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길 위에 김대중」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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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길 위에 김대중」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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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길 위에 김대중」을 봤다. 대구는 상영관도 적고 상영 횟수도 많지 않았다. 내가 입장했을 때는 관객이 세 명뿐이었는데, 상영시간이 임박하자 예닐곱 명이 더 들어와서 겨우 두 자리 수가 되었다.


영화는 인간 김대중의 성장기부터 시작해서 정치인 김대중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숨 가쁘게 보여준다. 영화의 상당 부분이 오래된 필름과 녹음상태가 좋지 않은 육성 증언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고, 오히려 엄청난 흡인력을 지녔다. 
나는 2시간여의 상영시간 내내 숨을 크게 쉴 수 없었고 몸도 꼼짝하지 못한 채 영화에 빨려들어갔다. 김대중이라는 인물의 아우라와, 그가 살았던 시기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변화무쌍했던 시절이어서 그런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성공한 사업가에서 정치 초년생으로 변신한 김대중은 세 번의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하지만,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장면의 발탁으로 민주당 대변인이 된다. 원외임에도 불구하고 현역 의원들보다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한 김대중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국익을 위해서는 여당에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같은 당 내에서도 비판을 받는 실용주의자였다.


1970년, 김영삼・이철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정치 개혁 바람을 일으킨 김대중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되어 박정희와 맞붙지만 아깝게 패하고 만다. 이후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 된 그는 두 번의 살해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고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이 하지만, 전두환과 신군부의 등장으로 다시 사형을 선고받고 5.18의 비극이 벌어진다. 영화에 의하면, 당시 강원용 목사가 전두환을 만나서 협상하고 미국이 영향력을 발휘한 끝에 김대중은 사형 집행을 면하고 신병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1985년 겨울, 다시 귀국하기까지 김대중은 대한민국에서 금기의 이름이었다. DJ라는 영문 이니셜만으로 그를 호칭할 수 있었다. 암살당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미국의 정치인과 유력인사가 대거 동행한 그의 귀국은 언론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고 귀 밝은 몇몇 이들에게 소문으로만 전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국 당일 김포공항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서 당시 전두환 정권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귀국 후 김영삼과 손을 잡고 ‘민추협’을 결성한 김대중은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6월 항쟁이 이어지고 6.29선언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내는데…….


영화는 16년 만에 광주를 찾은 김대중이 5.18묘역에서 통곡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후속편을 예고하면서 끝난다.
나는 1979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해 10월 박정희가 죽었고 이듬해 봄 5.18이 일어났다. 그 무렵 나는 학교가 끝나면 문학청년들이 주로 모이던 대구의 심지다방으로 출근했는데, 구석자리에서 선배들이 광주, 데모, 학살 등의 단어를 입에 올리며 수군거리는 걸 귀동냥했다. 그리고 며칠 뒤 동성로에서 대구역까지, 수십 명의 청년들이 스크럼을 짠 채 구호를 외치며 뛰어가는 걸 목격했다.


1985년 겨울, 나는 서울의 사회과학출판사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의 사회과학출판사는 이른바 ‘불온서적’을 주로 출판하는 곳이었다. 내 손으로 『체 게라바 평전』과 『가다피 평전』을 편집했다. 그런 책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사장과 편집장이 동시에, 영장 없이 끌려가도 아무렇지 않던 시대였다. 한국외대 운동권 출신이었던 사장과 편집장에게 ‘DJ의 귀국’을 전해 들었다. 마침 내가 살던 곳에서 DJ의 동교동 자택이 멀지 않아서 그 주변에 가보았는데, 사복 입은 사내들이 여러 겹으로 에워싸고 있어서 담벼락도 구경할 수 없었다.  


1987년 6월, 나는 날마다 서울시청 부근으로 나가서 거리 시위에 동참했다. 마침내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을 때는 얼마나 벅찼던지! 그러나 얼마 뒤 민주화 세력의 분열, 정확히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단일화 실패를 목격하고 얼마나 실망하고 분노했는지……. 그때의 단일화 실패는 이후 대한민국 정치계에 엄청난 변화의 단초를 제공했다.


역대 대통령 중에, 솔직히 대통령으로 인정할 만한 분이 몇 되지도 않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 김대중 대통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년을 떠올리면 너무나 안타깝다. 물론 단일화 실패가 전적으로 김대중 때문만은 아니지만, 적어도 50%의 책임은 있는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무의미하다지만, 만약 그때 김대중이 김영삼에게 양보를 했다면, 그래서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화 세력이 단일 후보를 내세웠다면, 선거에서 승리했을 것이다. 그러면 이 땅의 민주화는 더욱 빨리 시작되었을 것이고, 지금의 정치계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을까. 아마도 3당 합당은 없었을 것이고, 대구 경북은 어떨지 몰라도 부산 경남은 지금만큼 보수화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이후의 대통령 선거도 한두 번은 결과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실패도 한다. 그러한 실수와 실패를 딛고 더 나은 자리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이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이리라. 그런 점에서 무수한 고난을 이겨내고 끝내 우뚝 서버린 김대중을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으랴!
1997년 봄, 나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마련하기 위해 뉴질랜드로 떠났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모든 걸 정리하고 지인들과 송별파티도 거창하게 열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나는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김대중에게 투표하기 위해! 


*뱀다리: 내가 관람한 영화관의 경우, 건물 외부와 내부에 「길 위에 김대중」 포스터가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다른 영화는 포스터가 여러 장 붙어 있었다. 여기가 대구라는 걸 실감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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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Comments
sarnia 01.19 11:12  
길위에 김대중이 토론토, 밴쿠버에만 들어온 것 같아요.
한국에서 개봉하기도 전에 DJ 탄생 100 주년 기념일인 1 월 6 일 영어자막이 들어간 버전으로 상영했다는데 무료였다고 하는군요.
처음에 영화제목을 보고 왜 길위의 김대중이 아니고 길위에 김대중인가, 오자인가 싶었는데 그냥 제목을 그렇게 지었더군요.

1987 년 저는 비판적지지..
DJ에게 투표했어요.
내가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대통령선거투표였지요.
부산 군부대였는데 부대장(단장)이 괜찮은 사람이어서 별말이 없었어요.
다만 부대장이 내게 이런 말을 했던 게 기억나네요.
“야, 너는 XX도놈도 아니면서 왜 김대중을 찍냐”

1985 년 2 월 DJ 귀국했을때는 김포공항에 나갔었습니다.
2.12 총선 직전이었을 거예요.
인파에 막혀 (경찰이 막았던 기억은 없고) 공항 근처에서 되돌아와야 했지요.
그때 DJ를 보호하려고 미국 하원의원과 진직 관료, 학계인사 등 20 여 명이 동행했다는 보도가 있었고, 한국전쟁 전문가 브루스 커밍스 교수도 일행 중 한 명이었다는 소리는 나중에 들었지요.

블럭은 좀 떨어져 있었지만 나하고는 같은 동네 (동교동) 살았던 옛 동네아저씨이기도 하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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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국힘 그 새X들이 명신씨 백담사보내면 쪽팔려서 어떡하나..
Vagabond 01.19 12:08  
[@sarnia] 댓글 기조를 바꿔야 합니다
입 틀어막혀 들려나가고 싶으세요?
ㅋㅋㅋ
필리핀 01.20 05:16  
[@sarnia] 저도 궁금했는데, "늘 길 위에 있었다"고 '길 위의'가 아니라 '길 위에'로 했답니다.

저는 단일화 실패에 실망해서 민중후보 백기완에게 표를...

오! 그때 김포공항에 나가셨군요.
저도 가고 싶었는데 근무 중이라서...ㅠㅠ

저는 동교동 자택 길 건너 신촌교회 부근에 살았어요.
당선되던 날에는 한밤중에 일산 자택까지 갔었죠.
수많은 지지자들이 집 근처에 모여 있더군요.

명신씨가 백담사 갈지, 똥훈이가 짤릴지 두고봅시다.

아래 사진은 제가 1986년에 편집한 책입니다.
표지도 제가 디자인했어요^^

933508c8 01.19 19:31  
옛날 영화 KT (killing target) 보셨나요? 한일 합작인지..아님 일본영화인데 한국 배우가 출연한건지는 모르겠는데, DJ의 도쿄 납치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말 당시 DJ는 달라이라마 급으로 암살 위험을 피해 소수의 사람들만 위치를 알 정도로 숨어서 지냈죠. 이 영화도 안보셨으면 한번 보세요,.
필리핀 01.20 05:17  
[@933508c8] 좋은 영화 소개해주셔서 감사힙니다^^
울산울주 01.20 01:17  
나는 경상도 사람들의
두뇌를 열어보고 싶어요.
윤쌍렬 지지하는 35%가 거의 영남이니까.
한국 현대사의 미스터리임.
필리핀 01.20 05:18  
[@울산울주] "우리가 남이가?"
"못 먹는 밥에는 재뿌린다!"
이런 심리예요.
이런 걸 '꼰조'라고 하죠
꼰대들의 곤조.
정안군 01.20 12:50  
[@울산울주] 바로 미스터리 한 분이 등장하셨네요. ㅎ
이베로 01.21 02:32  
87년 그 당시 YS를 찍었지만, 역대 최고 대통령은 DJ라는 것에 대해 절대 찬성합니다. 87년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 수 있지만, 그때 YS나 DJ를 찍은 누구도 노태우가 될거라는 생각은 아무도 안했을 겁니다. 주위 누구도 노태우 찍겠다는 사람 본 적 없으니. 다들 YS냐 DJ냐에 대한 논박만 있었는데....

노태우 당선 확정되고나서 주위에 상상도 못했던 인간들이 노태우 찍었다고 커밍아웃하는거 보고 경악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그날 그 비통했던 기억이 글을 보고 기억이 소환됩니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그래서 DJ가 나중에 더 많이 인정받고 지금의 기틀을 닦을 기회를 잡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YS가 IMF때문에 너무 폄하받는 것도 아쉽습니다.  이 나라의 진정한 민주주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 YS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도 트럼프가 다시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높아진 걸 보면, 뭐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겠지요~

MJI를 저주하고 살고 있는 요즘입니다. 노무현이 그렇게 가는 걸 보고도... 도대체 뭘 한건지...
필리핀 01.21 07:28  
[@이베로] 정치라는 게, 잘은 모르지만,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은 바로는, 정의나 진리와는 거리가 먼 거 같아요.
특히 자본주의 사회일수록 인간의 욕망과 욕심을 좇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대통령의 통치 행위는, 당대의 평가와 후대의 평가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으니 두고봐야죠.
대통령이라고 제멋대로 해버리면 그게 바로 독재니까 어쩌지 못하는 부분도 있고요.
판석 01.21 11:37  
태사랑도 북한에 가서 살아야할
나사 두개 빠진 사람들 득실하다고 봅니다.
이베로 01.22 02:06  
[@판석] 여행, 특히 해외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사고 방식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여행자 커뮤니티인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성향을 나름 규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방향은 같아도 방법론이 달라 논쟁이 있을지언정. 그런데 이렇게 노골적인 글을 적을 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알게 되는 곳이 태사랑이다. 이제 많이 낡았지만, 그래도 아직 죽지는 않았구나, 태사랑.
울산울주 01.22 03:16  
[@판석] 북한 여행은 가보고 싶네요
거기서 사는 것은 싫어
셀로판시티 01.21 18:17  
진성 창녀가 벌렁거릴때는
남편 말고 기둥서방 좆대가리볼때.
그리고 디올백 볼때만 벌렁거림. 미친년처럼
Alaskaak 01.22 09:32  
태사랑이 이렇게 열심으로 마음에 있는 것을 예기하는 것이 보기좋읍니다. 파이팅..........
물에깃든달 01.23 09:37  
저는 한창 촛불시위 할 당시 서울시청역으로 출퇴근하면서 서있는 의경들, 바뀌는 조경들(모이기 어렵게 도보 중앙즘에 나무심기? 큰 화분 가져다놓기 등)을 보면서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땐 저도 무서워서 저기 나도 참가하면 정말 큰일 나는줄 알았어요. 일단 법으로 금지하니까.. 그 법이 좀 이상하다는걸 그 이후에 알았죠..
필리핀 01.23 09:52  
[@물에깃든달] 6월항쟁 때는 직격탄이 대포알처럼 날아다녔어요!
그 때문에 결국 이한열이...ㅠㅠ
Lyki 02.01 16:09  
좋은 내용에 정치병자 미친것들이 또 나대는 댓글 하 ㅋㅋㅋ
진짜 저런애들이랑 같은 한표라는것에 한숨만 나오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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