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앞두고.. 작별인사 하는 법
sar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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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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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 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들 중 하나는 남은 사람들과의 작별인사가 아닐까 합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비롯해서,
먼저 이승을 떠난 사람들과 죽음 전 작별인사를 하고 장례식에 참석해 온 기억들을 되살려보면,
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던 시간이 가장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 이야기 한 적이 있지만,
갑작스런 죽음이나 긴 혼수상태에 있다가 사망하는 경우가 아니고 사망 시기가 대체로 예측되어 있는 경우라면,
임종 며칠 전에 친지와 친구들, 그리고 환자가 생전에 꼭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차례로 초대됩니다.
저는 죽을 때가 임박했을 때 누구를 꼭 만나고 싶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제가 가장 마음의 상처를 많이 입혔거나 피해를 주었던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say good bye 하기 전에 화해하고 싶은 사람들 말이지요.
환자의 사망예측시기가 임박하면 병원에서 환자 가족들에게 미리 알려 줍니다.
아무래도 죽음이 임박해서 만나는 사람들은 배우자와 직계가족들 일 것 입니다.
Time to say good bye...... 가족들과 마지막 기억을 담는 순간입니다.
환자의 몸이 더 이상 링거 솔루션조차 받지 않게 되면
환자는 병원에서 hospice로 옮겨집니다.
호스피스 병실은 병실이라기보다는 아담한 호텔객실을 닮았습니다.
안락하고 쾌적합니다.
이 마지막 장소에서,
환자들은 가족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음식은 물론 수분공급조차 종료한 상태의 환자는 갈증과 고통으로부터도 점차 해방되어 갑니다.
환자를 돌보고 각종 수발을 드는 일은 가족들이 하는 게 아니라 호스피스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합니다.
직원들이나 자원봉사자들이나,
마치 천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헌신적인 분들이 많습니다.
슬픔에 치져있는 가족들이 하는 일은 환자의 남은 시간들을 곁에서 지켜주는 것 뿐 입니다.
환자가 마지막 숨을 거두면,
담당 간호사는 환자의 맥을 한참 짚고 있다가 사망선고를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환자가 사망하자마자 환자의 얼굴을 시트로 덮는데 그러지는 않습니다.
사망선고는 보통 호스피스에 근무하는 RN 이 합니다.
사망선고를 꼭 의사가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간호사는 옆에서 오열하는 유가족들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유가족들의 어깨를 안아주며 조용한 목소리로 <let him(her) go peacefully.> 라고 말해 줍니다.
이제 편히 가시도록 놓아드리라는 의미입니다.
간호사의 사망선고가 끝나면
호스피스 직원, 보통은 담당 간병 자원봉사자가 장미꽃 한 송이를 고인의 가슴 위에 놓아줍니다.
고인이 머물렀던 층의 로비에는 실내등이 꺼지는 대신 어두운 밝기의 조명등과 촛불 두 개가 켜집니다.
고인의 숨이 멈추고 나서 얼마 후,
검은 색 정장 차림의 funeral service 직원들이 도착합니다.
그들이 운구용 카트를 밀고 나가면
호스피스 직원들과 같은 층에 있던 방문객들, 그리고 다른 환자 가족들이 방에서 나와 엘리베이터 문 양쪽에 도열해 줍니다.
아직은 평상복 차림인 고인의 유가족들은
호스피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운구용 카트를 따라 운구차량이 대기하고 있는 호스피스 정문 앞까지 따라 나옵니다.
메모리얼 서비스와 하관예식을 주관하는 진행은 보통 성직자(clergy)가 담당합니다.
사망자의 삶의 흔적들 가운데 의미 있는 사건들을 소재 삼아 교훈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 편 입니다.
어떤 사망자들은 <고별사>를 준비하는 clergy 들을 아주 애먹이는 수가 있습니다.
고별사를 하는 성직자나 율러지를 하는 고인의 지인들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얼버무리거나 횡설수설하는 일이 없도록,
살아가는 동안 뚜렷하게 기록에 남을만한 착한 일을 율러지 10 분 분량이라도 하고 떠나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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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죽음과 작별인사를 주제로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한 달 여 전 쯤 넷플릭스를 통해 처음 본 명작 아이리시맨을
오늘 두 번 째 완주했습니다.
세 시간 반 짜리 영화를 두 번 본다는 게 쉽지는 않은데,
두 번 아니라 세 번, 네 번도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는 아이리시맨이라는 제목 아래 '어느 이민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부제를 달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미국 이민사에서, 1964 년 민권법 시행 수 십 년 전에 들어와 제도적 문화적 사회적 다중 인종차별을 당했던 대표적 에스닉계열이 있다면 아마도 아일랜드 출신과 이태리 출신 이민자들일 것 입니다.
어메리칸 퍼스트 네이션(원주민)과 아프리칸 어메리칸(흑인)을 제외한다면 말이지요.
오늘은 미국 근현대사의 이면을 몇몇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통해 그려낸 이 영화의 본래 주제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로 대신합니다.
사실 이 영화가 나에게 준 가장 강렬한 메시지는 미국 이민사라든가 마피아 같은 사회적 주제들이 아니라,
바로 '한 개인의 죽음' 이었기에 그렇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죽음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 전에 영화가 끝나니까요.
제가 가장 인상깊게 본 장면은 바로 이 마지막 장면입니다.
한 세상을 함께 살아왔던 동료, 적, 은인, 배우자는 물론 변호사까지 세상을 떠나고
딸들로부터는 버림을 받은 이 노인이 방문객(신부)에게 한 마지막 부탁은 나갈 때 자기 방문을 조금 열어놓아달라는 거 였지요.
죽음을 앞두고, 작별인사를 할 사람이 하나도 없이, 진심으로 슬퍼해 줄 사람 하나도 없이,
더 비참하게는 자신을 기억해 줄 사람 하나도 없이,
폐쇄된 공간에 홀로 있는 것처럼 두려운 사실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딱히 불행한 죽음이란 게 따로 있다면,
기억해 주는 사람도 없고, 작별인사 할 사람조차 없는 외로운 죽음이라는 것에 공감합니다.
악하게 살고 선하게 살고가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삶이
그런 불행한 외로움을 자초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그렇고,
영화 후반부에서 재미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이리시맨 프랭크 시런이 자기 스스로 사후에 안치될 채늘하우스의 봉안당 번호를 고릅니다.
그가 고른 번호는 1948 이였는데,
문득 떠오는 게 있어 아일랜드의 역사를 검색해보니 1948 년이 이 나라에서 공화국헌법이 선포되고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해 였습니다.
만일 내가 모국이 독립을 한 해를 봉안당 번호로 선택한다면
나역시 프랭크 시런처럼 1948 번을 골라야 하는지
(1919 번은 아무래도 이상하고, 1945 번은 절대 아니고)
내키지가 않고 찜찜하기만 합니다.
사진 중 맨 아래는 영화 아이리시맨 스틸사진이고, 나머지 사진 세 개는 2012 년 5 월 10 일 모친 장례식날 제가 찍은 사진들 입니다.
죽음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7 년 전 사진첩에 들어가보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