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국의 관광가이드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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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국의 관광가이드였다 3.

겨울나그네 13 1959

방콕에서 한창 가이드 일을 할 때이다.

골프에 빠져서 시간만 나면 골프장에서 시간을 보낼 때인데 쓰고 있던 골프채를 바꾸고 싶어 교민잡지 중고물품코너에 올려놨더니 얼마 후 전화가 왔다.

그런데 전화를 받고 통화를 하는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분명 나이 지긋한 할머니 목소리 였다.

골프채를 살테니 스쿰빗에 있는 어떤 호텔로 나오라는 것이다.

할머니가 왜 남자 골프채를 사려고 할까 궁금해 하며 골프채를 가지고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다.

커피숍에 앚아서 기다리는데 정말로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한분이 들어오시더니 내 앞자리에 앉았다.


일어나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 다시 앉았는데 그때부터 잠시도 쉴 틈을 안주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이야기를 듣다보니 내가 지금 골프채를 팔러 나온것인지 할머니 말을 들어줄려고 나온 것인지 헷갈릴 정도 였다.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끝도 없이 하더니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백을 열고 돈을 꺼내 주면서 골프채는 그대로 가져가고 나중에 돈이 생기면 갚으라는 것이었다.


돈이 필요해서 팔려는 것이 아니고 바꾸기 위해서 팔려는 것이니까 채를 도로 가져가고 돈은 받을 수 없다고 말씀을 드리자 그럼 채를 가져가겠다고 하시더니 전화로 누구를 부르자 운전기사로 보이는 태국인이 와서 골프채를 가져갔다.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호텔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고 식사 대접을 받았고 또 다시 커피숍에 내려 왔다.

점심 무렵의 만남은 저녁 때가 되어서야 끝났고 헤어질 무렵에는 누나와 동생이 되어 있었다.

박정화씨는 사람을 좋아했다.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교제를 넓히는걸 즐거움으로 살았다.

교집잡지에 실려있는 물건을 보다가 전화를 해서 사람을 만나고 그러는 것도 한 두명이 아니었다.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생각의 범위와 파격적인 사고방식에 어리둥절 해질때가 여러번 있었다.


이렇게 알게 된 분은 박정화(가명) 씨 였다.

성격이 거침없고 말과 행동이 시원시원한 박정화씨는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일찍 잃었고 위로는 그다지 가까운 친척도 없었다.

아래로 남동생이 한분 계셨고 함께 방콕에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에는 고졸 간호사가 있었다) 간호사가 되어 독일에 일을 하러 나갔다.

달러를 벌어들이는 역군이라며 칭찬을 받을 때이다.

독일에서의 힘든 간호사 생활을 끝마치고 곧바로 귀국을 하지 않고 친구 간호사 한명과 유럽을 여행했다.


그리고 동남아까지 둘러보고 귀국하리라 생각하고 싱가포르는 친구와 헤어지고 혼자서 여행을 했다.

싱가포르 호텔에서 한 남자를 만났는데 태국인이고 배를 타는 간부선원이었다.

한 두시간 태국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지고 한국으로 돌아 왔는데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태국인 아저씨의 끈질긴 요청을 받고 태국을 가게 되었고 다시 만나 깊은 교제를 나누고 국제결혼을 하게 되었다.


박정화씨는 한때나마 출가를 결심할 만큼 한국 사회와 맞지 앉는 사고방식과 독특한 개성을 가진 분이다.

독일에 가기 전 한때 세상사에 관심을 버리고 출가해서 여승이 되리라 굳게 결심하고 스스로 삭발을 감행하고 여승들이 가장 많다는 수덕사에 갔다.


머리까지 깍고 입산을 했고 모든 세속 인연을 버리고 왔다고 말했지만 그곳을 지키는 큰 스님은 한사코 출가수행자의 길을 허락치 않았다.

절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절에서 잡일을 하며 몇달을 지냈는데 하루는 큰 스님이 불렀다.

이제 드디어 허락이 떨어지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스님은 물끄러미 아무 말씀도 안하고 한동안 얼굴만 쳐다보시더니

"너는 중 아니다 너는 저 멀리 남방으로 가서 살 사람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내려가거라"


그 한마디 큰 스님의 말씀을 듣고 출가수행자의 길을 포기했던 박정화씨는

정말로 태국 남편을 만나서 태국에서 살게 되었다.

남편은 결혼 후 배타는 일을 그만 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큰 배들이 항구에 정박하면 구매하는 식재료들을 납품하는 사업이었다.

 

딸을 하나 낳았고 그 딸은 잘 자라서 태국의 한 방송국 기자가 되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채 오십도 되기전에 남편을 병으로 떠나 보내고 딸과 함께 지냈다.

그리고 딸이 태국 경찰 간부와 결혼을 하고 시집을 가자 쓸쓸히 홀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딸과 사위의 인맥은 태국의 고위층들과 연결되는 사다리가 되었다.


나를 처음 만날 때 타고 나왔던 벤츠 승용차는 사위의 집에서 신솟( 결혼할 때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주는 돈) 을 안 받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박정화씨의 뜻을 꺽을 수 없어 신솟 대신 선물로 보낸 승용차 였다.


딸의 결혼이 가까워지자 신솟을 받아야 하나! 하고 생각하니 멀리 남의 나라에 와서 살다가 과부가 되고 결국에는 딸까지 팔아먹는게 아닌가 싶어 밤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위의 아버지도 고위급 경찰간부를 지낸 사람이었고 재산도 많은 사람이었다.


하루는 박정화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늘 그렇듯이 일방적으로 집앞으로 약속 장소를 정하더니만 관광경찰 사령관을 만날 것이니 옷을 잘입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그냥 만나서 설명하겠다고만 했다.


집 근처로 온 차에 타자마자 박정화씨의 빠른 말들이 쏟아졌다.

관광경찰 사령관 자리는 임기가 2년인데 이제 몇달 남지 않은 임기 안에 호주에서 중고 잠수정 한대를 들여오려고 한다.

물론 사업체의 대표는 다른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 오너는 사령관이다.

파타야 앞에 있는 산호섬에서 영업을 시작 할 것인데 한국투어의 담당 세일즈 매니저를 구한다.


이런 설명을 듣는 순간 이거 뭐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이라면 미리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해서 사업성을 따져 보아야 한다.

갑자기 가이드하는 나를 불러놓고 잠수정 사업 어쩌고 하는 말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내 말은 거의 듣는둥 마는둥 설명만 하는 박정화씨의 열변을 듣기만 했다.

이거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낭패를 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파타야 앞 바다에 떠있는 산호섬은 물 속에 볼만한 산호가 거의 없다.

무엇보다 물이 그다지 맑지 않다.

잠수정을 가지고 물 속 관광사업을 할려면 남쪽에 있는 푸켓이나 그 근처 바다가 좋을 것이다.

겨울에만 갈 수 있고 스킨스쿠버들의 천국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시밀란군도라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태국의 청정지역인 시밀란 군도 앞바다에 잡수정은 말 도 안되는 것이다.


태국은 관광경찰이 있다.

본부는 방콕의 중심지 사톤에 있고 사령관은 군대처럼 별이 두개다.

사톤 본부에 도착했다.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능숙하게 안으로 들어서더니 핸드폰으로 직접 사령관에게 연락을 하자 잠시 후 비서가 우리를 맞으러 내려왔다.


사령관실에 들어갔다.

비서들이 근무하는 작은 방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서자 사령관이 일어나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사령관은 만약에 어께 위에 번쩍이는 별 두개짜리 견장붙은 경찰복만 벗어버리면 길거리 시장통에서 수박을 팔고 서 있어도 어울릴만큼 서민적인 얼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래전에 잠롱 방콕 시장이 생각나는 얼굴이었다.

육군 투스타 출신의 잠롱은 방콕 시장에 출마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선거운동을 했고 당선되고서도

서민적인 행보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박정화씨가 사령관을 대하는 모습은 스스럼 없는 정도를 넘어 거의 동네 친구처럼 보였다.

사무실이 마치 자기 동네 노인정이라도 된듯이 쇼파에 편하게 다리를 펴고 앉았다.


사령관은 말 수가 별로 없었다.

이미 나를 데리고 여기 온 이유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군더더기 말이 없었다.

호주에서 잠수정은 이미 구매했고 지금 수리 중이다.

올 겨울 시즌 전에 태국으로 가져 올 것이다.

사무실은 파타야 비치로드에 만들 것인데 앞으로 거기를 자주가거라.

실제 비지니스가 시작되기 전부터 사무실 대표와 일하는 직원들과 상의해서 모든 일을 처리하라.

대략 이 정도의 말을 내게 하고 자기 명함을 꺼내어 뒷면에 뭐라고 글을 쓰더니 나에게 주었다.

앞으로 관광경찰을 만날 일이 혹여 생기거든 이 명함을 보여줘라. 그런 뜻 이었다.


사령관의 명함은 그 후에 실제로 내가 관광경찰에게 제시 한 적이 딱 한번 있었다.

손님들과 함께 산호섬에 갔다가 나왔는데 경찰이 오더니 여권을 요구했다.

내가 사령관의 명함과 여권을 동시에 제시하자 명함을 보던 경찰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명함에 적혀있는 번호로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부동자세로 캅폼캅폼 그렇게 대답만 서너번 하더니 여권과 명함을 돌려주며 가도 좋다는 것이다.


내가 지갑에서 이천바트를 꺼내주자 괜찮다고 하는데도 웃으면서 가져가서 식사라도 하라도 우겨서 줬다.

그리고 경찰과 웃으며 헤어졌다.

만일에 경찰과 함께 경찰서에 가게되면 가이드로서는 최악의 상황으로 갈 수도 있다.

일정은 중단되고 손님들은 새로운 가이드가 도착 할 때까지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

그런 상황을 무조건 피해야 하는 가이드로서는 어떻게든 현장에서 해결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적은 월급에 시달리는 태국 경찰들은 돈을 줘도 웬지 즐겁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맘편히 살았다.


몇달이 지나서 파타야에 실제로 잠수정이 도착했다.

사령관이 방콕에서 내려 왔고 몇명의 한국인과 실무 직원들과 함께 보트를 타고 저 만치 떠있는 잠수정에 도착해서 안과 밖을 자세히 둘러봤다.

무엇보다 잠수정이 생각보다 너무 오래되고 크기가 작았고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창이 너무 흐렸다.


또 잠수정 지붕 위에서 안으로 내려가는 해치의 입구가 직경이 너무 좁았다.

처음부터 관광용 잠수정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해군이 쓰던 군사용 잠수정이었다.

한국인 투어에는 전혀 해당될 수 없는 잠수정이었다.

나는 큰 기대를 안하고 있었기에 실망할 것도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사령관의 질문에 말은 바로 해야 겠다는 생각에 이 잠수정은 한국 투어에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령관의 얼굴에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허지만 중국인 투어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내가 다시 말했다.

평생을 공직에 있던 사람들은 퇴직후에 사업을해서 성공하기가 힘들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생각해야 한다.


내가 비록 잠수정 사업에 뛰어 들지는 못했지만 잠수정 사업은  비치로드에 사무실을 내고 실제로 중국투어와 외국 배낭족을 상대로 영업을 했다.


하루는 박정화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박정화씨는 시간만 나면 나를 찾았다.

친분있는 판사의 갑작스러운 죽음때문에  태국의 고위층들이 참석한 장례식을 가기도 하고 대법관을 지낸 원로 변호사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고 젊은 경찰간부들의 모임자리에 나를 데려가기도 했다.

그랬는데 슬슬 여기저기 따라다니는 것이 싫어졌다.


그날도 전화를 받고 바쁜 일어 있어서 못나간다는 핑계를 대는데 이번엔 정말로 너를 위한 자리이니 꼭 나오라며 시간과 호텔을 알려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망설이다가 이번이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스쿰빗에 있는 호텔에 나갔다.

나가기싫어 꾸물거리다가 좀 늦게 도착해 들어가보니 두 사람의 처음보는 여자들과 박정화씨가 앉아서 대화를 나누다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게 사전에 설명도 없이 사람을 당황시키기는 여전했다.


분위기가 마치 맞선을 보는듯 했다.

아니 실제로 맞선 자리였다.  내가 준비없이 나간 것만 빼놓는다면...

부산에서 오랬동안 한의원을 하셨다는 품위있는 옷차림의 어머니가 나에게 이것저것 진지한 질문을 하셨고 나는 대답하는데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한 자리였다.


대화의 말미에는 한 마디를 덧붙이셨는데 

"우리 집안은 대대로 불교를 믿는 집안이고 내 사위가 될 사람은 반드시 불교를 믿어야 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종교를 물어보시지는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난 내가 그 여자와 결혼을 하려면 불교로 개종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 부분은 거의 타협의 여지가 없을 것 같았다.

그 말이 조용하고도 확신에 차서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일행은 일식당으로 자리를 옮겨서 식사를 했고 이후에는 덥기도 하고 어디 갈 곳도 마땅치 않아 두사람만 따로 나와 쉐라톤호텔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들없는 집안에 장녀였다.

아시아나 승무원이었던 여동생은 이미 결혼을 했고 대학교수였던 부친은 세상에 안계셨다.

부산에는 매월 월세를 받는 건물이 두개나 있었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처지라는 말도 했었는데 자랑한다는 느낌은 안들었고 그저 솔직히 이야기하는 시원시원한 성격의 여자처럼 보였다.

상당한 미인이었으나 성형수술을 한 것이 눈에 띄는것이 거슬려 보였다.

비싼 명품백을 들고 비싼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가난한 처지의 나와 어울릴것 같지 않았다.


미술을 전공했고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도 했다.

방콕에서 가이드를 하고 있던 친구를 만나기 위해 방콕에 왔고 태국이 마음에 들어 혼자서 방을 얻고 살고 있었다.

친구를 통해서 알게된 여행사의 사장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주기도 했고 그러다가 심심풀이로 ? 가이드 일도 가끔 해보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서로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헤어져 집으로 왔다.


그 다음날 박정화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나를 좋게 보셨다는 것이다.

둘이 맺어지기만 하면 딸에게 방콕에다 집과 차를 사줄 것이고 사위를 위해서는 여행사를 차려줄 수도 있다고 하셨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말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웬지 느낌이 나하고 인연이 될 여자는 아닌것 같습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일년정도 시간이 지난 후 공항에 나갔다가 그녀를 우연히 마추쳤다.

내게 다가 오더니 잠깐 시간 있느냐고 해서 두 사람이 공항 밖으로 나왔다.

공항 밖에서 담배를 한대 꺼내 불을 붙이더니 약간 따지듯이 내게 말했다.

" 내가 싫었어요? " 내가 말했다.


" 그때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 중에 내 사위는 반드시 불교로 개종을 해야 한다고 하셨던 말씀 기억하세요? 나는 집안 전체가 기독교인 입니다.

그래서 연락을 못했던 겁니다" 이렇게 차분하게 말하자 그녀의 얼굴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미안해하는 얼굴로 어쩔줄 몰라하는 그녀에게 내가 말했다.

" 앞으로 정말 좋은 분 만나실 겁니다."


방콕에 가까이 지내던 후배들이 내 이야기를 듣더니 그 중 한명이 

" 형님 종교는 잠시 바꿀 수도 있는거 아닙니까? 형님 인생만 아니라 우리 인생도 좀 생각해주이소" 

" 그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게 말하고 다들 웃었다.

박정화 누님은 방콕에서 만난 동생인 나를 위해서 많은 마음을 써준 분이지만 나는 이렇다할 보답도 못했다.

지금은 완전히 연락이 끊어져 아직도 살아계시는지 생사도 알 수 없다.

교민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사위로 인해 생긴 인맥을 활용해 도움을 주기도 하셨고 또 그로인해 오해를 사시기도 했었다.


그 무렵 방콕에서 함께 열심히 일하던 후배들이 하나 둘씩 태국을 떠났다.

가이드 생활에 비젼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있으면 국제학교에 보내는게 일반적인데 학비가 만만치 않았다.

부부가 맞벌이를 해도 어렵다.

그러나 일급 가이드로서 탄탄하게 자리가 잡힌다면 큰 걱정은 없다.

늘 홀가분하게 혼자 지냈던 나는 아이들 걱정을 안하고 살았는데 무엇이든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 하고 그러니 뭔가 하나를 얻지 못한다고 해서 너무 실망할 필요도 없는것 같다.


태국 생활의 좋은 점을 꼽으라면 여러가지가 있지만 한국보다는 스트레스를 덜 받는 환경이 첫번째라고 나는 생각한다.

 단점이라면 너무 덥다는 것이고 미래가 불투명한 생활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은퇴한 사람들이 생활비 걱정없이 노후생활을 보내기 위해서 태국을 선택했다면 정말 좋은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다.

치앙마이나 치앙라이에서 은퇴생활을 하는 한국인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은퇴생활을 하기 좋은 환경이다.

일년에 한 두번씩 한국을 다니면서 태국생활을 한다면 정말 좋다.


방콕에서 파타야는 대략 두 시간 거리다.

하늘은 흐렸고 바람이 불었다. 나는 파타야 앞 바다를 보고 있었다.

어쩌다 한번씩 불어와서 더위를 식혀주는 바람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모른다.

크고 작은 선택을 끊임없이 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 나뭇잎처럼 보잘것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시원한 콜라 한잔을 마시며 비치 파라솔 그늘에 앉아 멀찍이 수평선을 바라보는 동안 조용히 소리없이 나의 깊숙한 내면에서 서로 싸우는 상념의 전쟁이 벌어졌다.

일어나야 했고 걸어야 했다.

석양에 붉은 잔상을 남기고 태양이 사라지자 밤의 파타야가 생기를 되찮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날도 분명 파타야의 밤을 열어주는 알카자의 오프닝쇼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환락의 도시 파타야는 누구라도 거부하지 않는다.

세계 각국의 요리와 저렴한 길거리 음식과 크고 작은 호텔들과 시끄러운 음악과 감미로운 음악이 공존하고 수많은 쇼핑센터와 가게들과 거리를 가득채우고 걷는 사람들과 워킹스트리트의 아고고 술집들과 노천 빠마다 젊은 여자들이 바글거리고 네온싸인이 번쩍거리는 도로를 오토바이 택시와 쏭태우가 관광객을 태우고 길거리를 달리고 디스코텍에서 분출하듯 쏟아내는 음악과 춤을 추는 젊은이들이 에너지를 완전히 고갈시킬 때까지 움직이면서 파타야의 잠 못드는 밤을 만들어 낸다.


파타야가 환락의 도시라면 치앙마이는 힐링의 도시다.


태국의 별칭은 미소의 나라 이다.

파타야는 별이 쏟아지는 곳 이라는 뜻이다.

방콕은 끄룽텝이라고 한다. 천사의 도시 라는 뜻이다.

치앙마이는 북방의 장미 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푸켓은 동양의 진주 라는 애칭이 있다.


700여년 전 치앙마이에 란나 왕국이 있었고 이어서 수코타이 왕국의 위대한 왕 랑캄행 왕이 태국 문자를 만들었다.

뒤를 이어 찬란한 문명을 뽐내던 아유타야 왕국이 존재했던 땅에 탁신왕이 세웠던 짧은 수명의 톤부리 왕조가 있었고 뒤를 이어 오늘날의 라마왕조가 들어서고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의 라마왕조는 차크리 장군이 세웠으므로 차크리 왕조라고도 한다.


근대 국가의 기틀을 세웠던 라마 4세 몽쿳 왕과 그의 아들이자 옥스퍼드에 유학해 일찍이 서구문물에 정통했고 영명한 군주였던 출라롱콘 대왕에 의해 한층 더 굳게 세워진 라마 왕조는 서구열강의 식민지 쟁탈전 속에서도 지혜롭게 국권을 지켜 나라를 빼았기는 치욕을 당하지 않았다.


이것은 온 태국 국민들의 자랑이자 자부심이 되었으며 전세계 어느 나라 어느 국민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자신감의 토대가 되었다.


태국인은 체면을 중히 여긴다.

결혼식이나 생일 잔치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큰 행사를 치를 때면 

분수에 상당히 넘칠 정도의 돈을 쓴다.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음식을 사거나 장만할 때도 평소보다는 많은 음식을 주문하고 음식이 남아서 가져가도 될만큼 많이 시키거나 만든다.

그것을 후한 대접이라고 생각한다.

태국인의 이런 후한 대접에 무리하게 과식을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웃으면서 잘 먹었노라고 감사를 표하고 남기면 된다.


미소의 나라 태국에서는 웃으면 된다.

웃음짓는 얼굴 미소띤 얼굴이면 뭐든지 된다.

모든 부탁을 다 들어줄려고 하는 태국인들의 마음을 여는 열쇠는 웃음짓는 얼굴이다.

미소를 지으며 두 손 바닥을 마주대고 앞으로 가지런히 모아 살짝 고개를 숙이는 자세를 태국 말로 ㅡ 와이 ㅡ 라고 한다.

와이 자세를 하고 태국인을 대해보라.

상대가 누구이건 무슨 일이건 당신은 호의를 얻을 것이다.


친한 후배가 태국인 처녀와 결혼을 했다.

이 동생은 한국에서 결혼을 했고 아들을 하나 얻었다.

세사람은 태국에 들어와 몇년을 살았으나 부인과 헤어지고 말았다.

혼자서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던  후배는 수년 후 후아힌에서 그곳 출신의 처녀를 만나 전통 혼례를 했다.

나는 그때 이 동생과 연락을 못하고 있을 때라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거의 24시간이 걸리는 결혼식의 총 과정에 질려버린 동생이 하는 말

" 두번 다시 태국 여자와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이 동생은 한국에서 나이트클럽 디제이 였다.

태국에 들어오기 직전 디제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술집 마담과 함께 강남에서 룸싸롱을 했다. 사채를 좀 써는데 사채업자의 독촉이 빗발쳤다. 

전화를 받고 사채업자와 험한 말을 주고 받다가 쌍욕을 하고 말았다.

사채업자가 덩치 큰 보디가드를 한명 데리고 가게로 쳐들어와서 동생을 잡아 뺨을 몇대 때렸다.

그때 뺨을 맞고 참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순간 이성을 잃은 동생은 양주병 하나를 잡아 사채업자의 머리를 쎄게 내리쳤다. 

사채업자의 머리에서 깨어진 유리병은 들어있던 술과 함께 사방으로 튀었다. 사채업자는 피를 흘리며 쓸어져 버렸고 동생의 살기에 짖눌린 보디가드는 눈빛을 돌렸다.

그 길로 가게를 나와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여권을 챙겨 공항으로 달렸다.

공항으로 가면서 와이프에게 전화해 공항에 택시타고 와서 차를 가져가라고 한 다음 여행사에 전화를 해서 최대한 빨리 방콕가는 비행기표를 수배해 달라고 부탁했다.


방콕행 비지니스 한자리를 예약했고 그날 밤 방콕으로 넘어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나는 방콕 라차다에 있다가 황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 김실장 급한 부탁이 하나 있는데 오늘 밤에 공항에 가서 사람한명 픽업을 해주면 좋겠는데  아는 동생인데 사고를 치고 오는것 같은데 김실장이 좀 도와줘요"

공항에 나가서 피켓보이에게 이름이 적힌 A4용지를 하나 건네주고 커피숍에 앉아서 기다렸다.


약간 작은 키에 눈빛이 번쩍거리는 한놈을 피켓보이가 데려왔다.

백바트짜리를 한장 꺼내 보이에게 주고 둘이서 인사를 나눴다. 

깍듯이 인사하는 폼이 예삿놈이 아니였다.


이렇게 알게된 동생  용이(가명)는 과연 보통놈이 아니었다.

오자마자 내가 타는 버스에 핼퍼를 타고 딱 한번 파타야를 갔다와서는 곧바로 가이드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팀을 바로 배정해서 일을 내보냈더니 어느정도 돈도 벌어왔다.

그리고 불과 한 두달만에 버스를 타고 가이드를 하면서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했다.

적응력이 놀라웠고 순발력이 빨랐다.

소위말해 크게 될 놈이었다.

크게 되던지 큰 사고를 칠 놈이었다.

한국에서도 이미 큰 사고를 치고 온놈이니 설명이 필요없는 놈이었다.

그리고 남자로서의 미덕도 갖추고 있었다. 주위의 가까운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있는 눈치를 보이면 꼭 지갑을 털어 주었다.

갚으라고 주는 돈이 아니었다.

마음 속에 야심이 가득한 인간이었다.

이미 한국에서 한달에 수천만원씩 벌어보고 써본 사람의 자세가 그대로 나왔다.

분명 큰 그림을 완성할 인간 같은데 그런데 한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카지노와 도박을 좋아했다.

그것이 얼마나 끊기 어려운 것인지 모두들 알고 있다.

가이드를 잘했고 수입도 적지 않았지만 

 양이 차지 않았다.

파타야로 거처를 옮겼을 때는 와이프와 아들도 함께였다.

식당을 개업했고 파타야 앞바다 산호섬에서 손님들이 먹을 도시락을 주문받기 시작했다.

사업은 잘 되었다. 그러나 도박이 문제였다. 

그렇게 살았으면 좋았으련만 한 순간에 도박으로 가진 돈을 모두 다 날리고 말았다.

다시 뭔가 일을 해야 했다.

파타야 모 쇼핑센터 사장에게 어느정도 선불을 받고 그곳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도 잘했고 선불도 금새 다 갚더니만 더 큰 금액을  소형 승용차 한대를 살 돈을 다시 빌렸다.

그리고 그돈을 캄보디아 카지노에가서 하루만에 다 날렸다.

또 다시 식당을 재건하고 열심히 일을하고 빌린돈을 갚아나가다가 시비를 거는 누군가와 싸움을 했다.

힘에서 밀리던 용이가 얻어맞는 것을 본 태국 남자직원 한명이 주방에서 고기 다질때 쓰는 사각망치를 들고나와 상대의 머리를 내리쳤다.

기절해버린 상대를 두고 태국 직원에게 지갑을 털어 돈을주고 대피시켰다.

그리고 마침 밖에 나가있던 부인에게 가게로 돌아오지 말라고 한다음 그길로 잠적했다.

그 후 

용이의 소식이 궁금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도 찾을 길이 없었다.


수년이 지난 후.

치앙마이 골프장에 손님과 함께 갔는데 거기에서 낯익은 얼굴을 가진 한 놈이 보였다.

ㅡㅡㅡㅡㅡㅡ4 편으로 계속 ㅡㅡㅡㅡㅡㅡ







13 Comments
호루스 2022.06.24 15:23  
이런 글 보면 재밌기도 하고, 구라가 몇 % 들어갔을까 생각도 들고 그러네요.

이런 스펙타클한 얘기가 요즘은 베트남에서 벌어지고 있죠. 코로나로 중단이 되었다가 서서히 부활 중인걸로 알고 있는데, 어디서나 난세가 되어야 재능있는 자가 꽃을 피우고,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치세가 되어야 안심하고 살 수 있죠.

풀어 쓰자면 난세(법과 규칙이 혼돈인 상태, 소심한 사람은 그 자체로 호구가 되는 상태)에는 깡있고, 눈치 빠른 자가 이문을 차지하고, 치세가 되면 깡없고 눈치가 평범한 사람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의미.
즉, 난세에는 패키지 여행 시장이 압도적이며 가이드가(깡있고 눈치 빠른 사람) 돈을 많이 벌수 있는데, 치세가 되면 평범한 사람들이 패키지 같은 보호막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자유여행을 즐기게 되겠죠.
그래서 현재 태국 가이드는 정말 별볼일 없는 수입이 되었고, 베트남이 엄청난 기회의 땅으로 성장 중인 것이고요.
겨울나그네 2022.06.24 20:19  
[@호루스] 구라가 몇% ?
내가 글 써보니 겪어본 사건이나 자세히 들은 내용은 글로 옮겨쓰기만 하면 되니까 쉬운데
겪어보지 않고 들어보지 않는 내용을 써야 하는 작가들이 존경스러워 집니다
겨울나그네 2022.06.24 20:31  
[@호루스] 제 글을 읽다가 구라(픽션)같으면 읽지 마세요
저는 능력없어서 소설가가 못된 사람입니다
다만
저도 사람이다보니 제 기억에 왜곡현상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만
모두 다 사실이고 픽션은 넣고 싶지도 않습니다
호루스 2022.06.25 00:43  
[@겨울나그네] 구라라고 하니까 불쾌하신 모양인데 사과드리죠. 부적절한 용어를 써서 미안합니다.
제 생각도 같아요. 구라가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냈다고 느끼진 않고, 과장이나 기억의 왜곡의 의미로 썼으니까요.
그리고 구라라고 생각해도 재미있으면 읽을수 있죠. 사기친다고 몰아세운 것도 아닌데 너무 날세우진 마세요.
겨울나그네 2022.06.25 18:31  
[@호루스] 감사합니다  더욱 좋은 글을 쓰기위해 노력해보겠습니다.
Vagabond 2022.06.24 17:48  
중간중간 주옥같은 표현도 있고
점점 재미가 더해갑니다 ㅎㅎ
이제는 예고편으로 마무리 ㅋㅋㅋ
두리얀몬텅 2022.06.24 22:20  
지나온시간을 긴시간들여  글로 옮겨 놓는데...어깃장놓는 그런글은 삼가합시다.
겨울나그네 2022.06.24 23:35  
[@두리얀몬텅] 감사합니다
역삼아크로빌 2022.06.25 16:26  
과거 태국에서1년 살아본 사람으로서 겨울나그네님에게 박수를 보내고싶네요
타국생활이 유혹이 많은 일들이 정말 많이생깁니다  장문의 소설을 집필할수있다는것은 경험을토대로 쓰여진것이라고생각되어지네요 픽션이던 논픽션이던간에 저의소견은 리얼이라고 감히 말씀드릴수있겠네요
잘읽었습니다
겨울나그네 2022.06.25 18:29  
[@역삼아크로빌] 감사합니다 글이 산만하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neo9 2022.06.26 00:33  
잘 읽고감니다.  담담하게 잘쓰시네요
가솔린집시 2022.06.26 23:27  
지난세월 태국전국 배낭여행을 1년에 1~2달씩 다녔네요
글속에 제가 다닌 지명들이 나오니 추억이 배가돼어 오네요
잘읽고 갑니다^^
할리 2022.07.11 02:51  
계속 일다가는 밤을 세워야 될것 같습니다.
벌써 새벽 03시 다되어 가네요.
저도 대학교에서 관광학을 전공했었기에 제길이 될수도 있었던 삶이라고 느껴집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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