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소설-풀문 파티(3회)
여행소설 ― 풀문 파티(3회)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면 내 몸은 재가 되어 있겠지. 그게 이곳 풍습이니까. 이제야 삶의 문고리를 제대로 움켜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문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하지만 미련은 없다. 미련을 가진다고 운명이 바뀌는 것도 아니니까.
네 형수, 쏨은 만났지? 아직 어린 사람이지만, 내 아이를 낳아준 사람이다. 꼬 팡안 기억하니? 풀문 파티가 열리는 섬. 그곳에서 쏨을 처음 만났지. 5년 전이구나. 신림동 고시촌에서 너와 저녁을 먹은 다음날 태국 행 비행기를 탔지. 그리고 곧장 꼬 팡안으로 갔어. 내가 도착한 날은 풀문 파티가 열리기 하루 전이었어. 그날 저녁, 해변을 거닐다가 왜 꼬 팡안에서 풀문 파티가 열릴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되었지. 풀문 파티가 열리는 핫린 해변에 달이 뜨면 얼마나 크고 밝은지 몰라. 마치 세상을 향해 주술을 걸고 있는 어둠의 정령 같은 모습이지. 보름달이 뜰 때면 해변을 대낮처럼 밝히는 황홀한 광휘는 너무나 감동적이야. 이런 달 아래 미치지 않고 견딜 사람이 있을까.
그날 달빛에 취해 해변을 쏘다니다 불춤을 추는 사람을 보았어. 어린아이처럼 조그만 몸집의 사람이 양쪽 끝에 횃불을 매단 봉을 자유자재로 휘두르고 있더군. 불의 혼을 가진 불새처럼 그 사람은 봉과 하나였지. 가까이 가보니 놀랍게도 그 춤의 주인공은 소녀였어.
소녀는 밤새도록 불춤을 추었어. 자신의 영혼마저 태워버릴 듯 쉬지 않고 불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은 달의 요정 같았어. 그 밤 내내 그녀에게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지. 이윽고 수평선에서 해가 떠오르자 그녀는 탈진했는지 해변에 쓰러지고 말더군.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서 모래밭에 누워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어. 땀과 모래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평화스럽더군.
내가 가지고 있던 생수통을 내밀자 그녀는 단숨에 들이키더니 몸을 추켜세우고 비척비척 걸어갔어. 그렇게 사라져 가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지. 감히 달의 요정에게 말을 걸어볼 용기가 없었거든.
다음날 이른 저녁부터 핫린 해변은 수많은 배들로 북적였어. 풀문 파티를 즐기려고 다른 섬에서 오는 사람들을 태운 배들이 속속 몰려들었지. 휘황하게 불을 밝힌 해변을 향해 수십 척의 배가 컴컴한 밤바다를 가르며 몰려드는 광경은 장관이더군.
해변의 노천 바를 순례하던 나는 어느 한적한 바의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했지. 간밤에 신들린 것처럼 불춤을 추던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작고 평범한 소녀에 불과했어. 내가 다가가서 눈인사를 건네자 그녀도 눈인사로 답을 하더군.
그날 나는 그녀와 함께 온 해변을 쏘다니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지. 동이 터올 무렵에는 모래밭에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입맞춤도 나누었어. 풀문 파티에 도취되어 밤을 지새운 자라면, 그리하여 숙취와 졸음으로 머릿속이 안개에 가려진 상태에서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하는 자라면, 제 아무리 고상한 성자라도 곁에 있는 사람과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을 거야.
그녀는 꼬 팡안에서 태어나 꼬 팡안에서 자란 토박이였어. 고기잡이를 하던 부모는 몇 년 전 풍랑을 만나 실종되었고 그녀는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며 살아왔대. 부모가 실종된 뒤부터 그녀는 불춤을 추기 시작했대. 그녀에게 불춤은 부모의 극락왕생을 위한 진혼무이자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떨쳐버리는 의식이었던 거야.
그날부터 나는 꼬 팡안에 눌러앉았어. 순전히 그녀 때문이었지. 낮에는 해변에서 빈둥거리고 저녁에는 바를 순례하는 날들이 이어졌지. 그녀와 함께 하는 동안에는 해가 어느 쪽에서 떴다가 어느 쪽으로 지고 바다가 시시각각 무슨 색깔의 옷으로 갈아입는지 도통 관심이 없었어. 오직 그녀와 함께 밥을 먹고 그녀와 함께 이를 닦고 그녀와 함께 술을 마시는 게 중요했으니까.
그렇게 여섯 달쯤 지나자 몸이 쑤셔오기 시작하더군.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미 알지? 원죄처럼 덧씌워져 있는 방랑벽을 참을 수가 없었어. 그녀의 눈물을 보는 게 가슴 아팠지만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꼬 팡안을 떠났지.
정말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더군. 꼬 팡안을 떠난 내 앞에는 새로운 여행지가 한없이 펼쳐졌으니까. 태국 북부의 치앙마이, 치앙라이, 치앙콩을 거쳐서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폴, 인도네시아, 필리핀…… 동남아 구석구석 내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지.
그러다 다시 태국에 돌아온 건 3년 만이었어. 방콕에서 인도를 거쳐 네팔로 가려다 비자 발급 문제로 며칠 시간이 생기자 불현듯 꼬 팡안에 가보고 싶어지더군. 그녀와의 약속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어.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마침 풀문 파티가 열릴 무렵이어서 예전의 추억을 되새겨 보고 싶었던 거야.
3년 만에 다시 찾은 꼬 팡안은 별로 변한 게 없더군. 나는 3년 전처럼 해변의 바들을 순례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놀랍게도 한 해변 바에서 그녀, 쏨을 다시 만났어. 좋은 남자 만나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아직도 그곳에 있었던 거야.
그날 저녁,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어. 그녀에게 아이가 있었어. 내 아이가. 풀문 파티가 준 선물! 그녀는 내가 한 약속을 굳게 믿고 꼬 팡안을 떠나지 않은 채 아이를 키우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유행가도 남이 부를 때는 유치하게 들리지만 내가 부를 때는 감정이 복받칠 때가 있잖아. 관객일 때는 신파극이었는데 막상 내가 주인공이 되니까 너무나 감동적이더군.
여러 날을 고심했지. 나를 믿고 나만을 기다려준 이 여자에게 내가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결론은 이렇게 내렸어. 죽을 때까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살기로. 그래서 그녀의 뜻을 좇아 빠이로 오게 되었지. 그녀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 했거든. 땅을 파서 기둥을 세우고 벽돌을 쌓으며 게스트 하우스를 짓는 동안 진짜 행복했어. 나만을 믿고 나만을 사랑하고 나만을 따르는 사람이 둘이나 있다는 거, 그들을 위해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거, 그게 얼마나 가슴 벅차고 숭고한 일인지 너는 아니?
헌데 그걸 아는데 너무 오래 걸렸어. 남은 시간이 너무 짧아. 역시 나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체질인가 봐. 이제 내가 이주하게 될 곳은 어딜까. 천국일까, 지옥일까. 아니면 또 다른 미지의 세계일까. 그곳에서는 이 정처 없는 떠돎도 끝날 수 있을까?’
뒤로 갈수록 형의 필체는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 숨을 모아 한 자 한 자 힘겹게 써내려갔으리라. 빛났던 지난 생의 시간들을 되짚어보는 그 순간만큼은 그래도 행복했겠지.
방안을 가득 메운 매캐한 향 연기 때문인지 두 눈이 따끔거려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언제 오는 거야?”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지?”
“너무너무 보고 싶어.”
현주는 입에 발린 소리들을 쏟아냈다. 나도 건성으로 대답했다.
“내일 출발할 거야.”
“역시 한국 음식이 최고지.”
“나도.”
내가 2차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다면 그녀는 미련 없이 떠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른 고시준비생이나 이미 합격한 예비법조인을 수소문하겠지. 어쩌면 1~2년쯤은 더 기다려줄지도 모른다. 나의 성기가 자신의 자궁과 궁합이 잘 맞는다는 확신만 있다면.
현주와의 통화를 마치고 본채에서 나왔다. 어느새 마당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시골이어서 그런지 도시보다 밤이 일찍 찾아오는 것 같았다. 태국에서 맞는 두 번째 밤이었다. 방콕에서의 첫 밤보다 빠이의 밤이 왠지 더 포근하게 느껴졌다.
“이곳에는 모두 일곱 민족이 살고 있어요.”
마당 한쪽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박이 다가왔다.
“태국 고산족과 미얀마, 중국 등지에서 흘러온 유민들이죠. 이곳에 최초로 터를 잡기 시작한 부족은 미얀마에서 건너온 샨족인데 그들 언어로 빠이가 ‘이주’라는 뜻이래요. 그런 유래 때문인지 이곳에는 떠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지요.”
박이 엄지와 검지로 담배꽁초를 퉁겼다. 작은 불꽃을 남기며 담배꽁초는 어둠 속으로 이주해버렸다.
“잠자리가 마련되어 있을 겁니다. 들어가서 쉬세요.”
“박 사장님도 편히 쉬십시오.”
박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어둠 속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박이 사라진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틀 동안 누적된 불면의 피로가 일시에 몰려 왔다. 물 먹은 솜처럼 눅진한 의식이 한 올 한 올 어둠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내 잠자리가 준비된 방갈로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동전만한 크기로 어둠을 도려내고 있는 그 불빛은 동굴의 입구처럼 보였다. 저 입구로 들어가면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가 있을 것 같았다. 그 통로로 걸어들어 가면 내가 모르고 있는 또 다른 세계의 삶을 경험해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방갈로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순간, 형수와 조카가 있는 본채의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본채에서 새어나오는 불빛 사이로 잠시 떠오르다 사라진 얼굴은 쏨이었다. 그녀는 어둠과 한 몸이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본채에서 나온 쏨은 길이가 1미터쯤 되는 나무 막대기 하나를 들고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들키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쏨은 마을을 빠져나와 들판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갔다. 보름이 가까운지 하늘에는 어둠의 눈알처럼 퀭한 달이 떠 있고, 달빛을 머금은 채 누워 있는 길은 짐승의 뼈처럼 하얗고, 사방에서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요란하게 울어댔다.
얼마나 걸었을까. 쏨은 마을에서 제법 떨어진 개울가에 멈춰 섰다. 달빛에 비친 개울은 커다란 물고기처럼 비늘을 뽐내며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천지는 죽음 같은 정적에 잠겨 있고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만이 시간이 정지되지 않았음을 일깨워줄 뿐이었다.
쏨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성냥이었다. 그녀가 성냥불을 막대기 한쪽 끝에 갖다 대자 불송이가 치솟았다. 막대기의 다른 쪽 끝에서도 불이 타올랐다. 양 끝에서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는 막대기를 하늘을 향해 치켜든 그녀의 입에서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고 입술 사이에 나뭇잎을 끼워놓고 불어대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윽고 그녀는 천천히 막대기를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잔뜩 숙인 채 어둠 속에서 막대기와 한 몸이 되어 불춤을 추고 있는 쏨을 향해 조심스레 다가갔다.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자 불빛에 간간이 드러나는 그녀의 얼굴이 은으로 도금 한 것처럼 반들거리고 있다는 걸 식별할 수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는 중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견디기 위해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고 있지만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불새 한 마리가 온몸으로 흐느끼면서 진혼제를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여전히 불춤에 몰두해 있는 그녀의 머리 위로 별똥별 하나가 지나갔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