹싹 끌어모아 일부는 후원단체 운영금으로 쓰고

일부는 돈세탁해 착복하고 나머지 작은 액수의 후원금만

전쟁 피해자에게 전달되는 것을 안다면 눈물을 흘리면서

후원금을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5.18 광주사태에 이용당한 나의 행보

지금은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격상된 광주폭동을

이렇게 사태로 지칭한 이유는 

태생의 근본을 돌아보자는 취지다.

 

내전이냐폭동이냐사태냐민주화 운동이냐?

19803

제대후 연세대 2학년에 복학했을 때

한치 앞도 모르는 안개 속 정국에서

연대 캠퍼스 잔디밭에는 학생수 보다 많은 사복경찰이 

늘 죽치고 앉아있어 애초에 교내 시위는 성립될 수없었다.

첫 막후대권자는 언론을 통해

야당과 운동권 세력도 배후조종했다.

실세 전두환의 보안사 세력이나

킹메이커 사단 경북고 세력과도

비선라인이 연결되어 소통했겠지만

변수가 너무 많은 계엄정국이었다.

안개정국 속에서 강력해진 신군부에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않고

어떻게 막후대권을 유지할까’ 많은 고심을 했을 것이다.

막후대권자가 어떤 정치현안에 대해 

확실한 방향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여러 당파의 사람들을 설득할 합의점을 도출해야 할때가 있다.

이때 이대호의 의중으로 결정하자고 제시한다.

<막후대권자는 야당과 운동권 세력,

신군부와 킹메이커 집단 경북고 세력,

모든 세력에게 이대호의 의중을 확인하고 

투쟁과 대응 수위를 정하자고 각각 제안한다.

각 세력은 자기들만 관찰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모든 세력이 이대호의 행보를 보고받는 것이다.

군 복무중 나로 인해 위기를 모면한 군부 전라도 인맥이 

호의적인 소문을 접했을테고

신군부로 인해 피해를 본 정승화 계엄사령관 친척이라니

야권과 운동권도 동의를 했을 것이다

킹메이커 집단인 경북고 출신이고

전두환의 아들인 전재국과 수업을 같이 듣는

연대 경영학과 동기(입학동기는 아니고 졸업동기인데 친구들이 나에게 다가와 

전재국의 개인사에 대해 가끔 나에게 애기해줘 친밀감은 갖고 있었다) 로써

중립적인 면이 있으니까 그 제안에 응했을 것이다>

 

이대호의 의중을 보고 합의점을 도출하기 위해 

이런 풍경이 세차례 정도 펼쳐졌다.

5월 초,

내가 수업을 마치고 건물을 빠져나오면 갑자기

한 학생이 삐라를 뿌리며 독재 타도를 외친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학생들이 나타나 오른 팔을 흔들며

운동권 가요를 부르는데 하필 내 주위로 몰리더군.

내가 중심권에서 빠져 나올려고 하면 시위대는 나를 둘러싸며

내가 가는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이날 나는 경제학과 윤석범교수의 강의를 막 듣고 나왔다.

윤교수는 프랑스 같이 민주화된 유럽 선진국의 예를 들면서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학생들이 봉기할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뿌리내린다라며 수업을 마치더군.

강의 말미에 부추겼던 선동을 듣고 

나는 동의할 수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교수님 같은 사회중진,엘리트 계층이 언론과 정치를 통해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야지,

왜 철없는 학생들이 피를 흘려야 되나

당신 가족들이 희생된다 해도 이렇게 부추길 수있겠는가” 

하는 거부감이 들었다)

 

잔디밭에 앉아 있던 사복경찰 두명이 한조가 되어

여기저기서 노래 부르는 학생들 한명씩을 양팔잡고 끌어가고 있는데 

별 저항없이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부드러운 체포와 끌려감이 연극같았다)

마침 잔디밭과 아스팔트로 이루어진 백양로에 

누가 갖다놓았는지 아담한 자갈들이 있었고 

학생들은 경찰들을 향해 모두 돌팔매질을 하더군.

나 혼자 멀뚱하니 서 있기도 뭐해 

나도 자갈을 몇 번 던져보았다.

그러다 스르륵 데모는 끝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캠퍼스는 조용해졌다

나의 의중이 1차로 파악됐고

사진도 찍었으니 더 이상 시간 끌 필요가 없었던 것.

이런 풍경이 한 3번 정도 벌어졌던 것같다.

군 전역 후, 1학년때 망친 학점을 회복하고자

향학열에 불타던 나는 군중을 벗어나

강의실 건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쏜살같이 뛰어서 군중을 벗어나면 비겁해 보이기도 하고 

바로 외곽을 둘러싼 경찰들에 체포될 것같아

울며겨자 먹기로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512, 

또한번 (연출된)시위때.

내가 하교 할려고 정문 쪽으로 가는데 또

갑자기 내 옆으로 모여든 시위대에 포위되고 말았다.

정문에는 상당한 전투경찰 병력이 

대기하고 있어 갈데가 없었다

뒤로 쫓기듯 둔덕 위로 이동하면서 몇몇이 돌을 던지기에

무심코 전투경찰을 향해 돌을 하나 던졌는데 경찰 발밑에 

툭 떨어지는데 전투경찰 수십명 중대원들이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고아무런 반격도 안 하고 멀뚱히 서 있는거였다.

갑자기 시위를 주도하던 건장한 청년이 나에게 다가와

우리는 비폭력 평화시위를 원하니 돌을 던지지 말라

나무라는 것이었다몇몇이 돌을 던지길래 따라 했는데 

마치 나만 던진 것처럼 또라이 취급을 받으니

이상한 느낌은 받았지만 연출된 상황이라는 것을 알리없었다.

곧 시위는 끝났고 나는 하숙집에도 못 가고 

중앙도서관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얼마후 도서관 직원이 큰소리로 소문을 전달했다.

대규모 경찰병력이 대학 구내에 진입해 곧 수색에 들어간다는 

소문이 있으니 모두 귀가하는게 좋겠다

몇몇 사람이 주섬주섬 가방을 싸기에

나도 가방을 꾸려 정문으로 가니 아까 내가 돌을 던진

그 전투경찰 부대원들이 문앞에 서서,

나가는 사람은 그냥 두고

들어가는 사람은 신분을 통제하고 있었다.

 

513, 

소문이 돌기를 어제 내가 도서관에서 

짐 싸들고 귀가한 후곧 정문이 닫혔고 

경찰들이 대학 구내를 쌓쌓이 뒤져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부터 

뒷산에서 밀어를 나누는 연인들까지 

대학생이란 대학생은 학교를 불문하고 몽땅 잡아들여 

죽지않을 정도로 두들겨 팼다는 것이다.

시위는 내가 했는데엉뚱하게 교내에 남아 있던 연인들이 

두들겨 맞았구나 하는 자각이 들면서 미안하더군.

내가 돌을 던지며 시위에 참여했다는 보고가 전달되며

신호탄이 되어 야당과 학생 운동권은 적극적으로 시위를 기획한다.

학내 시위에서 거리 시위로 발전시켜 나간다.

 

514

서울지역 27개 대학 총학생회는 가두 시위를 결의했고

이화여대 안팎에서와 연세대 밖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있었고 

모든 수업이 휴강된 나도 구경 차,

길거리로 나왔다가 죽을 뻔한 경험을 했다.

신촌 굴다리 근처에서 이화여대 정문 사이.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며 몸싸움을 하며 

밀고 밀리는 공방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만 빠져 나가고 싶은데 뒤에서 누군가 자꾸 밀면서

경찰 앞 1m 앞까지 밀려가게 되었다.

그동안 얌전히 어깨 싸움만 하던 전투경찰이

순간내눈 앞에서 방패와 곤봉으로 시위대를 찍어 내기 시작했다.

피가 사방으로 팍 튀며여자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피가 낭자한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학생들은 반대로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무력을 쓰는 이들이 없었고 

평화적 시위로 밀기만 하고 있었는데,

내가 경찰 1m 앞까지 군중에 의해 밀려가자 

마치 누군가의 신호에 의해

강경 진압이 시작된 느낌을 받아 소름이 돋더군.

동작이 날다람쥐처럼 빠른 나는 다친 데 없이 

무사히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515연세대의 교내 시위가 막혀서 그런지,

학생들은 광화문종로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서울역에 10만 여명의 학생과 시민이 운집해

가두 시위의 정점을 찍는다

모든 언론이 거리 시위를 대서특필하며 긍정적으로 보도했다.

이대호의 행보를 보고받은

언론을 주도하는 막후대권자의 협조가 없었으면 

515일 서울역 10만 시위대의 운집과 격렬한 시위는 

불가능하다고 본다이대호의 시위 참여가

막후대권자의 갈등전략에 신호탄을 쏴준 셈이다.

(한 예로 전광훈,손현보목사를 필두로 광화문과 여의도를 중심으로

전국을 달궜던 윤대통령 탄핵반대 집회도 막후대권자가

헌재를 협박해 탄핵 인용을 하자,

더 이상 투쟁하지않고소리없이 사그라지는 것을 보면

언론을 주도하는 대권자의 역할이 시위의 성공 여부를 좌우한다고 볼 수 있다.)

 

이대호의 행보가 각 세력에 전달되면서

학생시위가 강경 투쟁으로 전환될 것으로 

판단한 신군부도 철저한 대비 계획을 짰을 것이다.

막후대권자한 사람의 양다리 전략임을 알리없는

신군부와 야당,운동권은 최선을 다해 임할 수밖에 없다.

이날 서울역에서 시위대가 모는 버스에 

전경이 사망하는 사건이 생겼는데

블랙요원이 투입된 신군부의 자작극임을 

지금 나는 확신한다.

이 자작극 이후 언론은 시위의 과격성을 보도했고

여론은 신군부에게 유리해진다.

시위 학생 지도부도 그 유명한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다.

막후대권자의 갈등 전략이 성공한 셈이다.

 

517,

제주도까지 포함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무회의를 통과해 발표되었다.

518,

하숙집에서 1분 거리 연세대 정문으로 가보니 경찰은 사라지고

유도선수같이 거대한 체격의 특전사 병력이 탱크와 함께

총을 들고 서 있는데 휴교령이 내려졌음을 깨달았다.

계엄군의 위세에 눌려 서울을 비롯한 모든 도시에서 

시위는 서서히 사그러지고

오직 광주에서만 시위가 새로 촉발되었다.

 

병주고 약주는 막후대권자

대권을 유지할려면 갈등전략을 쓸 수밖에 없는 

막후대권자는 신군부가 정국의 주도권력을 잡아가자

야권인사와 운동권을 움직여 세력의 균형을 기했다.

설혹 시위대의 반격이 실패하더라도

군부의 새 대통령이 강경 진압으로 입을 

치명적인 약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장은 막후대권자가 숨을 죽이고 

부분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겠지만

때가 되면 이 약점을 활용해 

완전한 대권을 복원시킬 수있기 때문이다.

막후대권자의 원격조종으로

1983년 아웅산 테러 사건

1987 박종철,이한열 두 대학생의

사망 사건과 6.10 시민항쟁으로 

전두환대통령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고 

막후대권자는 완벽한 대권을 서서히 복원시켜 나간다.

 

민주화 운동인가폭동인가내전인가

87년 6.10시민항쟁에서 전 세계는 한국민의

저항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탈북자들이 남한사람들의 시민의식을 부러워 하는 간증을 들으며 

나또한 국뽕에 빠질 때가 있었다.

과연 그럴까.

북한 당국처럼미얀마 군부처럼 시민들을 학살했다면

우리나라도 3류 국가에 머물렀을 것이다.

80년 광주에서도 

시민(+불순분자)들의 무기고 탈취 후 내전 불사가 성공했다면

대한민국은 현 미얀마 내전 정국과 

다를 바없는 상황으로 흘러 갔을 것이다.

똑같은 최빈국유랑 민족이 될 수도 있었다.

신군부가 북한이나 미얀마 같은 수준의 강경진압을 했다면 

미얀마 군부와 똑같은 수준으로 평가받았겠지.

광주시민들도 차별 받았다는 이유로 무기고 탈취하고

내전으로 갔다면미얀마 반군과 다를 바없는 평가를 받았겠지.

북한미얀마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조정능력이 있는 언론과 세계를 움직이는 막후대권자의 

존재 때문이다.

이것이 하늘이 대한민국에 준 선물이다.

 

갈등전략은 쓰지만 궁극적인 망국을 원치않는 막후대권자

언론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막후대권자가 

갈등전략만 쓰고국민들도 강대강 대치만 했다면

대한민국도 지금 미얀마와 똑같은 지옥이 되지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신군부가 잘 했니,못했니 

광주 시민들이 잘 했니,못했니 

하는 것을 따지는 것도 아니다.

민주화 운동이냐폭동이냐 따지는 것도 무의미하다.

나라가 망하고 난뒤 호칭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광주 시민들이여.

당신들이 역사의 변혁기에 신군부의 일원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도넘은 시위에 강경 진압을 했고,

내전을 불사하고 무기를 탈취한 선량한 시민들(혹은 불순분자)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부하 군인들에게 무기를 버리고시민들에게 

무릎꿇고 사죄하라고 명령하겠는가?

시민들의 입맛에 맞게 신군부를 해체하겠는가?

아니면 나라의 안정을 위해 진압하라고 명령하겠는가?

 

동남아 국가들특히 미얀마보다 경제적으로 엄청 잘 살고

K-문화의 자부심으로 민족적 자긍심이 드높아진 대한민국 국민들이여.

우리는 절대 미얀마 내전 같은 식의 망국 사태는 

겪지않는다는 자부심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우리나라가 미얀마 같이 처참한 내전에 빠지지않았던

이유를 묻는다면 한국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같다.

우리 민족은 자유 민주주의를 사랑하고 저항정신이 강하고

K-culture 에서 보듯이 똑똑하고 지혜로운 민족이라

절대 미얀마 같은 3류 국가로 전락할 수없다고.....

미얀마 국민은 자유 민주주의를 사랑하지 않을까?

미얀마 국민은 저항정신이 없는가?

미얀마 국민은 지혜롭지 않는가?

미얀마 군부는 나라를 안정시켜 

국민들을 잘 살게 하고싶지 않았을까?

세계를 움직이는 막후대권이라는 하늘의 선물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도 다른 민족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본다.

1945년 이전까지 한민족 형제자매였던 북한을 보면

우리는 겸손해지지 않을 수없다.

전 세계 200여 국가 중에 가장 야만적이고 폐쇄적인 나라이며

국가라기 보다 거대한 수용소‘, ’이단 사이비공동체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는 나라가 우리의 형제국이다.

1.북한보다 국민소득이 낮으나 덜 폐쇄적인 아프리카 후진국,

2.내전 중이나자유가 있는 양곤 시내에 지금도 관광객이 왕래하는 미얀마,

3.족벌세력이 국가의 땅과 부를 대부분 차지해

빈부격차가 극심한 동남아 몇몇 국가들.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이민가서 

살고싶지않은 나라가 북한일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북한과 다른 나라라고

애써 외면하고 싶겠지만

얼마 전까지 우리와 풍습이 같고,

같은 언어로같은 임금을 모시고,

같은 땅에서 살던 친척 국가 아닌가?

남한 사람만 미얀마 사람보다 우등 민족이고,

북한 사람은 원래 열등 민족이었다고 주장할 수있겠는가?

 

영적으로 보면,

원죄는 이대호에게 있다.

만약 내가 시위를 극도로 혐오해 

때마다 잽싸게 강의실로 도피했더라면

전국 대학생 시위가 동력을 받지 않게되고,

야당 인사도 승산이 없음을 느껴

광주사태는 일어나지 않게되고,

순리에 의해 막후대권자와 원로들이 신군부를 견제해

대한민국은 갈등과 상처가 없는

더 살기좋은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다른 민족과 차별화되는 

우등 민족으로 자부해도 좋았을 것이다.

지혜로운 견제에 실패한다면 

전두환 세습왕조가 탄생할 수도 있었겠지만,

어차피 킹메이커 집단은 따로 있었고

막후대권자가 비밀리에 대권을 유지할려고

온갖 기획조정을 하는한

그럴 염려는 없다고 본다.

 

결론==막후대권자가 나를 이용했던

갈등전략은 비난 받아야겠지만,

그 존재로 인해 미얀마 내전 같은 상태로 가진 않았기에

하늘이 대한민국에게 준 선물이기도 하다.

이글은 이대호의 부끄러운 참회록 2편이다.

동시에 이대호의 의도를 왜곡해 가면서 

막후대권자의 욕심을 채우는 공작(工作)을 

그만 했으면 하는 경고문이기도 하다

그런 취지에서 쓴글이 58번째글(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대권자와 이대호 간의 치밀한 두뇌게임)이었는데

이대호를 이용해 학생시위를 강경투쟁으로 

발화시킨 이번 사례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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