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특별한 날이라 써보는 회고잡담
2020 년 5 월 16 일은 특별한 날이다.
한국을 떠난지 30 주년이 되는 날이다.
1990 년 5 월 16 일 수요일 저녁,
친구들, 그리고 단체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료 선후배들의 전송을 받으며 김포공항을 떠났다.
왼쪽이 31 년 전에 발급받은 첫 대한민국 여권이고,
오른쪽은 두 번 째이자 마지막 대한민국 여권이다.
두 개 다 5 년짜리 거주여권이다.
당시 여권을 받으려면 종로 5 가 어딘가에 가서 소양교육을 받아야 했다.
비록 영주권을 받긴 했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그 때 캐나다에 살러 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출발 몇 주 전 까지 비행기표도 사지 않았었다.
누나 초청으로 등떠밀리다시피 이민수속을 시작했다.
1989 년 연말 쯤, 영주권이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
몇 달 후, 대사관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5 월 말까지 캐나다에 입국하지 않으면 영주권을 취소하겠다는 통보였다.
그래?
캐나다가 대사관을 통해 협박까지 하며 꼭 와 주십사 통사정을 하니 거절할 수도 없고,,
여행이나 다녀오겠다는 생각으로 비행기표를 샀다.
내가 예약한 비행기는 서울(김포)발 토론토행 대한항공 KE072 편이었다.
이 비행기가 당시에는 밴쿠버를 경유해서 토론토까지 운항했다.
외항사는 국내선 여객을 태울 수 없으므로 밴쿠버-토론토 구간은 절반 정도의 승객만 채운 채 운항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캐나다로 여행 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한국인 대부분은 이민 또는 유학을 떠나는 사람 아니면, 한국에 다녀가는 캐나다 교포들이었다.
탑승객 태반은 일본인들이었다.
일본인 여행자들은 비싼 자기네 직항 비행기 대신 서울로 돌아서가는 저렴한 대한항공을 많이 이용했다.
지금은 캐나다노선 대한항공 승객 태반이 동남아계 캐내디언이라는 것을 아실 것이다.
모르셨다고?
500 명 가까운 승객과 승무원을 태운 보잉 747-200 점보기가 이륙했다.
한 두 달 바람이나 쐬고 오겠다는 마음으로 떠난 것이므로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서울의 불빛들이 아래로 멀어져갔다.
비행기 뒷자리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행기 이륙하는데 누가 재수없게 울고 있나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내 또래 쯤 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멀어져가는 서울시내 야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보나마나 이민을 떠나는 여인일 것이다.
그 아가씨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혀를 끌끌찼다.
'웬만하면 태어난 나라에 그냥 살지, 왜 굳이 떠나면서 질질짜고 있나?'
이민가는 아가씨를 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찼던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눌러 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도 확실히 단언하기는 어렵다.
한 두 달 여행이나 하고 오겠다는 생각으로 떠났는데,
어쩌다가 30 년이 흘러갔다.
막상 와보니 경치도 좋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기왕에 온 길, 다시 돌아가는 것도 귀찮아 그냥 눌러 앉은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제 어르신이 되고보니 어렴풋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냥 눌러앉은 이유는,,, 아마도 자유로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이미 30 년 전에 그 자유로움을 처음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느낀 순간이 있었다.
차를 몰고 록키를 향해 1 번 하이웨이를 달려가던 중, Scott Hill 을 넘어서자마자 눈 앞이 확 트이면서 펼쳐지는 광활한 foothill.
그 장쾌한 풍경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순간 뇌리를 스쳤던 단어는 아름다움이나 광활함, 이런 게 아니었다.
'자-유' 바로 이 두 음절의 단어였다.
그건 그렇고,
내가 한국을 떠난 그 해 1 월에는 3 당합당 사건이 있었다.
3 당합당 사건이란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갑자기 한 자리에 모여 만세를 부른 사건을 말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1 월 22 일 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9 개월 전인 1989 년 4 월,
나는 전국단위로 재결집한 재야 기관지에 차별적 보수대연합을 처음 예견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차별적 보수대연합이란 군사독재정권이 양김(兩金) 중 하나와 연대하여 다른 하나를 고사시키는 정계개편공작을 말한다.
양김이란 말을 모르는 분들도 많을터인데, 양김(兩金)이란 김대중-김영삼을 말한다.
그때만해도 지금처럼 쇠락하거나 맛이 가지는 않았던 조선일보에서 내가 쓴 칼럼을 '재야의 시각'이라며 인용보도했다.
인터뷰 요청이 왔지만 거절했다.
결코 좋은 성격은 아니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남들 앞에 나서서 무엇을 자랑하거나 잘난 척하는 걸 병적일 정도로 싫어한다.
.. 는 말은 농담이고,
말이 인터뷰지 자기들도 감을 잡고 있었을 차별적 여야합당 움직임의 단초를 파악할 수 있는 또다른 정보라인을 캐내보기 위한 수작이 뻔했다.
예견 중 빗나간 대목이 한 가지 있었다.
나는 노태우 정권의 합당공작대상을 평화민주당(김대중)으로 판단했었는데, 결국 통일민주당(김영삼)이 최종 합당대상으로 결정된 것이다.
영호남보수연합을 비밀리에 추진하던 박철언 라인이 반DJ 군부강경파와 서동권 안기부라인에 의해 제동이 걸린 결과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전해 들었다.
강현준은 내 본명이 아니다.
내멋대로 지은 가명이었다.
사진에서 잘린 옆 기사 문목사 방북문답기사를 쓴 정시진도 본명이 아니다.
내 본명은 아무도 모를테고,
정시진 씨 본명은 그와는 상관없는 이 글에서 굳이 밝힐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어쨌든
1980 년대 후반,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한국에서의 열정적인 마지막 나날들을 보냈던,
그래서 한 면에서는 좋은 기억이 많이 남아있는 그 나라가, 30 년이 지난 오늘 저렇게 '큰 나라'로 성장해 우뚝 서 있어서 정말 기분이 좋다.
30 주년인데 갈데는 없고,
짜장면 하나 먹자고 마스크 쓴 채 이렇게 줄이나 서고,
그저 할아버지처럼 옛날 이야기나 .....
Flatten the Curve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