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지난 방콕 체류기-4
여행자의 고민거리 중 하나는 빨래이다. 태국처럼 늘 더운 나라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어야 하므로 금세 빨래감이 쌓인다. 관광대국답게 태국 곳곳에는 여행자를 위한 빨래방이 많이 있다. 오전에 맡기면 그날 저녁이나 다음날 아침에 찾을 수 있으며 요금은 1킬로그램에 35밧으로 한화로 1500원 수준이다.
방콕 카오산에는 내 단골 빨래방이 있다. 작고 비쩍 마른 체구의 할머니가 운영하는 그 빨래방에만 옷을 맡긴지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관찰한 바에 의하면 할머니는 별다른 가족도 없이 혼자서 빨래방을 운영하는 것 같았다. 그 많은 빨랫감을 혼자 힘으로 세탁하고 널고 개고 간혹 다림질도 한다. (다림질은 옵션이다.) 게다가 그 빨래방에서 숙식도 해결하는 것 같았다. 담도 벽도 없고 천막을 지붕으로 삼은 바깥 공간에서 말이다.
어떤 여행 친구는 할머니가 물 아끼느라 헹굼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때가 덜 가시는 그 빨래방을 왜 이용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같은 값에 훨씬 깔끔하게 빨래를 해주는 곳도 많은데 하필이면 그 집이냐고. 그 물음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친구 말이 맞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감정이란 게 존재한다. 툭하면 옷이 바뀌고 양말 한 짝이 사라져서 속을 썩이곤 하지만, 나는 방콕에 올 때마다 그 빨래방에 옷을 맡긴다.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간단한 안부 인사도 제대로 나눌 수 없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잘 지키고 계신지 눈인사라도 하러 일부러 찾아가는 것이다.
애드히어블루스바에서 이틀 연속 같은 사람들과 합석을 했다. 애드히어블루스바는 장소가 협소해서 모르는 사람과 합석하는 일은 당연하다. 특히 주말에는 한 테이블에 서너 팀이 합석하기도 한다.
이틀 연속 나와 합석을 한 두 여성은 얼굴이 너무 닮아서 쌍둥이냐고 물어봤더니 자매라고 했다. 언니는 46세이고 동생은 43세란다. 자매는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살고 있단다. 태국에서 악세사리와 의상을 수입해서 판매하는 언니의 출장길에 동생이 따라왔다고 했다. 태국 남부의 섬 꼬따오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다가 한국인 사진가를 만났는데, 내가 자신들이 만난 두번째 한국인이란다. 둘은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는데 아이를 둘씩 키우고 있단다. 둘 다 미혼모인 셈이다. 그런 말을 하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스페인에서는 미혼모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그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스페인 자매의 언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내 나이를 물었다. 내가 몇 살이라고 알려주자 자기보다 어린 줄 알았다고 하면서 10년 뒤에 자기랑 사귀자고 한다. 연예도 예약이 되던가? (코로나19가 스페인을 휩쓴다는 뉴스를 보고 페이스 북으로 연락을 했더니 두 자매는 무사하며 집콕 중이라고 한다.)
어제는 캐나다에서 온 중년 부부와 합석을 했다. 두 사람은 태국에 처음 왔단다. 재즈 공연을 무척 좋아해서 어제는 방콕의 또 다른 라이브바 색소폰에 갔단다. 남편은 판사이며 부인은 살림만 한단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1988년에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다는 걸 기억하고 있으며 같은 해에 자신이 살고 있는 캘거리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렸다고 한다. 나는 내년에 한국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린다고 알려주었다.
캘거리에서 온 판사는 음악에 대한 상식이 깊었다. 서로 좋아하는 가수 이야기를 하는데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자 판사는 내게 나이를 물었다. 내가 나이를 알려주자 깜짝 놀라면서 내가 서른 살쯤 먹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같은 세대라면서 껄껄거렸다.
오늘은 또 어느 나라에서 온 어떤 사람과 합석을 하게 될까? 오늘은 합석한 사람이 나이를 묻더라도 절대 곧이곧대로 알려주지 말고 스무살 쯤 적게 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