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 저격을 불러온 나의 실수/ /유신의 심장을 쏘고 민주화의 단초를 제공한 막후대권자
박정희대통령 시해를 불러온 이대호의 실수/
/유신의 심장을 쏘고 민주화의 단초를 제공한 막후대권자
<이글은 2025년3월16일 이대호블로그 (http://blog.naver.com/daeho7103)
이대호다음블로그(https://daehod.tistory.com/),
(조선일보2025.03.16.노석조 기자) 박정희의 목숨 건 핵 도전을 다시 생각한다.우크라이나 사태로 ‘자강론’이 다시 부상하고 있습니다. 비핵보유국 사이에선 ‘핵 안보론’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핵무장에 대해서 진지하게 검토해보자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한국입니다. 바로 머리 위에 대남 타격용 전술핵 탄도미사일을 보유한 북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만큼은 핵개발을 할 명분이 있습니다. 핵개발과 관련해 ‘한국 예외주의’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실제로 핵개발을 했던 나라이기도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지 않았다면 1980년 초 핵개발을 완성했을지도 모릅니다.
(한겨레2025.03.16.김원철기자,박민희기자)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가 지난 1월초 한국을 ‘민감국가 및 기타 지정국가 목록'(Sensitive and Other Designated Countries List·SCL)에 올린 것으로 확인되면서 그 의도와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워싱턴 선언’을 통해 핵 확장억제를 위한 협력을 다지는 등 한미 간 신뢰가 업그레이드됐던 시기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미국 내 전문가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핵무장론과 계엄 선포’를 이 결정의 배경으로 꼽으면서 ‘한국에 모욕적인 조치’라고 평가했다.
====남한이 핵을 가진다면 남북통일 대통령이
먼저 확정되어야 하고, 핵을 가진 척하는 북한을
흡수통일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한다.
북한에게 “너 소유하고 있는 걸로 해”하고
세계언론을 통해 기정사실화 시키니, 핵이 있는 걸로
연출하고 있을 뿐이다, 고 70번째 글에서 얘기했다.
그러면 세계정부를 움직일 수 있었던 막후대권자들은
왜 대한민국에 불리한 보도를 시정하지 않을까?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의 50~60배 수준이고, 무역 규모는 800배 정도 차이 난다는데
언론을 통해 ‘남한은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고 북한은 없다’고 기정사실화 시켜보자.
남한 대통령은 국민들로부터 ‘경제력이나 군사력이나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데
왜 빨리 통일 안하냐’며 시달릴 때 실천에 옮기지 않을 명분이 없다.
그러면 막후대권자는 누구를 남북통일 대통령(정도령)으로 옹립할 것인가.
옹립할 시기와 적당한 인물이 나타날 때까지 북한의 핵과
남한의 경제력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 관망하기에 유리할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감기바이러스보다 못한 실체로 인식되기도 하고
언론을 통해 “수백만명의 인명을 앗아가는 괴질”로 과대포장 될수도 있다.
핵도 실체가 없는, 고성능 폭탄 대량투하 일수도 있고,
설혹 진짜 핵폭탄이 있다해도
언론조작으로 세뇌시키는 패닉보다는 못할 것이다.
‘계시는 점진적으로 상호보완된다’고 주장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부족한 내 글을 업데이트할 때가 된 것 같다.
(제18차 하늘경고문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세계정부 세력으로부터
한민족의 이익을 지키려고 버텨 온 민족주의자라고 봐야한다.
독자적으로 핵을 보유해 보려고 발버둥치다 미운 털이 박혀 암살 당했다.
===윗글은 소설에 불과한 엉터리였다.
오늘은 부족한 내 옛글을 업데이트하면서
부끄러운 참회록을 쓰고자한다.
박정희 대통령을 죽인 자는 이대호다.
의도치않은 실수로 인해 박대통령의 시해를 불러왔다.
1976년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나는 인기학과를
택하라는 부모의 권유와 대세에 휩쓸려 과를 택했지만
적성에 맞지않아 대학 생활이 즐겁지 않았다.
1학년 마치고 빨리 군대로 도피하고싶어
지원병 제도를 이용하기로 했다.
마침 위생병 학원을 수료하면 시기를 당길 수있는
제도가 있어 좀 일찍 의무병으로 입대해 버렸다.
당시 모친의 친척인 정승화 1군 사령관이 있었다.
(누나,매형쪽으로 박정희대통령 친척이 연결된다는 얘기는
극비라고 해서 크게 염두에 두지않았다)
고모부가 육사8기, 작은 아버지가 육사 13기 출신인데다
현역 군인인 친척들이 많아서 면제나 보충역(방위병)으로
빼주겠다는 것을 굳이 사양한 것은
“공부하기 싫은 놈은 군대가서 고생 좀 해 봐야한다”는
내 나름의 지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평군의 제3야전수송교육대에서 파견된 000중대라는
작은 단위 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1979년 2월 어느날 뉴스를 통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임명 소식을 들었다.
그때 나는 일병이었다.
내가 군 요직에 있는 위관급 장교라면 관심가겠지만,
남들이 선호할만한 부대도 아닌데서 근무하면서
친척이라고 떠벌리고 다닐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친하게 지내던 경상도 출신 중사 한사람이
넌지시 내 고향을 물으면서 정총장의 고향을 화제로 삼았고
‘고향이 같네’하면서 유도질문을 하더군.
아는 척 묻는데 일부러 숨기기도 뭐해서
친척들 중에 육사 출신이 좀 있다고했고 모친 쪽의
“정승화 참모총장도 아주 가까운 친척은 아니다”고 했다.
뭔가 정보를 듣고 유도질문을 했겠지만
그 다음날부터 중대장 이하 간부들이
씩 웃으며 화제거리로 삼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미 박정희대통령의 비선라인이
몇몇 세력에게 지시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정참모총장 인사발령과 함께 곧이어
견제 세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 인사발령이 있었다)
어느 세력이 나를 포섭하느냐가
‘득세하느냐 마느냐’ 하는
조직의 명운이 걸린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왜 이대호가 필요했을까?
박대통령도 인간인지라 김일성처럼 당연히
영구집권해 자식들에게 왕좌를 넘기고 싶었겠지.
박정희의 영구집권, 후계자 책봉문제에
우리집 가계(家系)가 필요했던 것같다.
정참모총장이 성격도 온순하고 야심도 크지않아
과도기에 ‘얼굴마담 대통령’으로
삼기에 적절하다고 본 것같다.
킹메이커 집단으로 쓰고싶은 경북고 출신이 필요한데
경북고 출신 이대호도 필요했을 것이다.
고향도 구미와 가까운 김천,대구에다가
친척 중에 군 출신도 많았다.
단 비선으로 연결해야지 소문나면 곤란한 공작이다.
대통령의 비선 라인이 과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대호가 떠벌리고 다녀야 했다.
그런데 정승화까지만 얘기하고 박정희 얘기를
안하니 공작에 들어갔던 것이 ‘중대원 구타사건’이었다.
어느날 점호 시간.
전라도 출신 중사가 당직 사관이었다.
별거 아닌 일로 대노하더니
나랑 동기인 전라도 출신 일병을
불러내 전 중대원 앞에서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엉덩이에 피가 날 정도로
빠따를 때리는 경우가 흔했고
병사들의 인권이란게 거의 없었다.
초급간부 중사들과 나는 두루 친했다.
위생병인 나는 행정병들과 파견중대 행정실에서
하사관 초급간부들과 늘 장난치며
친하게 지냈기에 군기가 세지않았다.
그러나 운전,정비병인 다른 병사들은 군기가 세
대충 빠져 나갈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기라성같은 병장들도 벌벌 떨고있었다.
할수없이 내가 의협심을 발동해 일병 주제에
앞으로 나서 중사 팔을 잡고 말렸다.
의외로 쉽게 구타를 멈추고 점호를 끝내더군.
그 다음날은 경상도 출신 중사가
당직 사관으로 점호에 임했다.
제대 1주일 남긴 경상도 출신 말년병장과
말장난을 하다가 갑자기 화를 내더니
병장을 불러내 주먹으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말년병장은 웃으면서 ‘왜 이러십니까“하고
스스로 말리는 행동을 취했다.
중사는 더 열받은 듯 본격적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이때 내가 어제처럼 나서야 하는데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어제 사건 이후 동료,고참들 표정이
나에 대한 감사의 호의보다
피하는 느낌을 받았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맞는 사람이 제대 1주일 남긴 병장이라
내가 나서기엔 너무 건방질 것같았다.
그 중사가 처음에는 장난처럼 때리다가
내가 나서지 않아선지
점점 강도를 높여가며 때리는데
시간을 끌다보니 타이밍도 놓쳤다.
뭔가 내가 개입하면 함정이 있을 것같은
엉뚱한 생각도 났고, 병장의 희생은 안타깝지만
내 인생에 얽혀있는 수수께끼를 풀고싶은
호기심이 생기면서 내가 개입 안하면
어떻게 흘러가나 보고싶었다.
이것이 나의 비겁한 실수였다.
너무 오래동안 구타당한 그 병장은 결국
다음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다음날 나와 친했던 행정병 상병이
사소한 일로 내 뺨을 때렸는데 평소에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제 내가 나서지않아 심하게 맞은
고참 병장 때문에 중대원들은 슬펐고,
책임은 물을수 없지만
나에 대한 원망이 서려 있음을 느꼈다.
그날 밤 준위가 당직 사관으로 와서
중대원들 기분을 풀어준다며
막걸리 파티를 열어 주었다.
막걸리를 먹으며 침울했던 마음을 달랬다.
그날 따라 술 파티를 해서인지
경계근무(보초)를 서는 사람에게
실탄이 아닌 훈련탄이 지급된다고 고지하면서
당직 사관은 훈련탄도 1미터 안에서 맞으면
살상효과가 있다면서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그날 나는 외곽 초소 경계근무자로 배정돼
밤11시경 초소로 올라가 교대했다.
1979년 4월.
그 날따라 가랑비는 처량하게 내리고
외곽 초소에는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뭔가 나를 향해 거대한 음모가 진행되는 것은
느꼈는데 뭔가 알수는 없었다.
내가 박정희대통령의 아들이라면
바로 핫라인이 가동되겠지만
거대한 군부 조직 내에서
평범한 집안의 일개 일병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술도 마시고 울적한 기분 탓이었는지,
하늘이 나를 살리려고 해서인지,
훈련탄을 테스트해 보고싶어
하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 보았다.
총소리가 나자 밑에서 고참들이
욕을 하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막걸리 파티하고 내무반에서 잠자고 있어야 할
고참들이 왜 외곽초소 밑에 모여 있었을까.
총소리가 나자, 1분도 안되어 초소로 들이닥쳤다)
겁이 났던 나는 총구를 목에 대고
또 한번 방아쇠를 당겼다.
탄력있는 물체가 힘없이 쓰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고참들이 초소 위로 올라왔다.
“목에서 피가 흐른다”라고 외치면서 그들은
나를 들쳐업고 59후송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나는 ’내가 연극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함정에서 벗어났다는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영적으로 편안한 느낌을 받으며
나는 내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와
전우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얼마 후에 하얀 시트 위에 누운 나는 눈을 지그시 떴다가
높은 계급의 군의관이 우리 부대 당직사관과 함께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어떻게 된건가?”
“네, 오늘 지급된 실탄은 마침 훈련탄이어서
약간의 출혈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어느 부대 소속인가”
“000부대 의무병인데 보초 서던 중 자살 시도한 것 같습니다”
군의관은 의무병이란 말에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의무병을 보초 세우는 법이 어디 있냐”고 호통쳤다.
화를 내는 군의관 앞에서 당직사관은 쩔쩔 매면서
솔직하게 부대 사정을 설명하기보다
엉뚱한 변명을 늘어놓는 바람에 군의관의 불신은 더 커졌다.
사단 규모도 아니고 소규모 파견 중대에서는
행정병이던 의무병이던 열외없이
보초 근무를 쓸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
하지만 병원에서 근무하는 군의관 입장에서는
실정을 모르다보니 의무병에 대한 갈굼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이런 점이 사건 후 헌병대와 보안사의 조사에서
결정적으로 나에게 유리한 환경이 되었다.
‘자살할 만한 이유가 없는 병사’라는
주위의 진술을 듣고서 나를 취조했다.
그들은 내가 고참병들한테 필경
많은 괴로움을 당했기 때문일거라는
가정을 세워놓고 그쪽으로 진술을 유도했다.
대학1학년때(중앙정보부의 보이지않는 공작으로)
늘 스트레스를 받아 내 성격이 우울형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적이 있어 그점을 주장했다.
“울적해서 장난치다가 실수했다”고 주장했고
중대원의 신상에 위협이 될만한 진술은 하지않았다.
연세대 출신 군의관들의 극진한 호의가 이어졌고
참모총장의 친척으로 알고있던 모친이 면회 오니
우리 부대 간부들의 분위기도 나에 대해
설설 기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나는 의사였던 매형의 로비로 고향 대구에 있는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어 6개월 푹 쉬고 원대복귀했다.
경영학과가 싫었던 나는 병원에서 빨리 의병제대하고
재수하더라도 다른 대학, 다른 학과에
진학하기를 원했다.
깊은 정치적 흐름을 알리없는 가족들은
나중에 대기업에 취업할려면
정상적인 제대를 해야한다며 의병제대를 반대했다.
이때 내가 일찍 제대해서 귀가했더라면
박정희 시해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박정희의 비선라인인
첫 막후대권자는 큰 고민에 빠진다.
내가 다시 원래 부대로 돌아가면 여러 군 인맥
사이의 파워게임에서 버텨낼 수 없다는 점을
혼자만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승화를 1인자로 내세워 이대호를 살리느냐
*박정희를 살리고 이대호를 포기하느냐
이대호만 포섭하면 막후대권자는
앞으로도 기회는 잡을 수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자로 한계에 이르렀고
(부마사태로 코너에 몰려 있었다)
지금 사라지면 ‘영원히 존경받는 국부’로
남을 수있기에 그점을 감안했을 것이다.
둘 중에 한명을 택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이대호를 택했던 것이다.
미국 CIA(세계정부 세력)를 움직여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꼬드기고
차지철 경호실장을 부추겨 김재규를 격분케 해
정확한 날짜에 시해를 당하게 했던 것이다.
나는 첫 막후대권자에게 큰 빚을 졌다.
내가 ‘박정희 시해의 원흉’이라고 자책하고싶다.
본인이 원치않으면 막후대권자 이름도 밝히고 싶지않다.
“이대호가 뭐라고 박정희를 희생해서 살렸나”
1979년10월26일.
나는 대구통합병원을 떠나 3일안에
원대복귀하기 위해 일단 집으로 왔다.
그날 10.26 사건이 일어나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임명되었다.
자대에 돌아간 나는 계엄사령관 소문 때문에
중대장으로부터 파격적인 열외를 인정받았다.
파견 중대로 가지않고, 따돌림이 생길 수도 없는
편안한 본부 의무실에 배치받았다.
내무반 생활도 않고 의무실에서 자며
새로 부임한 군의관의 적극적인 보호 아래
편안한 말년병장을 보내고 전역했다.
내가 6개월 일찍 통합병원에서
전역했더라면 박정희대통령은 시해되지 않고
유신체제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후계자는 정승화,전두환 양대 세력을 거쳐
박정희의 자제분들 3남매에게도
기회가 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대호의 실수를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지’ 복잡한 심경이다.
12.12 하극상 쿠데타로 정 계엄사령관이 실각했지만
부대 내에서 군의관이라는 든든한 기둥이 있었고
말년병장이 된 나에게 해꼬지할 사람은 없었다.
보안사 요원이 나에 대해 공작을 좀 하긴 했지만
하늘의 도움으로 때마다 잘 피했다.
내가 아예 군 면제를 택해, 군부와의 인연이 없었다면
거대한 변혁, 10.26사태/12.12쿠데타/5.18민주화 운동은
없었을 것이고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북한처럼 박정희왕조가 되어 세습제가 된다 하더라도
박정희대통령이 진정한 의미의 정도령(메시아,재림예수)이라면
대한민국은 만족했을 것이다.
1980년3월.
제대후 연세대에 복학했을 때는 전두환의 보안사 세력도 있지만
킹메이커 집단인 경북고 세력도 있고,
내가 다니던 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 세력도 있어
삼각형 권력 견제구도가 형성되었다.
나와 막후대권자는 새로운 차원에서 맞닥뜨리게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