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은 삶’ 빌어먹을 "옳고 그름"의 세상에서...
‘운 좋은 삶’ (나는 이 순간 살아 있다)
나는 오늘 아침 신문을 읽으면서 기쁨을 느꼈다.
오랜 불화로부터 위로 받고내 무지를 깨우쳤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동안 세상과 불화하였다.
불화의 원인은 세상이 ‘옳고 그름’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과 싸웠기 때문이다.
즉, 세상(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알 수 있음에도 알려 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르치려 들지 마. 내가 편들고 싶으니 편드는 거야.”
이렇게 옳고 그름이 좋고 싫음으로 대체되어 있음을 몰랐던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니, 세상을 이해할 힘이 생겼다.
나는 어릴적부터 모든 것에서 옳고 그름의 문제로 내몰려 살았다.
‘옳고 그름’의 문제에 집착하여 세상을 볼수록 세상과 나는 동떨어져 외톨이가 되는 느낌이었다.
세상은 '좋고 싫음'에서 더 나아가 "나는 알기 싫다, 고로 혐오한다"로 대체됨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래동안 ‘옳고 그름’에 깊이 빠져들었던 나에게 위로하는 시를 하나 발견하였다.
눈풀꽃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
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
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하리라.
나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대지가 나를 내리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
나는 지금 두려운가, 그렇다. 하지만
다른 꽃들 사이에서 다시
외친다.
'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
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 루이스 글릭 Louise Gluck (미국, 1943― ) 2020년 노벨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