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청년 '수디어'의 한국어 사춘기.
완연한 가을이다.
하늘은 더 파랗고 햇살도 더 투명해지고 살갗에 닿는 바람은 끈적이지 않고 고슬고슬하다.
지독하게 더운 여름이 오기 전 미풍이 너무나도 행복한 6월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저녁마다 산책을 가는 공원에 나갔더니 마침 아름다운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나는 석양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서서 핸드폰 카메라에 사진을 담았다.
갤러리에 담긴 사진을 다시 확인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다시 걸으려고 뒤를 돌아섰는데
어느 외국인 청년이 내가 선 자리보다 약 1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나처럼 지는 석양을 핸드폰으로 찍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손짓을 하며 내 자리에 와서 찍을 것을 권하였다.
서로 말은 안했지만 눈빛을 교환하며 그가 알겠다는 표정으로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노을이 가장 잘 보일 수 있게 그의 핸드폰을 같이 들어주었다.
그가 내게 고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인사를 하길래
나도 눈으로 인사를 해주었다.
매일 저녁 공원을 산책하면서 나는 그를 이미 익숙하게 보았던 터여서
아주 낯설게 여겨지지 않았던 듯 싶다.
항상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그 청년을 보면서 공원으로 산책을 나오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자신이 이방인이란 사실에 스스로를 드러내고 싶지 않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그는 나와 마주칠 때마다 눈인사를 했고
나도 반가운 마음으로 눈으로 웃으며 인사를 교환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참을 걷고 있는데 그가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How are you?' 하고 말을 거는 게 아닌가.
나는 순간 당황하면서 그냥 우리말로 '아,,, 네, 어디서 오셨어요?' 물었더니
그도 우리말로 '인도!!'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난 그를 멀찌감치에서 바라볼 적마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사람인가 보다 하고 막연하게 짐작을 했었다.
그의 얼굴을 한 번도 자세히 본 적이 없었으므로 단지 피부가 좀 가무잡잡하고
약간 이국적으로 생긴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보니 눈도 크고 속눈썹이 까맣고 길어서 눈을 껌벅일 땐 마치 인형 눈썹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날 저녁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는 한국에 온지 4년이 넘었으며
자신은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고 현재 IT회사에 근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내가 잘 이해가 잘 가지 않았던 건 4년이 넘어가도록
어떻게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어도 거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가 말하길 회사 직원들도 거의 외국인이고 전부 영어를 쓰고 있어서 한국어를 배울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그렇게 그 청년과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공원에서 마주칠 적마다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영어 단어를 써 본지가 수십 년이 돼가는 나는 기억나는 것도 그나마 별로 없어서
구글이나 파파고 번역을 찾아가며 그와 대화를 할 수 있었는데 문법은 중요치 않으니
내게 단어만 말해도 상관이 없다며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한국어를 배울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젓는 것이 아닌가.
그러던 그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얼마 전 공원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내게 한국어를 지난주 토욜부터 배우기로 했다며
내게 핸드폰에 나온 톡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6명이 전부 외국인인데 그들과 같이 줌으로 한국어를 배울 것이라고.
난 그에게 정말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처음 배우던 날 내게 배운 것을 사진으로 보내면서 너무 어렵다고 찡그린 표정의 이모티콘을 함께 보내왔다.
웃음이 나왔지만 난 처음엔 어려워도 차츰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제 2 외국어는 다 어렵겠지만 한국어도 정말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든다.
표현에 있어서 너무나 다양하고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문장을 표현함에 있어서 훨씬 더 아름다운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무척 힘든 과정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게 되었다.
한국어를 배우던 첫 날 그는 내게 "
I REALLY WANT TO LEARN KOREAN NOW" 하고
일부러 강조를 한 문장을 보내왔다.
그러면서 내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한국인 친구이기 때문에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란 말도 덧붙였다.
가을이 지나고 추운 겨울이 올 때쯤 그 청년에게 한국어가 얼마나 늘었을지 사뭇 기대가 된다.
이제 그가 한국어를 배우는 걸음마를 떼었으니 부디 끝까지 해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이십 대의 젊은 나이에 혼자서 멀고 먼 한국에 건너와 꿋꿋하게 잘 살아가는 그를 보면서
충분히 할 수 있을거란 믿음이 생긴다.
한 번은 자신의 폰 갤러리에 있는 인도의 유명 배우 사진을 보여주며 그 배우처럼
수염도 기르고 헤어스타일도 따라했다고 말해서 정말 크게 웃었다.
음, 생각해보니 그는 지금 이십 대의 청년에 걸맞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인도 청년 '수디어' 가 다가올 한국어 사춘기란 허들을 잘 뛰어넘기만을 나는 진심으로 응원한다.
" 수디어!! 힘내세요, 이제 시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