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길 위에 김대중」을 봤다.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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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9 09:56
영화 「길 위에 김대중」을 봤다. 대구는 상영관도 적고 상영 횟수도 많지 않았다. 내가 입장했을 때는 관객이 세 명뿐이었는데, 상영시간이 임박하자 예닐곱 명이 더 들어와서 겨우 두 자리 수가 되었다.
영화는 인간 김대중의 성장기부터 시작해서 정치인 김대중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숨 가쁘게 보여준다. 영화의 상당 부분이 오래된 필름과 녹음상태가 좋지 않은 육성 증언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고, 오히려 엄청난 흡인력을 지녔다.
나는 2시간여의 상영시간 내내 숨을 크게 쉴 수 없었고 몸도 꼼짝하지 못한 채 영화에 빨려들어갔다. 김대중이라는 인물의 아우라와, 그가 살았던 시기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변화무쌍했던 시절이어서 그런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성공한 사업가에서 정치 초년생으로 변신한 김대중은 세 번의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하지만,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장면의 발탁으로 민주당 대변인이 된다. 원외임에도 불구하고 현역 의원들보다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한 김대중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국익을 위해서는 여당에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같은 당 내에서도 비판을 받는 실용주의자였다.
1970년, 김영삼・이철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정치 개혁 바람을 일으킨 김대중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되어 박정희와 맞붙지만 아깝게 패하고 만다. 이후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 된 그는 두 번의 살해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고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이 하지만, 전두환과 신군부의 등장으로 다시 사형을 선고받고 5.18의 비극이 벌어진다. 영화에 의하면, 당시 강원용 목사가 전두환을 만나서 협상하고 미국이 영향력을 발휘한 끝에 김대중은 사형 집행을 면하고 신병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1985년 겨울, 다시 귀국하기까지 김대중은 대한민국에서 금기의 이름이었다. DJ라는 영문 이니셜만으로 그를 호칭할 수 있었다. 암살당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미국의 정치인과 유력인사가 대거 동행한 그의 귀국은 언론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고 귀 밝은 몇몇 이들에게 소문으로만 전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국 당일 김포공항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서 당시 전두환 정권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귀국 후 김영삼과 손을 잡고 ‘민추협’을 결성한 김대중은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6월 항쟁이 이어지고 6.29선언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내는데…….
영화는 16년 만에 광주를 찾은 김대중이 5.18묘역에서 통곡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후속편을 예고하면서 끝난다.
나는 1979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해 10월 박정희가 죽었고 이듬해 봄 5.18이 일어났다. 그 무렵 나는 학교가 끝나면 문학청년들이 주로 모이던 대구의 심지다방으로 출근했는데, 구석자리에서 선배들이 광주, 데모, 학살 등의 단어를 입에 올리며 수군거리는 걸 귀동냥했다. 그리고 며칠 뒤 동성로에서 대구역까지, 수십 명의 청년들이 스크럼을 짠 채 구호를 외치며 뛰어가는 걸 목격했다.
1985년 겨울, 나는 서울의 사회과학출판사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의 사회과학출판사는 이른바 ‘불온서적’을 주로 출판하는 곳이었다. 내 손으로 『체 게라바 평전』과 『가다피 평전』을 편집했다. 그런 책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사장과 편집장이 동시에, 영장 없이 끌려가도 아무렇지 않던 시대였다. 한국외대 운동권 출신이었던 사장과 편집장에게 ‘DJ의 귀국’을 전해 들었다. 마침 내가 살던 곳에서 DJ의 동교동 자택이 멀지 않아서 그 주변에 가보았는데, 사복 입은 사내들이 여러 겹으로 에워싸고 있어서 담벼락도 구경할 수 없었다.
1987년 6월, 나는 날마다 서울시청 부근으로 나가서 거리 시위에 동참했다. 마침내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을 때는 얼마나 벅찼던지! 그러나 얼마 뒤 민주화 세력의 분열, 정확히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단일화 실패를 목격하고 얼마나 실망하고 분노했는지……. 그때의 단일화 실패는 이후 대한민국 정치계에 엄청난 변화의 단초를 제공했다.
역대 대통령 중에, 솔직히 대통령으로 인정할 만한 분이 몇 되지도 않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 김대중 대통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년을 떠올리면 너무나 안타깝다. 물론 단일화 실패가 전적으로 김대중 때문만은 아니지만, 적어도 50%의 책임은 있는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무의미하다지만, 만약 그때 김대중이 김영삼에게 양보를 했다면, 그래서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화 세력이 단일 후보를 내세웠다면, 선거에서 승리했을 것이다. 그러면 이 땅의 민주화는 더욱 빨리 시작되었을 것이고, 지금의 정치계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을까. 아마도 3당 합당은 없었을 것이고, 대구 경북은 어떨지 몰라도 부산 경남은 지금만큼 보수화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이후의 대통령 선거도 한두 번은 결과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실패도 한다. 그러한 실수와 실패를 딛고 더 나은 자리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이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이리라. 그런 점에서 무수한 고난을 이겨내고 끝내 우뚝 서버린 김대중을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으랴!
1997년 봄, 나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마련하기 위해 뉴질랜드로 떠났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모든 걸 정리하고 지인들과 송별파티도 거창하게 열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나는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김대중에게 투표하기 위해!
*뱀다리: 내가 관람한 영화관의 경우, 건물 외부와 내부에 「길 위에 김대중」 포스터가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다른 영화는 포스터가 여러 장 붙어 있었다. 여기가 대구라는 걸 실감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