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뒤적뒤적, 산타페로 가기까지
산타페.
제가 이 단어를 처음으로 접한 건 일본 유명 여배우의 누드집 출간 뉴스에서였어요. 1990년대 초인걸로 기억하는데요, '미야자와 리에'라고 청순한 외모의 젊은 배우가 상당한 수위의 화보집을 내었다며 화제가 된적이 있었습니다. 그 화보집의 이름이 산타페였던 거에요. 인터넷도 대중화 되기 전인 시절 옆나라 얘기인데도 우리 또래 들에게는 이슈가 되긴 했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 전이구만요. 아마 기억나시는 분도 많으실 듯...
아무튼 저 단어는 듣는 순간 뭔가 나른한 홀리데이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약간 따뜻한 공기도 느껴지고 말이에요. 그 이후로 자동차 이름으로도 나오고 커피음료 이름으로도 쓰이고 아주 여러모로 친숙한 느낌이네요.
리에가 사진을 찍은 곳 산타페가 미국 어딘가에 있는 지명이란건 어렴풋이 알았지만 저때는 그냥 어느 동화 속에나 나오는 상상의 나라 이름과 전혀 다를바 없었어요.
그런데 여행을 다니다 보니까 실제로 저곳에 가게 되었네요.
산타페는 미국 뉴멕시코 주의 주도에요. 사실 뉴멕시코에서 제일 크고 인구도 많고 번화한 도시는 앨버커키인데 주도는 이 작은 규모의 도시가 담당하고 있다고해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주도라고 하네요. 그러고 보니 캘리포니아도 주도는 엘에이가 아니라 새클라멘토 라는 다소 낮선 곳이더라고요...
산타페로 향하는 날 아침, 우리는 콜로라도의 산장 숙소인 '더 롯지 앳 타마론'에서 눈을 떴어요. 이 숙소는 바로 호텔 옆에 골프장이 있고 야외 수영장도 있는 시설이 제법 번듯한 곳인데 임박해서 예약하니 120달러 정도에 묵을 수 있었어요.
객실 면적이 넓기도 넓은 데다가 침대도 아주 높고 푹신하고 주방시설에다 식기도 있어서 미국 여행하며 일반적으로 묵는 모텔6 같은 도로변 싸구려 숙박시설이 아닌 뭔가 미국식 가정집에 온거 같은
느낌도 들고해서 떠날 때 조금 아쉬웠어요. 숙소가 엄청 후진곳은 할렐루야! 도망치듯 이른 아침에 나오는데 여기는 차에 짐을 실으면서 살짝 뒤돌아봐지고 아쉬운 맘이...^^
요왕의 브리핑~ 여기에서 산타페까지 가는 길에 볼거리 두 군데를 들른다고 하네요. 하나는 오래전 엄청난 분화를 했던 화산이었던 '발레스 칼데라', 그리고 또 하나는 인디언 유적지인 '밴델리어' 이렇습니다.
이 두 곳이 유명한 곳인가? 난 전혀 모르지만 뭔가 볼만하니까 리스트에 껴놓긴 했겠지.
어차피 저는 무념무상 차에 실려가는거니까 별 상관이 없어요.
운전은 요왕이 하니까 다 계획대로 가는거겠죠.
근데 칼데라 가는 길이 왜 이렇게 험해?
미국의 도로는 당연히 포장이 다 되어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길이 아닌거에요. 구글이 알려준 최단 거리로 가서 그런지 좁고 꼬불꼬불 먼지 풀풀 나는 비포장 산길이네요.
켁... 이런 인적없고 길 험한 곳에서 차라도 퍼지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거야. 덜컹이는 차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긴 했지만 별일없이 칼데라에 잘 도착했어요.
일단은 비지터 센터에 들어가서 간단한 설명을 듣는척 대충 폼을 잡은 후에 곧 센터를 나와 칼데라 구경에 나섰습니다.
이게 예전에는 분화구였다는게 그 크기가 너무 커서 지금은 그냥 넓은 평원으로 보여요. 완만한 경사로 오목지게 넓고 평평하고 키 낮은 풀들이 바람에 일렁일렁하는 푸르른 들판이군요.
사람도 별로 없고 가을이어서 고즈넉한 분위기였어요.
자박자박 둘러보다보니 귀여운 쥐새끼같은 동물들이 넓은 초원에서 무리지어 바글바글한거에요. 뭐먹고 사는지는 몰라도 생긴게 귀여워서 마주쳐도 많이 깜놀하진 않았어요. 만약 흉하게 생긴게 바글바글 모여있으면 얼마나 놀라겠어요. (지금 찾아보니 거니스 프레리 독이라고 하네요. >> 보기)
넓고 낮은 초원 한가운데에 있으니 뭔가 현실로부터 유리되고 격리된 느낌이 들면서 살짝 스산해집니다. 사실 단지 느낌뿐이 아니라 오지처럼 격리된게 맞죠.
여기를 둘러보고 들어온 길로 바로 나갔으면 좋으련만 새길 찾아 다니는게 취미인 요왕은 부득불 반대편 출구로 차를 몰아갑니다.
구불텅 구불텅 이번에는 오르막길이네요. 아까 들어온 길보다 더 난이도가 있었어요.
이런 오프로드를 승용세단으로 들고나다니... 사실 이 때는 요왕도 조금 긴장을 탄거같아요.
재수 없어서 타이어 빵구라도 나면 오늘 저녁은 숲속에서 오만 산짐승들이랑 동무하면서 지낼판인데(동무하면 다행이지. 습격 당하면 어쩌지...) 결국 왔던 길을 되돌아 매끈하고 검은 아스팔트 도로가 나오자 숨이 절로 편하게 쉬어집니다.
발레스 칼데라
다음 목적지는 인디언 유적지에요.
우리 어렸을 때 본 서부영화의 배경으로 친숙한 지형지물... 절벽, 황토색, 벽에 그려진 그림들, 부족원들이 모이는 넓은 공터 그리고 죽은 나무 기둥 등등등...
뉴 멕시코의 특성상 이런 인디언 유적지가 꽤 있는 편인데 이곳은 다른 곳에 비해 볼거리가 제법 되고 보존도 잘 되어있네요.
간단한 산책길을 따라서 인디언 옛 거주지를 둘러봤는데, 자연스레 드는 의문은 도무지 이렇게 황량하고 수분이라곤 없는 땅에서 물은 어디서 조달하는걸까 싶었어요. 물론 여기가 계곡이긴 한데 9월에도 이렇게 바짝 말라있는걸 보면 물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도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싶은거에요. 이 건조함 속에서 뭔가 작물 같은 걸 키울수도 없었을텐데 말이죠.
이제 중간 경유지를 다 둘러봤으니 산타페로 고고~
이른 저녁 산타페에 도착해서 시내를 살짝 벗어난 곳에 있는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나니 만사가 귀찮아져서 시내 구경은 내일로 미루고 먼지를 누렇게 뒤집어쓴 차 세차하고 월마트 들러서 저녁 먹거리 사는걸로 하루를 마감합니다.
세차와 월마트 방문이라니... 이런 일상생활적인 것들을 하니 마치 이때는 여행자가 아니라 미국 서민이 된 기분이네요.
다음날 산타페 시내로 가지않고 북쪽으로 제법 떨어져 있는 유명 관광지인 '리오 그란데 협곡'과 '타오스' 마을로 좌표를 맞춥니다. 아니 산타페는 도대체 언제 가는겨... 일단 저 두 곳을 둘러보고 오후에 갈 예정이에요. 미국 오는것도 힘든데 온김에 싹싹 다 둘러 봐야겠죠.
리오그란데 강을 경계로 동쪽을 앵글로아메리카, 서쪽을 라틴아메리카로 나뉜다고 고등학교 지리시간에 배운게 생각나네요. 리오그란데 강 협곡은 정말 웅장하고 깊고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곳이였어요. 이걸 저의 미미한 표현력으로 묘사하기에는 다소 어렵고 진짜 미국은 어디든 스케일이 대단하구나... 싶더라고요. 이런 느낌은 중국에서도 받긴했었어요. 거대하고 가파른 협곡을 잇는 다리위에 서있으니, 이게 영화나 매체에서 자주 듣던 그곳이구나 싶어서... 뭔가 감회가 새롭고 그랬어요.
산타페에는 좀 미치지 못하지만 심미적이고 이국적인 구조물로 유명한 타오스 라는 마을이
리오 그란데 근처에 있다고 해서 그곳도 방문해봅니다. 꽤 유명세가 있다고해서 둘러봤는데 크게 감명이 있지는 않았어요. 아마 다음 목적지가 산타페이다보니 약간 에피타이저 같은 느낌으로 둘러봤던거 같아요.
하지만 타오스를 떠나 머지않아 외곽도로변에서 만나게 된 교회에서 바라본 하늘빛은 정말 오래 기억에 남을 만큼 순도 100% 파란색이었습니다. 이곳은 뭔가 위도나 습도 때문에 공기의 성분이 달라서 하늘빛이 달라보이는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하늘빛이 파랗고 진했어요.
십자가 경건하게 솟은 황토색 성당위로 그 어떤 이물질 하나 없이 진한 푸른빛이 맞물려 있는데
이런 색의 조화가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도 뭔가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매력이 있을정도... 마치 이 모든 환경과 성전의 매력이 사람을 홀리는거 같은 느낌마저도 들었어요. 참 이상했어요.
늦은 오후 드디어 산타페 시내로 들어갑니다.
그곳은 듣던바와같이 도시규모도 적당하고 정말로 예쁜 곳이었어요. 저는 서로 다른 문화가 혼합되어있는 것에 상당히 끌리는 편인데요. 그러니까 동남아의 푸껫, 루앙프라방, 말라카 이런곳들요. 양쪽에서 좋은것들로만 쏙쏙 가져다와서 얹은 느낌이 들어요. 물론 그런 구조물들이 생긴 서사에는 약탈과 점령의 역사가 있긴 합니다만... 하여튼 이 산타페에서도 그런 느낌이 물씬 들었어요.
아메리카 토착 원주민들인 인디언 문화 + 카톨릭 문화가 켜켜히 섞여있는듯한 느낌요.
곳곳에 있는 성당과 갤러리들 그리고 반짝이는 것과 나풀거리는 것들이 빼곡한 공방과 샵들... 근데 여기에도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이 상당히 많네요. 산타페까지 왔으니 비싼건 아니더라도 좀 만만한 가격대의 기념품 사려고 했더니 그런건 아래를 들춰보면 made in China...
도시 곳곳에 미술관과 박물관도 많았는데 너무 많다보니 원래 목표로 했던 미술관이 아니라 그 맞은편의 뉴멕시코 히스토리 뮤지엄에 가게되었지 뭐에요. 차를 잘못 가져다 댄거에요.
처음에는 잘못 온줄도 몰랐는데 둘러보다보니 미술품은 안나오고 무슨 예전 도시사진만 계속 나오더라니... 산타페 미술관 볼거 꽤 많다던데... -_-;; 할 수 없지.
그래도 많이 아쉽진 않아요. 저희는 미술에 문외한이어서 봐도 그때뿐이에요. 차라리 잘됐다 생각할래요. ^^ 이러다 하루가 다 갔네요.
제가 인문학적 교양이 크게 깊지않아서 그저 감상적으로만 느끼고 있는듯한데... 혹여나 잘 아시는 분 계시면 좀 짚어주세요.
싼타페의 중저가 모텔에서 두번째 밤을 보내고 이제 이 매력적인 곳을 떠나야했어요. 도심에서 떨어진 모텔인데도 일박에 85 달러나 합니다. 산타페는 관광도시라 그런지 늘 숙박비가 좀 높은 곳이라고 하던데 타운을 둘러보니 납득이 가긴하더라구요.
아쉬운 마음 가득하고는 산타페를 떠나 다음 도시로 가는 도중에 산타페 근교의 '텐트락스Tent Rocks' 라는 곳을 들렀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뿔형 인디언 텐트 모양으로 뾰족뾰족한 바위들이 산자락에 쭉 늘어선 곳이에요. 이런 비슷한 형태의 지형은 중국에서도 본적이 있고, 태국에서도 아주 작은 규모의 암석지대를 방문한적은 있는데요, 그런곳이랑은 비교가 안 되는... 그냥 규모로 압도하네요.
주차장에 차를 대고 아이스박스에서 콜라 한 캔 꺼내 마신후, 멀지 않은 곳을 대강 둘러보고 증명사진을 찍을 생각이었습니다만... 걷다보니 중간에 우리만 중단을 하고 되돌아가기가 싫은거에요.
정상으로 가기까지에는 꽤나 가파른 구간도 있고 바위 사이의 아주 좁은 구간도 있어서 그다지 평탄한 루트는 아니었습니다. 근데... 주차장에서 다른여행자들과 거의 비슷한 시점에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며 출발했는데 출발한 무리들과 같이 정상에 가고 싶은 마음... 중도에 하차하고싶지않은 마음이 생기는거에요. 그들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도 말이에요. 이래서 힘든일은 같이 어울려 하게되면 일의 양이 실제적으로 줄지는 않더라도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완료는 할수있나봐요.
그래서 올라갔습니다. 터벅 터벅...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무념무상... 하산하는 백인들의 얼굴은 거의 홍학빛깔 붉은색. 고온 건조한 지대. 자외선은 짱짱. 힘들지만 경치도 짱짱
정상에 올라갔더니 미국 중년 아주머니 친구들이 좋은 자리 선점해놓고 거기 앉아서 적잖히 수다 떨고 있더라고요. 다른 사람들도 그 자리를 느껴보고 사진도 찍게 적당히하고 비켜주면 좋으련만... 아주 활발하고 기가 쎈 캐릭터같았어요.
하지만 그 자리뿐만 아니라 다른곳도 제법 좋은 자리가 있어서 아쉬운 맘은 크게 들지않아 다행이였죠.
근데 하산 하는 길에 그 아주머니 무리를 또 마주쳤어요. 하긴 길이 하나이니까 계속 보게 되네요.
이분들 정상등반을 하고도 얼마나 힘들이 뻗치는지 남들은 매달리지도 않는 미니 암벽에 올라가다가 그중 한 아줌마가 손을 놓쳐서 등으로 바닥을 향해 털퍼덕 떨어지지 않겠어요. 뭐 높이는 대략 2미터 정도밖에 안되서 큰 부상은 아니겠지만 보는 사람들이 더 놀라게 되더라고요.
저도 큰 사고 났겠구나 싶었는데 다행히 머리로 떨어진게 아니라 그런지 '아임 오케이'하면서 툭툭 털고 일어납니다. 체형을 보니 평소에 운동도 많이 하고 하이킹도 자주 하는지 군살 없는 편이라 그런가... 하긴 몸이 무거운 편이였으면 아예 거기 올라갈 생각도 안했을 듯해요.
그래서 오늘의 교훈은 역시 운동으로 체력을 키워놔야 고난을 만나도 발딱 일어난다는....
우리 모두 운동합시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