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김원철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고 정주영씨가 한 유명한 이야기다.
아주 오래전에 이 책을 읽어봤지만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잘 몰랐던 거 같다. 요즘에 와서야 그 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많이 와닿는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왜? 그건 바로 ‘실패’라는 놈이 우리의 발목을 꽉 잡고 있기 때문이다.
코끼리를 어떻게 길들이는지 아는가? 아주 어린 코끼리를 잡아와서 발목에 밧줄을 감아 말뚝에 감는다. 코끼리는 벗어나려고 안감힘을 쓴다. 그러나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면 코끼리는 포기하게 된다. 그 후 코끼리는 엄청나게 커진다. 그러나 엄청나게 커져도 발목에 밧줄만 묶여있어도 도망갈 것을 포기하고 인간의 말을 잘 듣게 된다.
언젠가 한번 동물원에 가서 아주 재밌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사자의 우리에 사람이 들어간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은 조련사였다. 그런데 조련사 손에는 무기도 없었고, 갑옷을 입은 것도 아니었다. 조련사가 사자를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사자가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자 조련사가 사자의 목덜미를 잡고 힘껏 끌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자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안가려고 버티는 것이었다.
정말 웃기는 장면이었다. 도대체 조련사가 끌고 가려고 하는 곳이 어떤 곳이길래 그 커다란 사자가 공포에 질려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까? 더 웃긴 것은, 버티고 있는 그 사자의 모습이었다. 무방비 상태의 조련사. 그야말로 발로 한번 후려치기만 해도 나가떨어질 인간이었다. 그런데 아예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강아지처럼 버티기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실패’란 놈이 이런 것일 것이다. 코끼리의 입장에서는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벗어나지 못했던 과거, 사자의 입장에서는 조련사 앞에서 당당하게 맞서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과거, 그것이 실패였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실패를 하게 된다. 투자에서도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실패를 많이 한 사람은 아무리 벗어나려고 노력해도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진다. 그래서 더 보수적이 되어지고, 지나치게 보수적이 되다보니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고,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니 또 스트레스를 받고… 이런 악순환이 계속 되어진다.
투자 컨설턴트이다보니, 아무래도 많은 투자자들을 상대로 자신감있게 말을 하게 된다. 하지만 사실 내부적으로 보자면 나도 종종 투자에 실패한다. 그런데 참 슬프게도, 실패한 투자는 나를 많이 아프게 한다. 돌이켜보면 성공율이 약 95%정도는 되는 거 같다. 그런데 그 5%가 95%의 성공을 모두 덮고도 남을 정도로 쓰라리다. 성공은 별거 아니고, 실패는 아프다.
그런 실패는 매우 아프기 때문에 상당히 오랜 시간 나와 함께 머물고 있다. 성공의 기쁨은 금방 사라지고, 실패의 아픔은 오래간다.
그래서 자꾸만 보수적이 된다. 적당히 보수적인 것은 좋지만 심해지면 ‘겁보’가 된다.
간혹 아픔도 없이 성공하는 투자자들을 본다. 그리고 별 어려움 없이 인생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런 그들을 보면 한없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을 보면 내 처지가 더 한심스럽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무능력하다는 생각도 들어 때로는 한없이 나약해지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마음속에 떠오른 말이 바로 그 문구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성공을 위해서 실패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실패를 하면 아프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완전히 망하는 것은 아니다. 아프긴 하지만 우린 충분히 상처를 아물게 할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런 상처가 났다고 해서 암에 걸리지는 않는다. 그저 쓰라릴 뿐이다.
자전거를 배우려면 넘어져야 한다. 넘어지면 상처가 난다. 상처가 나면 쓰라리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자전거를 타고 시원한 바람을 맞이면서 거리를 활보하고 싶다.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살면서 편안한 인생만을 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풍요가 좋다. 더 풍요롭고 싶다. 더 풍요로워져서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베풀고 싶다. 그렇다면 이까짓 실패쯤은 참아내자. 이까짓 쓰라림쯤은 참아내자. 그리고 앞으로 실패가 없다고 보장할 수도 없겠지만, 그래봐야 쓰라린 정도뿐이지 않겠는가? 그게 바로 시련을 겪을 수는 있지만 ‘완전히 무너지는 실패’는 아니라는 뜻 아니겠는가?
나는 요즘에서야 시간을 좀 내, 이것 저것을 배운다. (대부분 투자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임) 어떤 것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지만, 처음에 배울 때는 능숙한 사람들을 보면서 엄청나게 부러움을 갖게 되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열정으로 열심히 배운다. 하지만 조금만 배우다보면 금방 힘든 시점이 온다. 재미가 없고 지겹다. 소질이 없는 거 같고, 하기 싫어진다.
포기하면 얼마나 편안한가? 잘 되지도 않는 것을 끙끙거리며 할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뭔가를 능숙하게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면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얼마나 멋진가? 능숙하게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 능숙하게 필드를 누비고 있는 모습, 능숙하게 바다를 누비는 모습, 능숙하게 춤을 추고 있는 모습…
그 풍성함을 누리고 싶다면 지금의 지겨움쯤은 참아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돈’은 그것보다 훨씬 리스크가 크다. 아마도 주는 기쁨도 더 커서 그런가보다. 잘못되면 지겨움이 아니라 아픔이다. 아픔도 아주 오랫동안 계속 될 수 있는 악질적인 것일수도 있다.
그런데 아픔 너머에 있는 ‘풍성함’을 꿈꿀 것인가, 여기서 겁쟁이로 살아갈 것인가?
나는 더 많은 풍성함을 꿈꾸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아픔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 공포를 넘어서고 싶다. 또 실패하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련이 있다고 해도 ‘주저앉는 실패’는 없을 것이다.
나는 더 많은 풍성함을 위해 도전할 것이다. 그렇게 살고 싶다.
그런 꿈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꾸고 싶다. ‘혼자가 꾸면 꿈이지만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 꿈을 함께 꾸고, 함께 도전하고 싶다.
나와 당신은 그런 꿈을 꿀 수 있다.
나와 당신이 그런 삶을 꿈꿀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나와 당신은 ‘쓰라림’ 정도는 충분히 참아낼 수 있는 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에 이 책을 읽어봤지만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잘 몰랐던 거 같다. 요즘에 와서야 그 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많이 와닿는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왜? 그건 바로 ‘실패’라는 놈이 우리의 발목을 꽉 잡고 있기 때문이다.
코끼리를 어떻게 길들이는지 아는가? 아주 어린 코끼리를 잡아와서 발목에 밧줄을 감아 말뚝에 감는다. 코끼리는 벗어나려고 안감힘을 쓴다. 그러나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면 코끼리는 포기하게 된다. 그 후 코끼리는 엄청나게 커진다. 그러나 엄청나게 커져도 발목에 밧줄만 묶여있어도 도망갈 것을 포기하고 인간의 말을 잘 듣게 된다.
언젠가 한번 동물원에 가서 아주 재밌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사자의 우리에 사람이 들어간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은 조련사였다. 그런데 조련사 손에는 무기도 없었고, 갑옷을 입은 것도 아니었다. 조련사가 사자를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사자가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자 조련사가 사자의 목덜미를 잡고 힘껏 끌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자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안가려고 버티는 것이었다.
정말 웃기는 장면이었다. 도대체 조련사가 끌고 가려고 하는 곳이 어떤 곳이길래 그 커다란 사자가 공포에 질려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까? 더 웃긴 것은, 버티고 있는 그 사자의 모습이었다. 무방비 상태의 조련사. 그야말로 발로 한번 후려치기만 해도 나가떨어질 인간이었다. 그런데 아예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강아지처럼 버티기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실패’란 놈이 이런 것일 것이다. 코끼리의 입장에서는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벗어나지 못했던 과거, 사자의 입장에서는 조련사 앞에서 당당하게 맞서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과거, 그것이 실패였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실패를 하게 된다. 투자에서도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실패를 많이 한 사람은 아무리 벗어나려고 노력해도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진다. 그래서 더 보수적이 되어지고, 지나치게 보수적이 되다보니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고,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니 또 스트레스를 받고… 이런 악순환이 계속 되어진다.
투자 컨설턴트이다보니, 아무래도 많은 투자자들을 상대로 자신감있게 말을 하게 된다. 하지만 사실 내부적으로 보자면 나도 종종 투자에 실패한다. 그런데 참 슬프게도, 실패한 투자는 나를 많이 아프게 한다. 돌이켜보면 성공율이 약 95%정도는 되는 거 같다. 그런데 그 5%가 95%의 성공을 모두 덮고도 남을 정도로 쓰라리다. 성공은 별거 아니고, 실패는 아프다.
그런 실패는 매우 아프기 때문에 상당히 오랜 시간 나와 함께 머물고 있다. 성공의 기쁨은 금방 사라지고, 실패의 아픔은 오래간다.
그래서 자꾸만 보수적이 된다. 적당히 보수적인 것은 좋지만 심해지면 ‘겁보’가 된다.
간혹 아픔도 없이 성공하는 투자자들을 본다. 그리고 별 어려움 없이 인생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런 그들을 보면 한없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을 보면 내 처지가 더 한심스럽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무능력하다는 생각도 들어 때로는 한없이 나약해지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마음속에 떠오른 말이 바로 그 문구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성공을 위해서 실패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실패를 하면 아프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완전히 망하는 것은 아니다. 아프긴 하지만 우린 충분히 상처를 아물게 할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런 상처가 났다고 해서 암에 걸리지는 않는다. 그저 쓰라릴 뿐이다.
자전거를 배우려면 넘어져야 한다. 넘어지면 상처가 난다. 상처가 나면 쓰라리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자전거를 타고 시원한 바람을 맞이면서 거리를 활보하고 싶다.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살면서 편안한 인생만을 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풍요가 좋다. 더 풍요롭고 싶다. 더 풍요로워져서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베풀고 싶다. 그렇다면 이까짓 실패쯤은 참아내자. 이까짓 쓰라림쯤은 참아내자. 그리고 앞으로 실패가 없다고 보장할 수도 없겠지만, 그래봐야 쓰라린 정도뿐이지 않겠는가? 그게 바로 시련을 겪을 수는 있지만 ‘완전히 무너지는 실패’는 아니라는 뜻 아니겠는가?
나는 요즘에서야 시간을 좀 내, 이것 저것을 배운다. (대부분 투자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임) 어떤 것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지만, 처음에 배울 때는 능숙한 사람들을 보면서 엄청나게 부러움을 갖게 되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열정으로 열심히 배운다. 하지만 조금만 배우다보면 금방 힘든 시점이 온다. 재미가 없고 지겹다. 소질이 없는 거 같고, 하기 싫어진다.
포기하면 얼마나 편안한가? 잘 되지도 않는 것을 끙끙거리며 할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뭔가를 능숙하게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면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얼마나 멋진가? 능숙하게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 능숙하게 필드를 누비고 있는 모습, 능숙하게 바다를 누비는 모습, 능숙하게 춤을 추고 있는 모습…
그 풍성함을 누리고 싶다면 지금의 지겨움쯤은 참아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돈’은 그것보다 훨씬 리스크가 크다. 아마도 주는 기쁨도 더 커서 그런가보다. 잘못되면 지겨움이 아니라 아픔이다. 아픔도 아주 오랫동안 계속 될 수 있는 악질적인 것일수도 있다.
그런데 아픔 너머에 있는 ‘풍성함’을 꿈꿀 것인가, 여기서 겁쟁이로 살아갈 것인가?
나는 더 많은 풍성함을 꿈꾸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아픔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 공포를 넘어서고 싶다. 또 실패하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련이 있다고 해도 ‘주저앉는 실패’는 없을 것이다.
나는 더 많은 풍성함을 위해 도전할 것이다. 그렇게 살고 싶다.
그런 꿈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꾸고 싶다. ‘혼자가 꾸면 꿈이지만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 꿈을 함께 꾸고, 함께 도전하고 싶다.
나와 당신은 그런 꿈을 꿀 수 있다.
나와 당신이 그런 삶을 꿈꿀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나와 당신은 ‘쓰라림’ 정도는 충분히 참아낼 수 있는 만큼 강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