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국의 관광가이드 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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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국의 관광가이드 였다 1.

겨울나그네 13 971

   

나는 태국의 관광가이드 였다 1.


오랬만에 목포에 왔다.

개항 백년이 지나 이제는 조금 늙은 항구가 되어 있는 쓸쓸한 모습 

돌아다녀보니 곳곳에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그런지 마음이 편안하다.

회상에 잠기는 시간 속에서 어느 덧 어린시절에 걸어다니던 나를 만난다.

시간은 사실 없는 것이고 우리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관념인듯 하다.


영원한 시간을 바라보니 찰나의 순간을 스치듯 지나가는 기차속에서 잠시 창 밖을 내다보던 어린 소년이 기차가 멈추고 백발이 되어 내리는 것인가!


인생이란 아련히 피어오르는 뭉개구름처럼 ....보이는듯 사라지는 빛바랜 사진인가 싶다.

더운줄도 모르던 그 여름날에 ....유달산을 넘어 바닷가 해수욕장에 가던 길에 

풀 숲을 헤치며 맺혀있던 산딸기를 따서 입에 넣고 깨물어먹던 새콤한 단맛은 지금도 입안에 침이 고일만큼 생생하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하루도 허비하지 말고 학업에 정진하라던 옛 글이 이제야 비로소 무슨 뜻인지 알겠다.

모든것을 가졌어도 진리를 갖지 못하면 공허한 삶이고 모든것을 잃었을지라도 진리를 찾으면 가슴 가득 충만한 삶이라 생각한다.

나머지는 사소한 문제

다만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다.

아니 시간이 지나면 모든것이 해결 될 것이다.

억겁의 세월동안 사계절이 지나갔듯 앞으로도 억만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우리가 알고 보고 느끼는 모든 세상은 변할것이고 땅은 바다가 되고 바다는 산이 되어 또 다른 웅장한 모습으로 자기의 시간만큼 존재할 것이다.


영원의 세계의 지평선에서 출발도 못해보고 사라지는 인간의 삶의 무게가 무겁다한들 저만큼 떨어진 풀잎에 매달려서 절박하게 울부짖는 여치 한마리의 울음소리일 뿐이다.


1995년 가을에 나는 여행을 갔다.

태국이었다. 

4박5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강렬한 햇빛만큼이나 뜨겁고 끈끈한 여운이 남았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다시 태국으로 가기 위해서 기다렸던 2년이란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여행을 떠나기위해서 준비하던 시간이었다.


여행을 떠나려는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특별히 한국에 있어야할 이유도 없었고 밖에 나가면 안되는 이유도 없었다.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건 아니지만 악착같이 돈을 벌고 싶지도 않았다.

어릴때부터 가슴 한켠에 자리잡은 공허함이 있었다.


돈.출세.명예.성공.결혼. 이런것들은 중요하지도 절실하지도 않았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개신교인이 아니었다면 머리를 삭발하고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걸었을지도 ....


특정한 종교에 속하거나 특정한 틀 속에 자신을 가두고 싶지 않았다.

정신과 마음과 몸이 아무것에도 속박 당하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런 생각마저도 나를 지배하는게 싫었다.


아주 세찬 바람이 불고 그 바람 속에서 조용히 서있는 때가 좋다.

추운 겨울 날씨에 눈보라가 치고 윙윙거리는 전기줄이 바람에 떨려 우는 소리가 좋았다.

1997년은 한국의 경제가 요동을 치고 IMF라는 단어에 국민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던 때이다.

어느 나라도 경제가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타격을 받는건 관광업계다.

그러니 태국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태국에서 한국인 가이드와 태국인 가이드는 함께 일하며 동고동락하는 실과 바늘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양국의 가이드들 사이에서는 한국인 가이드가 보이지 않는 서열이 높다.

태국인 가이드들은 한국인 가이드들을 돕는 역할만 한다.

식당이나 각종 예약이 필요한 곳에 전화로 예약을 하고 손님들이나 한인 가이드의 심부름을 해주기도 한다.

아마도 전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이처럼 현지인 가이드가 한인 가이드들을   도와주고 겸손하게 아래 서열을 받아들이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태국인들의 너그럽게 포용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이와 같은 관계를 만들었다고 본다.

그러나 어떤 한인 가이드도 태국인 가이드를 무시해선 안된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간혹 못된 성격을 고치지 못한 한인 가이드가 태국가이드를 무시하거나 화를 터트리거나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결과는 언제나 한인 가이드의 패배로 끝났다.


한국관광객이 태국에 처음 들어올때부터 지금까지도 태국인 가이드들의 큰 도움과 협조가 있었기에 태국 땅에 한국관광이라는 서비스 산업이 존재해 올 수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한인가이드들이 있었지만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유명한 가이드들이 있다.

그중에 한명이 1세대 가이드를 했던 사람들중에 김명수(가명)씨가 있다.

김명수씨는 개성넘치고 괴짜들이 많았던 1세대 가이드들 중에

서도 단연 탑이었다.

어느날 방콕의 한 술집에 저마다 난다긴다 하는 가이드들 대여섯명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너는 한달에 얼마만큼 일을 하고 나는 한달에 몇 팀을 뛰고 돈은 얼마를 벌고 등등 대화가 이어지다가 급기야 자기들끼리 서열을 정하기 시작했다.


술도 거나하게 마시고 취기도 올라 기분이 좋아지자 자기가 남보다 더 나은 가이드라고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참을 내가 일번 가이드 너는 이번 가이드 하며 서열 다툼을 하던 일행들중 한명이 말했다. 

" 야 그런데 김명수는 서열이 어떻게돼? 이 자리에 없다고 김명수를 빼놓고 우리끼리 누가 최고냐 어쩌냐 따질 수 없잖아" 그러자 일행들은 갑자기 정신을 차린듯 자세를 고쳐 앉더니 분위기가 차분해졌다.

그러자 그 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가이드가 이렇게 말했다

" 명수는 가이드의 신이잖아 신은 빼놓고 우리 인간들끼리 서열을 따져야지" 


한 TV에서 태국 거주 외국인을 출연시켜서 누가 태국어를 가장 잘하는지를 알아맞추는 프로그램을 방송한 적이 있다.

각 나라 출신별로 많은 출연자들이 나와 사회자의 질문에 저마다의 태국어 실력을 과시하며 답변을 하기도 하는 등 유쾌한 프로그램이 이어졌고 시간이 다 되어가자 이제 수 백명의 방청객들의 심사결과를 발표하는 순간이 왔다.

저마다 자기가 듣기에 가장 태국어를 잘하는 사람에게 번호를 누르고 결과를 기다렸다.

결과가 발표되었고 방청객들은 박수와 환호를 하며 즐거워 했다.

근런데 순서를 다 발표한 사회가 마지막 한마디를 하자 방청객들은 그 순간 완전히 얼어붙듯 놀라움의 탄식이 터졌다.

사회자의 마지막 한마디는 이거였다.


" 오늘 이곳에 와주시고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신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는 한국인이며 이름은 김명수 입니다.

저는 태국에 온지 이제 3년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회자가 한시간이 넘도록 사회를 보는 동안 그 누구도 그가 외국인인것을 모를 정도로 너무나 자연스러운 태국어를 구사했던 것이고 그런 태국어 실력을 불과 3년만에 쌓은 사람에 대한 놀라움의 탄성이 터졌던 것이다.


김명수씨 개인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은 그도 불완전한 인간인지라 있을 수 있지만 그 누구도 그가 태국어를 완벽하리만치 잘 구사하는 사람이라는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크지않은 키에 다부진 몸을 가졌고 이목구비가 뚜렸하고 잘생긴 남자였다.


김명수씨는 태국에 일치감치 넘어와서 자리를 잡고 살았다.

그는 처음에는 대도시인 방콕을 멀리하고 태국의 어느 시골 마을로 들어갔다.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었던 나는 김명수씨의 불가사의한 태국어 실력을 경탄하곤 했다.

그의 태국어는 정말 특별했다.

마치 현지에서 태어나 자란 한인 2세와 같은 실력이다.

현재는 태국에서 나고 자란 한인 2세가 많지만 대략 20~30년 전에 그정도로 태국어를 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런 점에서 김명수씨는 정말 특이했다.

내가 어떻게 태국어를 그렇게 잘하게 되었는지 몇번을 물어도 그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그냥 어쩌다보니 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그냥 어쩌다보니 잘할 수 있는 외국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

모든것은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 어려운 태국어를 그냥 잘하게 되었다는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명수형을 알고 지낸지가 20년이 지나서 베트남의 다낭에서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어렴풋이 명수형의 태국어가 정말로 그냥 잘하게 되었다는 말을 조금 이해 할 수 있었다.

명수형이 만일 언어의 천재라면 몇년의 베트남 생활에 꽤 괜찮은 베트남어를 구사해야 할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베트남어는 너무나 어려워서 도저히 배울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업장의 현지인 직원들과는 영어로 소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다.

" 형님의 태국어는 거의 태국인과 같은데 그때는 어떻게 배웠어요?"

그랬더니 늘 하던 대답과는 조금 다른 대답이 나왔는데 이렇게 말했다.


"태국에 처음 왔을 때 번잡하고 시끄러운 방콕보다는 시골에서 지내고 싶었다 그냥 현지인들과 하루종일 지냈고 동네 아이들과 놀았다 그렇게 몇년을 지냈는데 어느날 부터인가 태국인들이 하는 말들을 다 알아듣게 되었어"

나는 명수형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사람은 아이때부터 말을 배우기 위해서 특별히 애를 쓰지 않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말이란 아이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것이지 아이들이 말을 배우기 위해서 특별히 노력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인 자녀들처럼 두가지 언어 환경에 놓여있는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이들은 모국어는 자연스럽게 배우고 현지 언어는 힘들게 노력해서 배우고 그러지 않는다.

그냥 두가지 언어를 자연스럽게 익힌다.

때론 세가지 언어 환경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명수형은 태국어를 배우려고 일부러 시골에 들어간게 아니었다.

그냥 태국의 자연이 좋고 태국인이 좋아서 시골살이를 하게 되었고 처음부터 태국어에 그렇게 집착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국에서의 생활을 완전히 접고 모든것을 잊고 싶었다.


그리고 한국인은 단 한명 자기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치 컴퓨터를 리셋하는 것처럼 모든것을 내려놓고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태국인으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시골에서 어린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하루종일 태국어만 접하게 되자 굳게 닫혀있던 언어 습득의 문이 열리면서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느날부터 자기가 외국어를 한다는 느낌이 사라지고 태국인들이 하는 말이 자연스럽게 귀에 들리고 의미가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자기가 태국어를 배우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어떻게 태국어를 잘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그냥 어쩌다 보니 잘하게 되었다라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몇년의 시간이 흐르고 수중의 돈도 거의 다 바닥이 나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까  말까 숙고하던 명수형은 그동안 세상이 바뀌고 한국에서 태국으로 관광을 가는 현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시절 드디어 한국도 해외여행 자유화라는 큰 문이 열렸고 일반 국민들도 여권을 쉽게 만들 수 있었다.

그 이전 시대에는 여권을 발급 받기가 쉽지 않았다.

관광 목적의 여권 발급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태국과 방콕으로의 관광을 준비하고 있던 여행사의 책임자들과 직원들이 방콕으로 들어와서 상품개발을 하기 시작했다.

방콕에 한국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완벽한 준비도 되기 전부터 비행기가 취항하고 한국관광객이 밀려들고 있었다.


김명수씨는 시골에서 몇년을 보내고 돈이 떨어져가자 한국으로 가기위해 방콕으로 나왔다가 이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너무나 당연한듯이 여행사에서 가이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을 나가기만 하면 많은 돈을 아주 쉽게 벌었다.

여행상품 가격 자체가 마진이 남는 상태였고 손님들은 많은 쇼핑을 했고 쇼핑샾에서 받는 커미션도 많았다.

이때는 누구라도 여행사를 차리기만 하면 손님을 받을 수 있었고 돈도 벌 수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때를 보자면 꿈같은 일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김명수씨는 원래부터 독서를 많이 했고 다방면에 걸쳐 많은 인관관계를 통해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이었다.

또  화술이 훌륭했고 목소리에 힘도 있었다.

거기에 거의 현지인처럼 말하는 태국어 실력까지 있었으니 태국에서 가이드를 하기에는 그야말로 호랑이가 날개까지 단 격이었다.


명수형의 가이드 실력은 금방 알려졌다.

손님들은 명수형의 설명과 해박한 지식에 감탄을 했고 차가 멎춰서자 기립박수를 하기도 했다.

여행사 사장들은 서로 가이드를 해달라고 명수형을 찾기 시작했고 명수형의 주가는 오르기만 했다.

명수형의 주머니는 두둑해지다못해 터질 지경이었고 은행통장의 잔고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불과 몇달 전에 가진 돈이 바닥나 한국으로 돌아가야할 처지였지만 상황이 바뀌어 이제는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계속 돈을 벌어들이는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ㅡ 돈이 사람을 따라야지 사람이 돈을 따르면 안된다 ㅡ 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그랬다.

그 당시를 회상하며 명수형이 하는 말이 " 정말이지 돈이 따라오는데 뿌리칠 기운도 없었다  쉬고 싶은데 쉬지도 못하게 손님들이 밀려왔고 손님들은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쇼핑샆에 들어가면 싹쓸이 쇼핑을 해댔고 커미션이 얼마나 생기는지 일일히 챙길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몇년을 정신없이 지나고보니 명수형의 통장에는 꽤 큰 금액의 통장잔고가 찍히고 있었다.

그 돈으로 명수형은 승용차를 한대 구입했다 .

BMW530 이었다.

그리고 콘도 (아파트) 한채를 구입했다.

단지 가이드만 했는데도 방콕 시내에 번듯한 집 한채와 멋진 고급 승용차를 살 정도로 많은 돈을 번 것이다.

사업가가 아닌 순전히 가이드만해서 집과 차를 산 최초의 가이드 김명수

명수형의 성공은 후배 가이드들의 동기부여가 되었다.


1997년 부터 가이드를 시작한 내 입장에서 생각해도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그때 이후로는 가이드가 그렇게 많은 돈을 벌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1세대 가이드들의 여러 증언을 들어보면 그때는 가이드들의 돈벌이가 어렵지 않았다.

보통 투어의 마지막 날 쇼핑을 한다.

쇼핑을 하는 품목은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그중 한가지는 고가의 곰을 잡는 것이다.


하루는 명수형이 가이드 일을 나갔다.

손님들은 한국의 모 대기업 임원들과 그들의 지인들이었다.

그때만해도 곰을 잡아서 쓸개를 꺼낼 때였다.

여기서 곰을 잡는다는 것은 직접 손님들이 보는 눈앞에서 곰을 죽이고 배를 갈라 곰의 쓸개를 꺼내어 주는 걸 말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그런게 정말 가능했었다는게 믿기 어렵다.

한 사람이 한마리를 사겠다고 주문을 하자 너도 나도 주문을 했고 

총 다섯마리의 곰을 예약했다.


관광객 한팀에서 곰 다섯마리가 죽어나간 것이다.

이것도 기록이라면 기록이다.

한팀에 곰 다섯마리의 기록

정말 전설같은 믿기 힘든 이야기다.


곰과 관련한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한개 더 있다.


어떤 가이드가 손님에게서 곰을 한마리 사서 쓸개를 갖고 가겠다는 주문을 받았다.

그런데 손님이 원하는 것은 가슴에 반달무늬가 있는 반달곰의 쓸개였다.

가이드가 곰집에 전화를 해서 반달곰이 있느냐고 물으니 반달곰은 다 팔리고 없고 지금은 그냥 흔한 불곰만 있다는 것이었다.


손님에게서 돈을 얼마를 주더라도 꼭 반달곰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주문을 받은지라 가이드가 곰집 사장에게 어떻게든지 구해달라고 통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돈은 얼마든지 주겠으니 곰집에 갈 때까지 꼭 반달곰을 구해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다.

투어의 마지막 날 밤이되어 손님들과 헤어진 다음 곰집에 전화를 해보니 아직도 반달곰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가이드가 말했다.

내일 오후에 약속시간에 곰집에 갈때까지 곰의 가슴에 반달을 그려넣으라고....


투어의 마지막 날은 쇼핑을 많이 한다.

그날도 쇼핑샆을 한군데 한군데 거쳐가다가 마침내 곰집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좋지 않았던 날씨가 급기야 소낙비로 바뀌어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가이드가 곰집에 도착하기 오분 전에 전화로 곧 도착을 한다고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하는 바람에 곰을 잡는 직원이 곰을 잡기위해 곰을 케이스 바깥으로 꺼내 놓았다.


손님들은 곰집 입구에 멈춰선 버스에서 직원들이 받쳐준 우산 속으로 뛰어들었고 대문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손님들은 비가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처마밑에 서서 곧 벌어질 곰 잡는 구경거리를 볼 기대에 들떠 있었다.


가이드와 곰집 사장의 인사가 끝나고 서둘러 곰을 잡으라는 가이드의 사인을 받은 직원이 칼을 들어 곰의 배를 가르려는 순간 모든 사람이 보고 말았다.

불곰의 가슴에 반달곰의 V자를 그려놓았던 한얀색 수성페인트가 빗물에 씼겨 흘려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손님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누구하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를 맞으며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고 그 뒤를 따라서 태국가이드와 한국인 가이드가 버스에 올라탔다.

영문을 모르고 기사 대기실에서 쉬고 있던 버스 기사는 곰집 직원의 말을 듣고 버스에 오른 뒤 역시나 아무런 질문도 없이 다음 코스로 운전만 해나갔다.


사람의 잘못이란 대부분 욕심에서 생긴다.

돈에 대한 욕심 그 욕심을 내려놓을 줄 몰랐던 그 가이드는 툭툭히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같은 업계에서 똑 같은 일을 했던 한 사람으로서 할 말이 없다.

태국 관광 30년의 역사에서 정말 있어서는 안될 일은 또 있었다.


어느날 한 가이드가 공항에 미팅을 나갔다.

인센티브팀 이었다.

공항에 도착하는 손님들은 크게 두 종류의 팀으로 분류된다.

먼저 페케지팀이다.

이 팀은 광고를 보거나 동네 여행사 사장의 추천으로 가격과 투어코스가 미리 다 정해져 있는 여행상품을 선택해서 오는 팀이다.

그래서 서로 모르는 손님들끼리 한 팀이 되어 같이 움직여지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팀이다.


두번째는 인센티브팀이다.

페케지 투어가 기성복이라면 인센티브팀은 맞춤양복과 같다.

출발 전부터 호텔과 식사 투어코스등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모두가 한 팀이다.

당연히 인센티브팀이 돈이 더 많이 든다.

쇼핑샾에 가는 것도 한 두군데 갈 곳을 미리 정할 수도 있고 아예 노쇼핑으로 정할 수도 있다.

페케지팀과 인센티브팀은 모두 일장일단이 있어서 어느것이 좋다 나쁘다  말 할 수 없다.

다만 팀의 성격이 다름으로 가이드가 행사를 할 때도 다르게 할 수 밖에 없다.


보통 인센티브팀은 한국에서부터 인솔자가 따라온다.

유럽 여행은 페케지로 가도 공항에서부터 인솔자가 같이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태국여행은 인센티브팀만 인솔자가 오고 그리고 인솔자는 현지 가이드보다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진다.

대부분의 인센티브팀은 한국여행사의 사장이 오는 경우가 많다.


권모라는 가이드가 공항에서 미팅을 끝내고 손님들께 잠시후에 출발할 것을 안내하고 약간의 자유시간을 주고 인솔자와 만났는데 인솔자가 가이드의 손을 잡고 공항청사 밖으로 나가더니 호소하듯이 말했다.


"저를 좀 살려주셔야 겠습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가이드는 인솔자와 협력해서 일해야 하고 서로 호흡을 맞추기도 하고 잘 대해주는게 보통이라서 인솔자가 가이드에게 처음부터 저자세로 나오는건 거의 없는 것이다.


충남의 한 도시에 있는 여행사의 사장이었던 인솔자는 근처 시골에 사는 동네 사람들로 꾸려진 팀을 하나 설계하면서 중대한 잘못을 범했다.

태국관광을 설계하면서 팀원 중 대표자들과 교제를 위해 식사 접대를 하는것 까지는 좋았는데 식사가 끝나자 자리를 옮겨 벌어진 화투판에까지 끼여든 것이다.


그러다가 가진돈을 다 털리고 말았다.

반쯤 이성을 잃어버린 사장이 돈을 빌려달라고 하자 팀원들은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장이 한가지 제안을 했다.

이번에 태국관광을 가는김에 베트남까지 보고 오자는 제안이었다.

그럴려면 일인당 여행사에 지불하는 돈이 훨씬 더 높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일행들과 태국+베트남까지 관광하는걸로 즉석에서 결정하고 그 자리에서 수백만원의 돈을 빌린 여행사 사장은 또다시 그돈을 몽땅 다 잃고 말았다.


그리고 날짜가 되어 팀을 인솔하고 방콕으로 들어온 것이다.

손님들은 당연히 태국과 베트남 두군데를 다 여행할 것으로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손님들과 호텔에 도착한 가이드와 팀원들은 모두 각자의 방을 배정받고 입실을 끝냈지만 인솔자의 방에는 사장과 권모 가이드 태국 가이드 세명이 함께모여 심야의 대책회의가 벌어졌지만 답이 나올리가 없었다.

밤 늦은 시간이었지만 가이드가 소속된 방콕 현지 여행사 사장에게 전화로 사정을 알렸고 모든것을 가이드에게 일임할테니 잘 해결하라는 언질을 받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인솔자가 손님 대표 몇 사람에게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태국 방콕 +파타야 여행을 왔는데 뜬금없는 베트남관광이라니....

해법이 있을 수가 없었다.

백번을 양보해서 생각하더라도 이웃나라 캄보디아라면 말은 된다.

국경이 맞닿아 있고 파타야에서 빨리 서너시간 달리면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허지만 베트남은 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다.

베트남을 육로로 가려면 반드시 캄보디아를 거쳐서 가야한다.

물론 방콕에서 베트남까지 비행기를 타고가면 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처음부터 인솔자에게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였고

당연히 비행기 티켓도 예약이 없는 상태였다.


인솔자의 요구는 간단했다.

버스로 베트남을 갔다 오자는 것이다.

그것도 4박5일의 일정안에 갔다와야 하는 것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손님들이 베트남에 갔다 왔다고 믿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사기를 쳐달라는 부탁이였다.


심야회의가 끝나갈 무렵 세사람은 손님들을 속이기로 모의를 하고

다음과 같은 약속을 했다.

 1. 태국 칸차나부리를 베트남으로 한다.

 2. 손님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칸차나부리에는 밤늦게 들어간다.

 3. 다음날 아침 일찍 손님들을 이동시켜 국경을 ? 넘는다.

 4. 버스 기사와 태국가이드에게는 보통때의 3배의 수고비를 준다.

 5. 마지막 날까지 계속해서 손님들에게 술을 많이 먹이고 정신 못차리게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손님들 대부분이 해외 여행은 처음인데다 태국이 어디에 있는지 베트남이 어디에 있는지 지식도 없고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었고 대다수가 술을 좋아하고 저녁이면 화투를 치는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사기를 치기 좋은 팀이었다.


그렇게 결정을 하고 각자의 숙소로 돌아간 일행들은 다음날 아침 일찍 호텔에 모였고 다시 한번 계획을 점검하고 버스 기사에게도 알리고 협조를 요청했다.

그리고 투어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진행이 되었다.

원래 방콕1박 파타야3박을 하게되어 있었으나 파타야에서 2박만 하고 일박은 칸차나부리에서 하기로 호텔을 바꾸었다.


오전에 왕궁투어와 차오프라야 선상투어를 마치고 식사를 하고 파타야로 달렸다.

다음날은 오전에 산호섬을 다녀오고 오후에는 농녹빌리지 관광을 하고 저녁식사 후에는 파타야 관광의 상징 알카자쇼를 관람했다.


일정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온 일행들은 예상대로 방 한곳에 모여 가져온 소주를 마시기도 하고 화투를 꺼내어 펼쳐놓고 밤늦게까지 놀았다.


날이 밝고 드디어 베트남으로 ? 떠나는 날이 되었다.

졸지에 베트남이 되어버린 칸차나부리는 예전의 영화 콰이강의 다리로 유명한 곳인데 파타야에서 가자면 베트남 방향이 아닌 거의 정반대 방향인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칸차나부리는 지금도 매년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와 포로들의 희생을 기념하기위한 기념식이 열린다.

일본군에 의해서 콰이강의 다리를 포함한 대략 400킬로의 철로를 건설하다가 수 많은 연합군 포로들이 희생되었으며 그중에는 한국인 징용포로들도 있었다.


파타야에서 칸차나부리를 가려면 대략 5 시간 정도가 필요하다.

날이 환해서 도착하면 손님들이 눈치챌 염려가 있으므로 일부러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래서 일정에 없던 수상시장을 넣고 식사 시간도 최대한 길게 잡는등 시간을 끌다가 밤이되어 사방이 컴컴해지자 칸차나부리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동안 앉아서 맘을 졸이던 가이드가 손님들을 향해 일어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 여러분 오늘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저희 버스는 잠시후에 베트남 관광특구 지역에 들어서게 됩니다.

베트남 국경에 도착하면 입국도장을 받아야하니 각자가 소지하고계신 여권을 꺼내서 손에 들고 계시기 바랍니다. 저희 여행사에서는 베트남 관광청과 특별한 계약관계에 있으므로 손님들이 차에서 내리실 필요가 없고 이미그레이션 직원이 버스에 올라 손님 여러분의 여권에 입국 도장을 찍어드릴 것입니다" 


가이드가 그밖에 이런저런 말을 이어가는데 버스는 칸차나부리 경찰초소 앞에 멈춰섰다.


초소를 지키던 경찰관이 밤늦은 시간에 웬 버스인가 하고 쳐다보았다.

재빨리 내린 태국가이드가 초소안에 들어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돈봉투 하나를 찔러주자 경찰관이 자기 출근도장을 들고 버스에 올라탔다.

손님들은 여권을 내밀고 경찰관은 한사람 한사람 여권을 살피는듯 하며 출근도장을 찍어주고 거수 경례를 하더니 차에서 내렸다.


가이드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 자 여러분 이제 우리는 베트남 국경을 통과해서 호텔로 가겠습니다.

호텔까지는 삼십분정도 걸립니다.

비록 하룻밤만 묵고 내일 아침 일찍 호텔에서 나와야 하지만 베트남에서의 좋은 추억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한국에서부터 여러분을 인솔해오신 우리 사장님께서 오늘 저녁 베트남 양주를 얼마든지 쏜다고 하십니다. 자 박수 한번 쳐주십시요."

큰 박수가 나오고 분위기가 좋아졌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방을 배정하고 인솔자의 방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미리 준비해둔 태국술 쌩쏨을 여러병 내놓고 얼음과 콜라와 안주등 미리 준비했던걸 모두 내놓았다.

쌩쏨이 얼마나 독한 술인지는 먹어본 사람이면 안다.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쉬움을 달래려는듯 사람들은 거침없이 술잔을 들이켰고 얼마안가 쌩쏨 여러병이 모두 바닥나고 사람들은 취기에 비틀거리며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한시간 빨리 모닝콜이 울리고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식당에 모이기 시작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일정에 늦지 않으려면 빨리 가야한다는 가이드의 말을 따라 사람들은 신속하게 버스에 올라탔다.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았다.

" 여러분 어제 잠 잘주무셨습니까? 오늘은 우리가 다시 태국으로 가야합니다. 이곳 베트남 관광특구는 보다시피 아직 이렇다하게 볼거리가 많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대략 세시간 후에 우리는 다음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여기에서 태국으로 갈때는 올때처럼 출입국 도장을 안받아도 됩니다.

저희 여행사와 그렇게 컨텍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지금부터 도착할 때까지 주무시도록 조용한 음악을 틀어드리겠습니다.

자 이제 주무십시오"


버스는 무사히? 태국으로 돌아왔고 나머지 일정이 진행되었다.

밤이 되자 방콕 공항에 도착했고 손님들의 여권을 모두 모아 단체 보딩을 한 다음 손님들을 모두 공항안에 보내드린 후 인솔자와 가이드와 태국가이드가 남았다.

사장은 가이드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여러차례 한 다음 봉투를 하나씩 주고 손을 흔들며 공항 안쪽으로 사라졌다.


살다보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압력일 수도 있고 유혹일 수도 있다.

이기지 못하는 자는 죄를 짓게된다.

이기는 자는 당장은 손해를 보는듯 하지만 두고두고 깨끗한 양심을 지켰음을 자부할 수 있다.

지는 자는 당장은 약간의 이익이 있는듯 하지만 오래도록 양심이 괴롭다.


내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던 권모가이드도 그랬다.

자기가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사람을 기망하고 사기에 적극 동참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웬지 가슴속 한 곳이 편치 않다고 한다.

쓸쓸히 웃으며 이 사연을 토로한 뒤 터덜터덜 걸어서 가는 뒷모습이 힘이 없어 보였다.

사람은 때로 뒷모습으로 말을 한다.

얼굴 표정과 앞모습은 꾸밀 수 있어도 뒷모습은 꾸밀 수 없는 법이다.

뒷 모습이 듬직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수 밖에 없다.


한국이 IMF 체제로 들어가던 해 1997년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한 해일  것이다.

그해 봄 2년 동안의 기다림 끝에 홍콩으로 가는 편도 항공권을 예약하고 비행기를 탔다.

처음 도착한 홍콩이지만 가이드북을 보며 시내로 들어왔고 침사추이역 근처에 있는 청킹맨션에 방을 잡았다.

그 다음날은 먼저 청킹맨션 14층에 있던 타임트래블 여행사에 올라가서 삼일 뒤에 방콕으로 들어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삼일이 지나 홍콩에서 예약한 날에 공항에 갔는데 비가 몹시 퍼붓기 시작했고 거칠게 바람이 불었다.

보딩을 하기위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시간이 되었는데도 직원들은 대기만 하고 있었다.

잠시 후 한 사람이 확성기를 손에 들고 나와서 영어로 안내 멘트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허리케인 때문에 비행기가 뜰 수 없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이곳에 와야한다. 지금 밖에 나가면 호텔로 가기위해 버스가 대기중이니 버스에 타라. 호텔비와 저녁 식사와 내일 아침은 물론 중식까지 모두 무료로 제공할 것이다."


3일동안 돈을 아끼려고 비좁은 청킹맨션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냈는데 호텔에서 공짜로 하루를 재워준다니 비행기를 타지 못하게 하는 날씨가 고마웠다.

태국에 빨리 가야할 이유도 없는터라 내게는 행운이었다.

도착한 호텔은 아마도 4성급 정도되는 호텔이었는데 게스트하우스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소나기가 내리고 굉장한 크기의 태풍이 덥치는 홍콩의 마지막 날 밤

창밖으로 시선을 두고 오래도록 생각에 잠기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은 점심을 먹고 호텔에서 나와 공원에 갔다가 약속된 시간에 호텔에 돌아오니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은 비행기가 무사히 출발을 했고 돈무앙 공항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카오산로드에 도착하니 이제 비로소 긴장이 풀리고 방을 잡고거리로 나오자 카오산 로드가 주는 독특한 분위기에 금방 젖어들었다.


카오산 로드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따로 길게 설명하지 않겠지만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유흥가 분위기는 아니였다.

수많은 게스트하우스와 식당과카페들 그리고 여행사와 노점상들이 적절하게 섞여있었고 무엇보다도 배낭 여행객들이 가장 신경쓰는 물가와 치안이 좋았다.

사실 태국의 치안 상태는 지금도 큰 문제는 없을 정도로 양호하다.

 그 다음날 부터는 태국의 여러곳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가장 좋았던 곳은 코창이었다.

유흥시설이 거의 없고 섬 전체가 리조트와 호텔과 저렴한 게스트하우스 그리고 약간의 여행사와 가게들이 있었다.

코창은 아무리 작더라도 거의 모든 숙박시설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

바닷가 바로 옆에 붙어있는 숙소를 구하면 그냥 숙소내에서 먹고 자고 할 수 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바다를 보고 쉬다가 잠시 바다에 들어가거나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다시 쉬다가 때가 되면 식사를 하는 시간이 얼마나 한가롭고 여유있는지 모른다.


읽고 싶은 책이나 몇권 가져가면 그야말로 완벽한 휴식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한달 두달 태국 곳곳을 여행을 다니다보니 가진 돈도 줄어들었고 방콕에 방을 얻고 일을 하고 싶었다.


태국에 오기 전에 관광학원을 다녔었다.

3달짜리 단기 과정이었는데 그나마 두달 정도 지나자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어쨌든 거기를 통해서도 이런저런 배울것은 있었다.


관광잡지에 실려있던 구인 광고를 통해서 윙리버콰이 여행사를 알게 되었고 방콕에 와서 연락을 했다.


전화를 받고 약속장소에 갔더니 키가 작은 20대 중반의 청년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자신을 백과장 이라고 소개했다.


그무렵 거의 같은 시기에 또다른 4명의 신입가이드가 있었고 우리는 모두 백과장이 소개해준 같은 콘도에 방을 얻었다.

방세가 저렴했다.

보증금은 방세의 3배 한국과 비교하면 정말 부담없는 금액이었다.


백과장은 우리들이 은행통장을 만들때에도 도움을 주었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도와 주려고 했다.


아직 태국어가 안되는 우리들은 태국어를 배우기위해 애를 많이 썼다.

한편으로는 호텔마다 찾아다니며 브로셔를 모으기도 하고 지리를 익히기 위해서 땀을 흘리며 몇시간씩 방콕시내를 걷기도 했다.


그리고 고참 가이드들이 일을 나갈때는 한 두명씩 버스를 같이 타고 가이드가 어떻게 행사를 하는지 보고 배웠다.


그렇게 한두달이 지났는데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어제까지도 멀쩡하던 백과장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연락을 받고 모든 팀원들이 사무실로 모였고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다.

전날 밤 함께 살던 태국 여자 가이드와 심하게 싸우고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급히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을 했고 바로 그날 밤에 친형이 방콕에 들어왔다.

장례식은 방콕 시내에 있는 절에서 했고 유해는 화장되었다.


가이드로서 첫발을 내딛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을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백과장과 함께 했던 태국 여자 가이드는 스스로 여행업계를 떠났고   이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이십대의 한창 꿈 많은 나이에 세상을 버렸고 사라졌다.


그 사건 이후 여행사를 옮겼다.

새로 옮겨간 여행사에서 봉고차에 탈 수 있는 정도의 손님 수가 적은 팀들을 행사하면서 가이드로서 경험을 쌓아가고 있었다.


가을이 지나갈 무렵 

한국 소식이 흉흉해지더니 한국이 경제적으로 망했다는 소식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악몽같이 느껴지던 IMF 사태가 터지고야 말았다.


경제적인 혼란이 오면 제일 먼저 타격을 입는건 언제나 여행업계다.

사무실 벽면에 걸려있던 화이트보드판에 써있던 예약 팀들이 하나씩 하나씩 취소되어 지워지더니 아예 한 팀도 남지 않고 모두 취소되었다.


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모든 한국인이 운영하는 현지 랜드사들이 똑같은 처지였을 것이다.

사무실에 가이드가 올 일이 없었고 사장과 사무실 근무하는 여직원들도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선택을 해야했다.

속히 한국에 나오거나 태국에 남아서 기다리는 것 .

한국에 돌아가자니 반겨줄 곳도 없었고 태국에서 버티자니 가진 돈이 부족했다.

진퇴양난 이었다.

사람이 살면서 어려운 처지에 한번도 처해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태국에서계속 남아있는 것을 선택했다.친형님께 연락을 드려서 당분간은 살아갈 송금을 받았고 또 카오산 로드에서 시간을 보내면 크게 돈 들어갈 일도 없었다. 


그때 카오산 로드에는 몇개의 한국인이 운영하는 업소가 있었다.

다리형으로 불리던 김영석씨가 운영하던 홍익인간과 하대장이라는 별명을 쓰던 만남의 광장 하대호씨가 있었다.


두 집은 모두 배낭여행을 떠나온 한국인을 위한 게스트하우스겸 식당이었고 늘 배낭족들이 있었다.

 가끔 태국인이 오기도 하고 서양인들이 와서 한식을 먹기도했다.

홍익인간은 현재까지도 남아있으나 만남의 광장은 몇년 후 사라졌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많은 인연이 생겼다.

그중에는 지금까지도 형과 동생사이로 가깝게 지내고 있는 이충학이란 동생이 있다.

한마디로 의리의 사나이다.

단순한 사람이기도 하고 순수한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주먹을 휘두르며 싸움부터 했다.


만남의 광장을 다니던 충학이를 무슨 이유 때문인지 좋지 않게 보고있던 하사장이 나한테 전화를 해서 아주 고약하게 생겨먹은 거구의 나쁜 깡패 한놈이 와서 카오산로드를 휘젓고 다니는데 제지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사장의 말을 믿었던 나는 한동안 지내고 있던 파타야에서 방콕으로 올라와 만남의 광장으로 갔다.

여러사람이 앚아 있는데 그중 한눈에 봐도 덩치크고 인상적으로 생긴 한놈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둘이서 주먹다짐까지 하고서야 사람들이 말렸다.

화해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먼저 사과를 하자 쿨하게 받아주는 자세가 남자다웠다.

이후 급격하게 가까워진 우리는 현재까지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자초지종을 다 들은 나는 하사장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충학은 깡패가 아니었다.

부산의 부자집 장남으로 태어나서 대학까지 마치고 선친에게 물려받은 사업을 하던 사업가였다.

가난한?  배낭족들에게 통크게 밥과 술을 사주기도 하고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도 돈을 낼 때가 되면 제일 먼저 카운터로 가는 사람이다.

지금도 부산에 가면 나를 위해 모든 대접을 아끼지 않는 동생이다.

태국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점도 나랑 닮은 점이고 모든 면에서 호흡이 잘 맞는 사람이다.

별명이 람보 로 불리는 이충학은 인상적인 생김새 때문에 가끔 폭력단원으로 오해를 사는 일이 있을 뿐이었다.


만남의 광장에서 만난 사람중에 잊지못할 또 한명이 있다.

별병이 이장 이었다.

왜소한 체격이었으나 태국어를 아주 잘했고 한국에서 외국어대학교와 방콕의 왕립 출라롱콘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인데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어찌어찌 방콕에 들어와 가이드를 했었고 꽤 많은 돈을 벌었음에도 모은 돈은 없었다. 

IMF로 어려워지자 나처럼 한국에 나가지 않고 언제인지 모를 기다림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만남의 광장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왔었고 자연스레 가깝게 지냈다.

이장에게 태국어를 배우기도 하고 같이 방콕의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꽤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이장이 어느날 컴퓨터 전시장에 갔다가 휴렛패커드에 다니던 태국 여직원을 알게 되었고 두사람은 가깝게 사귀었다.

이름은 별칭이지만 쭈이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나도 같이 만날 기회가 있었고 쭈이의 회사 동료들과도 어울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 비로소 쭈이의 안내로 방콕의 고급 레스토랑에 가 볼 수 있었다.

제국 제일의 대학 출라롱콘을 졸업하고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던 쭈이는 자그마한 키와 단정한 얼굴이었는데 배려심이 깊은 여자였고 내가 개인적으로 만나본 태국 사람중 최고 수준의 인성을 소유한 여자였다.

영어와 태국어가 짧은 나를 배려해서 대화를 이끌어 나갔고 유머 감각도 풍부하고 무엇보다 한없이 밝고 명랑한 성품을 가졌었다.

가깝게 지내는 동생에게 좋은 애인이 생긴것이 참 좋아보였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이장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쭈이의 승용차를 자기 차 처럼 몰고 다니기 시작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교통 사고를 내기도 하고 쭈이의 신용카드를 가지고 혼자 몰래 유흥가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꽤 큰 금액의 카드 청구서를 날아오게 만든 후 어디론가 잠적을 해버렸다.

이장의 행동을 전혀 모르고 있던 나에게 쭈이가 전화를 해왔다.

내 전화번호를 사전에 이장에게서 알아놓았던 것이다.


약속된 장소에 가서 쭈이를 만났고 내게 질문을 해왔다.

나와 이장이  얼마만큼 아는 사이인지 이장이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지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그정도의 말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쭈이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방콕에서 알게된 사람이고 가이드를 했었고 그렇지만 한국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전혀 모른다고....

그랬더니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쭉 언급하며 이런 일들이 있었고 지금은 연락조차 안되는데 이장이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것 같지 않아서 슬프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금전적인 손해가 아니라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것 같지 않았다고 생각되는게 슬프다는 것이었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주고는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몇달 후

카오산 로드에 나갔다가 길에서 이장과 마주쳤다.

다짜고짜 이장의 멱살을 잡고 근처 만남의 광장으로 들어갔다.

마침 하사장은 가게에 없었다.

내가 쭈이를 만나서 들은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고  삐딱한 말이 나오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 죽어가는 표정을 짓던 이장이 입을 열었다.

쭈이를 만나서 좋았지만 밤에 유흥가에 다니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쭈이의 카드를 쓰게 되었는데 그게 쌓여서 그렇게 되었노라고

참 할 말이 없었다.

고작 휴흥가에 가고 싶은 유혹을 못참아서 애인의 가슴에 상처를 주다니....

이장과 헤어지고 쭈이에게 전화를 해서 통화를 했고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그러니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


얼마쯤 시간이 흘러 다시 쭈이에게서 전화가 와서 받았는데 한번 만나자는 것이었다.

나는 거절했다. 더 이상 너를 만날 일이 없다.

이장과 관련해서도 더 이상 해줄 말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쭈이가 마지막 한마디를 내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 한마디는 내가 죽을 때까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잘못된 만남만큼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건 없을 것이다.

좋은 만남을 잘 이끌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젊은 청년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른다.

만약 젊은 사람이 분별력과 지혜가 있다면 그 사람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나갈 확률이 크다.


방콕에서 가이드를 하면서 내가 처음으로 실장을 하게된 여행사는 한싱여행사이다.

원래는 한국과 싱가포르를 하던 회사였는데  방콕에 사무실을 내고 태국 투어까지 하게 된것이다.

내가 한싱여행사에 들어갈 무렵에는 황사장이 맡고 있었다.

필드에서 여러번 보기는 했어도 한싱여행사에서 처음으로 한솥밥을 먹게 되었던 것이다.


황사장은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태국에 들어와서 가이드를 했으나 그리 오래지나지 않아서 한싱여행사를 하게 된 사람이다.

체격이 크고 골프를 좋아하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모질지 못했다.

쉽게 말해서 착한 사람이다.


사람이 착하면 사람들에게 쉽게 휘둘린다.

덩치는 크지만 기질이 온유한 황사장은 늘 사람들과 편하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어 나갔다.

여행사도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었고 특별히 걱정거리가 될 일도 없었다.


아무런 걱정없이 볼보차를 타고 골프치러 다니고 맛있는거 먹으러 다니고 평탄하게 살던 황사장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사람은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그런데 잘될 사람은 끝내 잘되고 만다.

아니 복있는 사람은 그사람을 어떻게 거꾸러뜨려도 오똑이처럼 일어나 그전보다 더 좋게 되고만다.

내가 황사장을 보면서 많이 했던 생각이다.


황사장에게 잘못된 만남이 시작되었다.

허조 (가명)라는 사람을 가까이 하게 된 것이다.

결론부터 먼저 밝히는게 낫겠다.

허조 라는 사람은 결국 같은 한국인에게 총을 맞고 죽었다.


나는 내 글에서 추호도 특정 개인을 비난하거나 무시할 생각이 없다.

다만 내가 아는 사실을 내가 아는 한도내에서 담담하게 기술할 뿐이다.


허조를 가까이 하던 황사장은 허조의 안내를 받고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에 있는 카지노에 갔다.

카지노에서 하루만에 모든것을 다 잃고 허조의 보증으로 백만바트의 빚까지 지고 말았다.

백만바트면 한국돈으로 삼천만원이 넘는 큰 돈이었다.

졸지에 알거지나 마찬가지가 된 황사장에게  허조가 도박빚을 갚으라고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좋은 말로 하던 협박은 점점 더 강해지더니 급기야 날짜를 통보하고 그때까지 돈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황사장의 손가락을 자른다는 협박이 들어왔다.


골프채와 가방 하나만 챙긴 황사장은 비행기를 타고 태국을 떠났다.

그리고 마침내는 캐나다에 도착했다.

토론토에 도착한 황사장은 그곳에 살고 있던 사촌형제들의 도움으로 한국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에 들어갔다.

방콕을 내집처럼 거칠것 없이 활개치며 자유롭게 살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모든것을 잃고 물가 비싼 토론토의 작은 방하나에 들어 앉은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러나 황사장은 언제나 밝은 사람이었다.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그는 그곳에서 살아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십대 초반의 한국 남자를 쉽게 받아줄 직장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매일 아침 식사를 마치면 공원에나가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태국의 화려한 생활이 갑자기 끝나버린 공허감에 많이 시달렸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그렇게 몇달이 지나자 토론토 한인 골프대회가 열렸다.

처음 출전한 대회에 나간 황사장은 우승을 했다.

그리고 알게된 사람들과 교제를 하기 시작했고 몇명의 아이들을 소개받아 골프 레슨을 시작했다.

이제 하숙비 정도는 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날 하숙집 주인과 술을 하잔하며 깊이있는 교제를 하던 황사장은 하숙집 주인과 오래전 한국에 있을때 가까운 동네에 살았었던 인연이 있었고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의 교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에 대해 신뢰가 쌓이고 친구가되어 가깝게 지내게 되자 황사장의 캐나다 생활도 겉으로는 안정되어 가는 듯 보였다.


그런던 어느날 하숙집의 주인이 서울에 살고있는 자기의 사촌 여동생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소개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소개받을 여자의 나이는 황사장보다 대여섯살 작았고 모 대기업 회장의 자서전을 대필작가로서 쓴 인연으로 회장의 제안에 따라 그 회사의 사보 제작을 맡아서 만들고 발행까지 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황사장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들어온 황사장은 약속 장소인 강남의 인터콘티넨탈 커피숍에 나가서 소개받을 여성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커피숍에 꿈에서라도 보이면 몸서리쳐질 허조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만일 선보는 자리에 허조가 난입해서 폭력단의 조직원처럼 거칠게 굴면 어떻게될까! 참 난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커피숍으로 들어오던 허조가 유달리 덩치가 큰 황사장을 발견하자 자기도 꽤나 놀라는 눈빛을 보였다.

태국에 있던 허조도 자기의 볼일을 보려고 한국에 나왔다가 우연히 호텔 커피숍에 들렸고 황사장을 본 것이다.


다행히 황사장이 벽을 등지고 앉아서 가까이 다가와 쏘아보는 허조의 눈빛을 선을 보는 상대방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선을 보는 자리라는걸 눈치챘는지 허조가 집게 손가락을 들어올려 까딱거리며 인철형을 불러냈다.

잠깐 실례하겠다는 말을 하고 허조를 따라나선 두 사람은 화장실에 들어갔다.

서서 볼 일을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한 두 사람은 금새 합의를 봤다.

길게 시간을 끌 상황이 아니였다.

황사장이 다시 태국에 들어오고 일을 시작해서 허조가 보증선 도박빚을 갚아나가기로 한것이다.


만일 황사장이 도박을 하지 않았다면 캐나다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랬으면 지금의 형수는 못 만났을 것이다.


무려 일년만에 태국으로 돌아오는 황사장은 무척이나 들떠있었지만 한편으론 또 다시 협박을 해올것이 분명한 허조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리가 없었다.

다시 만난 황사장의 얼굴은 좋아보였다.

한싱여행사를 다시 살리는 것을 포기하고 황사장의 친한 후배가 운영하는 와이드투어 여행사에 우리가 합류하기로 했다.

황사장은 이사로 나는 또 다시 실장을 맡기로 했다.

황사장과 형수가 되실분은 국제 전화로 교제를 이어나가다가 마침내 서울의 한 성당에서 결혼식을 했다.

신부측 손님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미 고인이 되신 황사장의 부모님때문인지 신랑측 하객은 몇명 안되었다.

화환이 수십개가 나열된 가운데 신랑측에서는 달랑 한개의 화환이 왔다.

보낸 사람은 파타야 가는 길목에 있던 란파타야 라는 이름으로 휴게실을 하던 사람이었다.

한국을 떠나 있던 세월이 길어질수록 예전에 지인들에게 초대장을 보내는게 미안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경조사에 연락을 끊고 사는것이 교민들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악착같이 도박빚을 받아내던 허조는 또 다른 악연을 맺은 사람과 극단적인 언행을 주고받던 끝에 총을 맞고 죽었다.

황사장의 도박빚이 자동으로 소멸되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황사장은 형수의 사업때문에 한국에 나왔다가 베트남으로 거처를 옮겼고 나에게도 베트남으로 오라는 권유를 하였으나 나는 가지 않았다.

한번 놀러만 갔을 뿐이다.

베트남에서 쇼핑샾을 운영하던 황사장은 몇번 실패의 아픔을 겪었으나 다낭으로 옮겨서 쇼핑샾을 다시 시작했고

베트남 다낭의 성장과 함께 폭팔적으로 늘어난 관광객 덕분에 마침내 어느정도 성공을 했고 더 이상 돈 걱정은 안하고 살만큼 되었다.

몇년전에 다낭에 가서 살아볼까 들어간 내가 몇달 후 다시 태국으로 돌아올때도 금전적인 큰 도움을 주었다.

언젠가 갚아줄만큼 나도 잘되면 좋으련만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다.

-------2편으로 계속 -------




















13 Comments
Vagabond 06.22 18:26  
일단 저는 다 읽었고 매우 재밌는 글 입니다 ㅎㅎ
겨울나그네 06.22 19:27  
[@Vagabond] 감사합니다
06.22 18:27  
재미있네요.

좀더 짧게 끊어서 올리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글 기대합니다.
겨울나그네 06.22 19:27  
[@명] 감사합니다
싼티니욤 06.22 20:40  
요즘 태국 가이드 출신들은 코로나 때문에 아프리카 TV 비제이나 유튜브로 직종을 많이 바꾸셨더군요. 그분들도 읽어 봤으면 하는 글이네요.
한순간의빛 06.22 21:44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이 드네요.
다음 글도 기대합니다.
가솔린집시 06.22 22:04  
글잘쓰시네요 재밋게 읽어습니다
겨울나그네님 지금은 무슨일 하고 계시는지요?
겨울나그네 06.22 22:05  
[@가솔린집시] 서울에서 그냥 노가다 합니다만 9월 중순에나 태국에 들어갈까 합니다
가솔린집시 06.22 22:11  
2편기대할게요^^
malitaksin 06.22 22:35  
너무 재미있네요 ^^
2편 기대할께요
감사합니다
킁타이 06.23 10:46  
여보슈 이거 넘 심한거아니요?
이렇게 잼 난글을 중간에 뚝 짤라내고 2편 기다리라니  나원참  어릴적에 장편만화 다음편 기다리는
심정을 알고계시나요?  여러말 마시고 키안 래우래우 캅품 ㅎㅎㅎ 딸록
혹 태국에는 다시 안오시나요? 저는 pattaya zone  시라차에 1년에5-6개월 백수로 지내고있슴니다
오시면 밥한끼는 대접하겠슴니다 기회되면 연락주세요  yeo5303@hanmail.net
겨울나그네 06.23 14:00  
[@킁타이] 감사합니다 꼭 연락드릴께요
머독 06.23 18:20  
한편의 장편소설을 읽는 느낌이랄까요. IMF때 결혼했는데 그때는 다들 제주도로 신혼여행 갔었어요. 우리 큰애 네살때부터 매년 태국을 다니기 시작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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