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에 대한 몇가지 기억
이런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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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5
2021.05.13 13:07
1.
중국음식을 포장판매만 하는 식당의 주인 아주머니입니다. 얼굴에 사마귀같은 작은 점들이 20여개나 다닥다닥 나있었고 체구가 아주아주 왜소한 분이였습니다. 접대용 미소나 살가움같은 건 전혀 없는 대단히 무뚝뚝한 분이였는데 음식 가격이 싸고 맛있어서 나름 그 가게의 단골이였습니다.
주로 새우볶음밥을 사먹었는데 숙주나물이 넉넉히 들어가서 아삭아삭한 식감이 좋았고 불향이 은은하게 배어있어 정말 맛있었습니다. 식용유도 적게 써서 담백하다고까지 느낄 정도였지요.
이 가게 볶음밥이 너무 맛있어서 나중에 LA 차이나타운에서 새우죽을 사먹고 심각한 내상(?)을 입기 전까지는 중국음식에 대해 나쁘지않은 인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2.
같은 과목을 수강하던 여학생입니다. '중국사람들은 잘 안씻는다.'는 속설을 각인시켜 준 사람이기도 합니다.
머리를 얼마나 안감는지 거의 항상 머리카락이 떡이 져있어서 같은 동양인으로서 저까지 창피함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볼 때마다 "저 정도면 모자라도 쓰고 오지." 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습니다.
중국인에 대해 약간의 편견을 갖게 만든 기억 중에 하나입니다.
3.
동양문화사를 강의했던 교수입니다. 한국을 폄하하는 발언을 해서 학기 초반에 몇 번 부딪혔었습니다. 명백한 증거를 근거로 반론을 해봐도 자신의 고의적인 오류를 정정하지 않고 "그런 의견도 있을 수 있다."며 두리뭉실하게 넘어가곤 했습니다.
당시에는 동북아공정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을 때였는데 한국역사를 은근슬쩍 중국 것으로 말하고 태극기에 사용된 태극과 팔괘 문양을 예를 들어 한국이 고래로 중국의 속국이였던 것처럼 오도하는 등등... 어쩔 수 없이 수강은 계속 했지만 짜증을 유발하던 강의였습니다.
중국인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게 만든 기억입니다.
(이 선입견은 아직까지도 강하게 작용하는데 제게 중국인 친구가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학교가 US News에서 선정한 세계 대학 랭킹 50권 안에 드는 나름 명문대학인데 어떻게 그따위로 강의하는 교수에게 강의를 줬는지 이해를 못했었는데 이번에 하버드대학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논문으로 물의를 일으킨 램지어 교수의 예를 보니 교수 자리라는 게 꼭 양식있는 사람이 차지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이 사람도 이력만큼은 그럴 듯한 사람이였으니까요.)
4.
(분수쇼로 유명한) 벨라지오 호텔 카지노에서 본 중국인입니다. 카지노에서는 동전 형태의 칩만 있는줄 알았었는데 이 사람은 직사각형 칩도 사용하더군요.
그 직사각형 칩이 얼마짜리인지는 모르겠지만 1천 달러 이상인 것은 확실하고 어쩌면 1만 달러가 아니였을까 하는 막연한 짐작도 해봅니다. 1만 달러짜리 칩이였다면 그 테이블 위에는 수억 원의 판돈이 쌓여 있던 셈이고 1천 달러짜리 칩이였다고 해도 수천만 원이 놓여있던 셈입니다.
(그게 얼마짜리 칩이였는지는 지금도 궁금합니다. 참고로 벨라지오는 2만5천 달러짜리 칩도 둥근 형태라고 합니다.)
큰 금액을 베팅하는 사람들은 보통 별도로 준비된 하이 롤러(high roller) 구획에서 도박을 한다던데 왜 아래층까지 내려와서 도박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한 명이 도박을 하는데 테이블을 좌우로 1개씩 2개를 비워놓고 플로어 매니저 한 명이 딜러 옆에 서서 지켜보고 그 사람 뒤로는 가드가 금줄까지 쳐놓고 구경꾼들이 가깝게 접근하는 걸 막고 있고... 뭔가 다른 세계의 사람이 앉아 도박을 하는 거 같았습니다.
액수가 커서 그랬는지 아무런 상관없는 저까지도 긴장하며 구경했었는데 도박을 그런 식으로도 하는 걸 보고 문화적(?) 혹은 계층적(?)인 충격 비숫한 걸 느꼈었습니다.
5.
중국식 치료 마사지나 지압이라고 할 수 있는 튜이나(推拿) 치료사입니다. 지압사들을 테크니션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이 분의 엄지손가락을 보고는 가만히 모자를 벗었습니다.
(재능 앞에서는 모자를 벗는다는 말이 있지요? 저는 노력 앞에서도 모자를 벗습니다.)
연습과 노력의 상징처럼처럼 여겨지는 발레리나의 발가락 사진을 보신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이 분의 엄지손가락이 발레리나의 발가락처럼 변형되어 있더군요.
그리고 어제(魚際)라고 부르는 손바닥 부위는 돌덩이처럼 딱딱했습니다. 놀라웠던 건 그 딱딱한 손으로 누르면서 문지르는데도 말랑말랑한 고무공을 얹고 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겁니다.
지압 좀 한다고 큰소리 치는 사람들을 만나면 손가락을 제일 먼저 보는데 엄지손가락에 변형을 갖어올만큼의 노력의 흔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분 이후로는 아직 못 봤습니다.
6.
이분은 소위 조선족입니다. 무척 똑똑하고 진솔하고 이해심도 많고 목소리마저 듣기 좋은 중저음으로 같이 이야기하는 게 정말 즐거웠습니다.
중국서는 언론사인 신화사에서 근무했었고 미국서는 통역/번역 일을 하셨는데 제게는 한문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이 분의 격려가 있어서 한문을 공부할 엄두도 냈고 중국어와 영어의 문장구조가 매우 비슷하다는 걸 알려주셔서 한문 공부를 좀 더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는 기틀을 잡아주신 분입니다.
이 분과의 인연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한국계 중국인에 대해 호감을 갖을 수 있는 좋은 기억을 많이 주신 분입니다.
7.
직업상 알게 된 한국계 중국인(조선족) 몇 명입니다. 개인적인 친밀감같은 것은 없었지만 미국서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 갖고 있는 고민 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들 중에 제일 안타까웠던 건 한국인 사회에 왔다가 마음에 상처를 받고 중국인 사회로 들어가는 조선족들 이야기였습니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실망이 분노로 바뀌는 과정을 알고 있기에 저는 그분들의 상처에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공감을 했었습니다.
아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의심해보고 갈등을 겪었을 겁니다. 저는 이걸 경계선상에 있던 사람을 중국인이 되라고 떠밀어버린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면 그 다음에 찾아 오는 건 한국인에 대한 분노와 혐오와 불신입니다.
배타성이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는 없지만 나와 다름에 대한 한국인들의 배타성은 유난히 심하다는 생각은 종종 해봅니다. 그리고 이런 배타성이 같은 한국인들끼리는 편가르기로, 외국인에게는 인종/출신국 차별로 이어지는 거 같습니다.
8.
식이요법으로 암을 극복한 요리사입니다. 자신의 식이요법 경험을 요리에 적용했는데 아쉽게도 음식맛은 별로였습니다.
이 분의 지론은 "몸에 좋은 음식이 맛있는 음식이다." 인데 이 분에게는 생강보다 더 몸에 이로운 식재료는 없고 그래서 모든 음식에 필요 이상의 생강을 사용했기 때문에 고객들로부터 불평을 듣고 사업주와도 마찰이 잦았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좀 이상한 신념으로 만든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요리사를 구하기 쉬운 대도시에서는 버텨내지 못하고 지방의 작은 식당들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가끔 신념 혹은 믿음의 타당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만드는 기억입니다.
ㅁ
세계에서 인구가 제일 많다는 중국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직접 만나 본 중국인은 얼마 없습니다. 사실 위의 기억이 거의 전부 입니다.
중국음식을 포장판매만 하는 식당의 주인 아주머니입니다. 얼굴에 사마귀같은 작은 점들이 20여개나 다닥다닥 나있었고 체구가 아주아주 왜소한 분이였습니다. 접대용 미소나 살가움같은 건 전혀 없는 대단히 무뚝뚝한 분이였는데 음식 가격이 싸고 맛있어서 나름 그 가게의 단골이였습니다.
주로 새우볶음밥을 사먹었는데 숙주나물이 넉넉히 들어가서 아삭아삭한 식감이 좋았고 불향이 은은하게 배어있어 정말 맛있었습니다. 식용유도 적게 써서 담백하다고까지 느낄 정도였지요.
이 가게 볶음밥이 너무 맛있어서 나중에 LA 차이나타운에서 새우죽을 사먹고 심각한 내상(?)을 입기 전까지는 중국음식에 대해 나쁘지않은 인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2.
같은 과목을 수강하던 여학생입니다. '중국사람들은 잘 안씻는다.'는 속설을 각인시켜 준 사람이기도 합니다.
머리를 얼마나 안감는지 거의 항상 머리카락이 떡이 져있어서 같은 동양인으로서 저까지 창피함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볼 때마다 "저 정도면 모자라도 쓰고 오지." 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습니다.
중국인에 대해 약간의 편견을 갖게 만든 기억 중에 하나입니다.
3.
동양문화사를 강의했던 교수입니다. 한국을 폄하하는 발언을 해서 학기 초반에 몇 번 부딪혔었습니다. 명백한 증거를 근거로 반론을 해봐도 자신의 고의적인 오류를 정정하지 않고 "그런 의견도 있을 수 있다."며 두리뭉실하게 넘어가곤 했습니다.
당시에는 동북아공정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을 때였는데 한국역사를 은근슬쩍 중국 것으로 말하고 태극기에 사용된 태극과 팔괘 문양을 예를 들어 한국이 고래로 중국의 속국이였던 것처럼 오도하는 등등... 어쩔 수 없이 수강은 계속 했지만 짜증을 유발하던 강의였습니다.
중국인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게 만든 기억입니다.
(이 선입견은 아직까지도 강하게 작용하는데 제게 중국인 친구가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학교가 US News에서 선정한 세계 대학 랭킹 50권 안에 드는 나름 명문대학인데 어떻게 그따위로 강의하는 교수에게 강의를 줬는지 이해를 못했었는데 이번에 하버드대학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논문으로 물의를 일으킨 램지어 교수의 예를 보니 교수 자리라는 게 꼭 양식있는 사람이 차지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이 사람도 이력만큼은 그럴 듯한 사람이였으니까요.)
4.
(분수쇼로 유명한) 벨라지오 호텔 카지노에서 본 중국인입니다. 카지노에서는 동전 형태의 칩만 있는줄 알았었는데 이 사람은 직사각형 칩도 사용하더군요.
그 직사각형 칩이 얼마짜리인지는 모르겠지만 1천 달러 이상인 것은 확실하고 어쩌면 1만 달러가 아니였을까 하는 막연한 짐작도 해봅니다. 1만 달러짜리 칩이였다면 그 테이블 위에는 수억 원의 판돈이 쌓여 있던 셈이고 1천 달러짜리 칩이였다고 해도 수천만 원이 놓여있던 셈입니다.
(그게 얼마짜리 칩이였는지는 지금도 궁금합니다. 참고로 벨라지오는 2만5천 달러짜리 칩도 둥근 형태라고 합니다.)
큰 금액을 베팅하는 사람들은 보통 별도로 준비된 하이 롤러(high roller) 구획에서 도박을 한다던데 왜 아래층까지 내려와서 도박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한 명이 도박을 하는데 테이블을 좌우로 1개씩 2개를 비워놓고 플로어 매니저 한 명이 딜러 옆에 서서 지켜보고 그 사람 뒤로는 가드가 금줄까지 쳐놓고 구경꾼들이 가깝게 접근하는 걸 막고 있고... 뭔가 다른 세계의 사람이 앉아 도박을 하는 거 같았습니다.
액수가 커서 그랬는지 아무런 상관없는 저까지도 긴장하며 구경했었는데 도박을 그런 식으로도 하는 걸 보고 문화적(?) 혹은 계층적(?)인 충격 비숫한 걸 느꼈었습니다.
5.
중국식 치료 마사지나 지압이라고 할 수 있는 튜이나(推拿) 치료사입니다. 지압사들을 테크니션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이 분의 엄지손가락을 보고는 가만히 모자를 벗었습니다.
(재능 앞에서는 모자를 벗는다는 말이 있지요? 저는 노력 앞에서도 모자를 벗습니다.)
연습과 노력의 상징처럼처럼 여겨지는 발레리나의 발가락 사진을 보신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이 분의 엄지손가락이 발레리나의 발가락처럼 변형되어 있더군요.
그리고 어제(魚際)라고 부르는 손바닥 부위는 돌덩이처럼 딱딱했습니다. 놀라웠던 건 그 딱딱한 손으로 누르면서 문지르는데도 말랑말랑한 고무공을 얹고 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겁니다.
지압 좀 한다고 큰소리 치는 사람들을 만나면 손가락을 제일 먼저 보는데 엄지손가락에 변형을 갖어올만큼의 노력의 흔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분 이후로는 아직 못 봤습니다.
6.
이분은 소위 조선족입니다. 무척 똑똑하고 진솔하고 이해심도 많고 목소리마저 듣기 좋은 중저음으로 같이 이야기하는 게 정말 즐거웠습니다.
중국서는 언론사인 신화사에서 근무했었고 미국서는 통역/번역 일을 하셨는데 제게는 한문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이 분의 격려가 있어서 한문을 공부할 엄두도 냈고 중국어와 영어의 문장구조가 매우 비슷하다는 걸 알려주셔서 한문 공부를 좀 더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는 기틀을 잡아주신 분입니다.
이 분과의 인연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한국계 중국인에 대해 호감을 갖을 수 있는 좋은 기억을 많이 주신 분입니다.
7.
직업상 알게 된 한국계 중국인(조선족) 몇 명입니다. 개인적인 친밀감같은 것은 없었지만 미국서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 갖고 있는 고민 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들 중에 제일 안타까웠던 건 한국인 사회에 왔다가 마음에 상처를 받고 중국인 사회로 들어가는 조선족들 이야기였습니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실망이 분노로 바뀌는 과정을 알고 있기에 저는 그분들의 상처에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공감을 했었습니다.
아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의심해보고 갈등을 겪었을 겁니다. 저는 이걸 경계선상에 있던 사람을 중국인이 되라고 떠밀어버린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면 그 다음에 찾아 오는 건 한국인에 대한 분노와 혐오와 불신입니다.
배타성이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는 없지만 나와 다름에 대한 한국인들의 배타성은 유난히 심하다는 생각은 종종 해봅니다. 그리고 이런 배타성이 같은 한국인들끼리는 편가르기로, 외국인에게는 인종/출신국 차별로 이어지는 거 같습니다.
8.
식이요법으로 암을 극복한 요리사입니다. 자신의 식이요법 경험을 요리에 적용했는데 아쉽게도 음식맛은 별로였습니다.
이 분의 지론은 "몸에 좋은 음식이 맛있는 음식이다." 인데 이 분에게는 생강보다 더 몸에 이로운 식재료는 없고 그래서 모든 음식에 필요 이상의 생강을 사용했기 때문에 고객들로부터 불평을 듣고 사업주와도 마찰이 잦았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좀 이상한 신념으로 만든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요리사를 구하기 쉬운 대도시에서는 버텨내지 못하고 지방의 작은 식당들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가끔 신념 혹은 믿음의 타당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만드는 기억입니다.
ㅁ
세계에서 인구가 제일 많다는 중국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직접 만나 본 중국인은 얼마 없습니다. 사실 위의 기억이 거의 전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