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글] 타이영화가 맛있는 두세가지 이유
타이영화가 맛있는 두세가지 이유
문석 기자의 사적이고 경쾌한 타이영화 100배 즐기기
솔직하게 말하자. 타이에 한번 출장을 간 이유로 ‘타이영화 담당자’가 됐지만, 나는 타이영화에 관해 잘 알지 못한다. 봤다고 해야 이번 부산영화제에 출품되는 작품 중의 다섯편을 포함해서 9편 뿐이며, 그중 8편은 비디오를 통한 것이니 제대로된 담당자라고 말하기도 힘든 형편이다. 사실 내게 타이에 관한 주된 인상은 불교의 나라, 관광의 나라, 그리고 출장 이후론 음식의 나라라는 느낌 하나가 추가된 정도다.
아닌게 아니라 타이의 음식은 정말로 싸고 맛있다. 무리를 해서라도 지난 여름휴가를 타이에서 지내려 했던 것도 오리알을 얹은 게찜, 왕새우구이, 그리고 이름 모를 수많은 요리를 4인분씩 먹었는데 우리 돈 3만원만 지불했다는 행복한 기억 때문이다. 결국 타이영화에 대한 느낌도 이 기억의 영향권 아래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이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입에 침이 고이니 말이다. 사정이 이러니 이 글은 ‘타이영화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내 입에서 느껴지는 타이영화의 맛’에 대한 내용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부산을 찾는 타이영화 중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를 걸게 한 작품은 <잔다라>다. 1999년 <낭낙>으로 타이영화 흥행 기록을 세웠던 논지 니 미부트르 감독의 신작이라는 사실보다는 ‘진짜로 야하다’는 소문을 눈으로 확인하고픈 조급한 마음 때문에 말이다. 으흠, 과연. <잔다라>는 야하다. 하지만 달콤하진 않다. 어머니를 희생시키며 세상에 나왔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학대를 받는 잔다라라는 소년이 성에 눈 떠가는 과정은 너무 적나라해 슬프기까지 하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종려시와 소년의 갖가지 체위의 성행위 장면 역시 매우 ‘사실적’이긴 하지만 쌉싸롬한 뒷맛을 진하게 남긴다.
폐막작 <수리요타이>는 타이영화의 용틀임을 체험하게 한다. 150억원, 에다가 타이의 물가수준을 고려한 플러스 알파까지 더한다면 이 영화의 제작비는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다. 그런 규모에 걸맞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스펙터클은 역시나 웅장하다. 16세기 중반 버마의 침공에 맞선 아유타야 왕국의 왕비 수리요타이의 이 일대기에는 수천명의 배우, 수십마리의 코끼리와 말이 등장하는 숨 넘어가는 액션장면과 호사스럽기 그지 없는 금빛 찬란한 왕궁 등을 재현해낸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자꾸 먹으면 질리듯, 뻑적지근한 스펙터클을 3시간 넘는 시간동안 계속 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더라도 실망할 것은 없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는 <여인천하>의 중전과 경빈의 싸움을 능가하는 여러 세력의 살벌하기 그지없는 권력 쟁투다.(사람들의 관심은 어디서나 비슷한 모양이다.)
올해 초 개봉해 <낭낙>이 갖고 있던 최고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는 <방라잔>은 얼핏 <수리요타이>와 비슷해 보인다.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버마의 침공에 맞서는 아유타야 왕국의 이야기를 그렸고, 기본적으로 영웅담이며, 웅장한 스케일과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점 등. 그러나 <수리요타이>가 좋은 재료와 온갖 향신료를 써서 화려한 맛을 보여준다면, <방라잔>은 텁텁하지만 구수한 맛이 나는 영화다. 버마의 정규군에 맞서 처절한 투쟁을 벌이는 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이 작품에선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게 배어 나온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큰 거부감 없이 다가온 것은 ‘애국’이나 ‘민족’같은 거창한 이야기로 이성을 흐리게 하려기 보다 자신의 가족과 이웃을 지키기 위해 공포와 맞서는 범인들의 삶을 설득력 있게 그린 덕분인 듯하다.
현대 타이사회와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길 원한다면 <골클럽>이 좋겠다. 사실 지루하기 그지없는 몇몇 예술영화를 보느니 이 영화를 선택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골클럽>의 주인공은 축구도박을 중간에서 중계해주는 소년들이다. 정규교육과 가정으로부터 엇나간 이 아웃사이더들은 어찌어찌해 보스의 돈을 떼어먹게 되더니, 아예 맛을 들여 보스 몰래 자기들의 판을 만든다. 갈수록 이들의 욕망은 거침이 없어지고 우정의 그늘 또한 불어나는 돈만큼 벌어진다. 자칫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쉬운 이야기지만, <골클럽>은 경쾌하고 싱싱하다. 무엇보다 아웃사이더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 향긋하다. 타이식 패스트푸드가 있다면 이런 맛이리라. 좀 더 자연스럽고 싱그러운 맛을 기대하는 분이라면 <통을 찾아서>를 찾아보시라. 마을에 사는 거지 노파의 아들 통을 찾기 위해 방콕 시내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시골 꼬마들을 그린 이 영화는 우리네 <팔도강산> 시리즈와 <스탠 바이 미> 같은 성장영화를 섞어놓은 듯하다. 물론 타이영화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거나 제일 감동적이라거나, 최고의 예술성을 갖췄다, 고 과장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내러티브가 탄탄하고 기술적으로 뛰어난 점이 많았으며, 표현력도 풍부하다는 점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번 특별전에는 <킬러 타투> <달사냥꾼> 같은 장편영화, 애니메이션 <사이암 키드>, 그리고 단편영화와 뮤직비디오도 준비돼 있다. 아무리 타이영화가 세계적 명성을 누린다 해도 당분간 이렇게 흐뭇한 상차림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가, 색다른 타이식 메뉴로 입맛을 돋우는 것.
-cine21
문석 기자의 사적이고 경쾌한 타이영화 100배 즐기기
솔직하게 말하자. 타이에 한번 출장을 간 이유로 ‘타이영화 담당자’가 됐지만, 나는 타이영화에 관해 잘 알지 못한다. 봤다고 해야 이번 부산영화제에 출품되는 작품 중의 다섯편을 포함해서 9편 뿐이며, 그중 8편은 비디오를 통한 것이니 제대로된 담당자라고 말하기도 힘든 형편이다. 사실 내게 타이에 관한 주된 인상은 불교의 나라, 관광의 나라, 그리고 출장 이후론 음식의 나라라는 느낌 하나가 추가된 정도다.
아닌게 아니라 타이의 음식은 정말로 싸고 맛있다. 무리를 해서라도 지난 여름휴가를 타이에서 지내려 했던 것도 오리알을 얹은 게찜, 왕새우구이, 그리고 이름 모를 수많은 요리를 4인분씩 먹었는데 우리 돈 3만원만 지불했다는 행복한 기억 때문이다. 결국 타이영화에 대한 느낌도 이 기억의 영향권 아래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이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입에 침이 고이니 말이다. 사정이 이러니 이 글은 ‘타이영화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내 입에서 느껴지는 타이영화의 맛’에 대한 내용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부산을 찾는 타이영화 중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를 걸게 한 작품은 <잔다라>다. 1999년 <낭낙>으로 타이영화 흥행 기록을 세웠던 논지 니 미부트르 감독의 신작이라는 사실보다는 ‘진짜로 야하다’는 소문을 눈으로 확인하고픈 조급한 마음 때문에 말이다. 으흠, 과연. <잔다라>는 야하다. 하지만 달콤하진 않다. 어머니를 희생시키며 세상에 나왔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학대를 받는 잔다라라는 소년이 성에 눈 떠가는 과정은 너무 적나라해 슬프기까지 하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종려시와 소년의 갖가지 체위의 성행위 장면 역시 매우 ‘사실적’이긴 하지만 쌉싸롬한 뒷맛을 진하게 남긴다.
폐막작 <수리요타이>는 타이영화의 용틀임을 체험하게 한다. 150억원, 에다가 타이의 물가수준을 고려한 플러스 알파까지 더한다면 이 영화의 제작비는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다. 그런 규모에 걸맞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스펙터클은 역시나 웅장하다. 16세기 중반 버마의 침공에 맞선 아유타야 왕국의 왕비 수리요타이의 이 일대기에는 수천명의 배우, 수십마리의 코끼리와 말이 등장하는 숨 넘어가는 액션장면과 호사스럽기 그지 없는 금빛 찬란한 왕궁 등을 재현해낸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자꾸 먹으면 질리듯, 뻑적지근한 스펙터클을 3시간 넘는 시간동안 계속 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더라도 실망할 것은 없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는 <여인천하>의 중전과 경빈의 싸움을 능가하는 여러 세력의 살벌하기 그지없는 권력 쟁투다.(사람들의 관심은 어디서나 비슷한 모양이다.)
올해 초 개봉해 <낭낙>이 갖고 있던 최고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는 <방라잔>은 얼핏 <수리요타이>와 비슷해 보인다.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버마의 침공에 맞서는 아유타야 왕국의 이야기를 그렸고, 기본적으로 영웅담이며, 웅장한 스케일과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점 등. 그러나 <수리요타이>가 좋은 재료와 온갖 향신료를 써서 화려한 맛을 보여준다면, <방라잔>은 텁텁하지만 구수한 맛이 나는 영화다. 버마의 정규군에 맞서 처절한 투쟁을 벌이는 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이 작품에선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게 배어 나온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큰 거부감 없이 다가온 것은 ‘애국’이나 ‘민족’같은 거창한 이야기로 이성을 흐리게 하려기 보다 자신의 가족과 이웃을 지키기 위해 공포와 맞서는 범인들의 삶을 설득력 있게 그린 덕분인 듯하다.
현대 타이사회와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길 원한다면 <골클럽>이 좋겠다. 사실 지루하기 그지없는 몇몇 예술영화를 보느니 이 영화를 선택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골클럽>의 주인공은 축구도박을 중간에서 중계해주는 소년들이다. 정규교육과 가정으로부터 엇나간 이 아웃사이더들은 어찌어찌해 보스의 돈을 떼어먹게 되더니, 아예 맛을 들여 보스 몰래 자기들의 판을 만든다. 갈수록 이들의 욕망은 거침이 없어지고 우정의 그늘 또한 불어나는 돈만큼 벌어진다. 자칫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쉬운 이야기지만, <골클럽>은 경쾌하고 싱싱하다. 무엇보다 아웃사이더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 향긋하다. 타이식 패스트푸드가 있다면 이런 맛이리라. 좀 더 자연스럽고 싱그러운 맛을 기대하는 분이라면 <통을 찾아서>를 찾아보시라. 마을에 사는 거지 노파의 아들 통을 찾기 위해 방콕 시내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시골 꼬마들을 그린 이 영화는 우리네 <팔도강산> 시리즈와 <스탠 바이 미> 같은 성장영화를 섞어놓은 듯하다. 물론 타이영화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거나 제일 감동적이라거나, 최고의 예술성을 갖췄다, 고 과장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내러티브가 탄탄하고 기술적으로 뛰어난 점이 많았으며, 표현력도 풍부하다는 점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번 특별전에는 <킬러 타투> <달사냥꾼> 같은 장편영화, 애니메이션 <사이암 키드>, 그리고 단편영화와 뮤직비디오도 준비돼 있다. 아무리 타이영화가 세계적 명성을 누린다 해도 당분간 이렇게 흐뭇한 상차림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가, 색다른 타이식 메뉴로 입맛을 돋우는 것.
-cine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