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은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역사 속에서 민중의 선택을 엄격하게 말하지 않는 건 자신을 진보주의자라고 믿는 엘리트들의 오랜 습성이다. 민중의 힘이나 민중의 위대한 선택은 강조되지만 그런 선택의 시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점에서 존재하는 민중의 무지나 비굴은 언제나 생략된다.
이를테면, 박정희 이후 수십 년 동안 진행되어 온 군사파시즘에 대한 민중의 선택은 그저 ‘군사 파시즘에 신음하던 민중들’이라 기술되곤 한다. 물론 그건 사실과 다르다. 과연 그 시절 신음하던 민중이 몇이나 있었던가? 신음하면 죽거나 다치던 시절이었다.
대개의 민중들은 제 식구나 챙기며, 파시즘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어리석다 말하며 살았을 뿐이다. 민중들의 그런 무지나 비굴은 위대한 선택의 순간과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한 가지 진실만을 부각하려는 진보적 엘리트들에게 민중은 실제 현실 속의 민중이라기보다는 제 관념 속의 ‘민중상’에 가깝다.
출처 : http://gyuhang.net/mt/mt-tb.cgi/440 김규항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로 말을 하자면, 나는 민중'이란 단어 사용을 하지 않는 편이다. 민중'이란 실체가 과연 있는가 싶다. 김규항'의 지적 처럼 "민중은 실제 현실 속의 민중이라기 보다는 제 관 념 속의 민중상에 가깝다" 그러기에 나는 민중' 대신 대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편이다.
폭압적인 전제 정치가 이루어질려면 이른바 독재자'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중이 폭압적인 정치를 두려워 해야 하며. 독재자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 대중(민중)은 방조 혹은 공범이면서 스스로 가해자의 한 편이었음을 거부한다.
그래서 시절이 바뀌면, 피해자가 된 것 처럼 착각하며 '다른 이를 가해함으로써' 자신이 가해자와 동일한 선상에 놓였던 방조범임을 잊으려 한다. 세상의 소외를 만들어내는 것도 대중(민중)이다. 세상의 불의도 대중이 침묵하기에 가능하다. 세상에 '악'이 있다고 끔찍하고 악몽처럼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악'에 굴복하고 복종하고 따르는 대중(민중)들이 존재하여 세상이 끔찍한 것이다.
-펌 글 -
이를테면, 박정희 이후 수십 년 동안 진행되어 온 군사파시즘에 대한 민중의 선택은 그저 ‘군사 파시즘에 신음하던 민중들’이라 기술되곤 한다. 물론 그건 사실과 다르다. 과연 그 시절 신음하던 민중이 몇이나 있었던가? 신음하면 죽거나 다치던 시절이었다.
대개의 민중들은 제 식구나 챙기며, 파시즘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어리석다 말하며 살았을 뿐이다. 민중들의 그런 무지나 비굴은 위대한 선택의 순간과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한 가지 진실만을 부각하려는 진보적 엘리트들에게 민중은 실제 현실 속의 민중이라기보다는 제 관념 속의 ‘민중상’에 가깝다.
출처 : http://gyuhang.net/mt/mt-tb.cgi/440 김규항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로 말을 하자면, 나는 민중'이란 단어 사용을 하지 않는 편이다. 민중'이란 실체가 과연 있는가 싶다. 김규항'의 지적 처럼 "민중은 실제 현실 속의 민중이라기 보다는 제 관 념 속의 민중상에 가깝다" 그러기에 나는 민중' 대신 대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편이다.
폭압적인 전제 정치가 이루어질려면 이른바 독재자'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중이 폭압적인 정치를 두려워 해야 하며. 독재자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 대중(민중)은 방조 혹은 공범이면서 스스로 가해자의 한 편이었음을 거부한다.
그래서 시절이 바뀌면, 피해자가 된 것 처럼 착각하며 '다른 이를 가해함으로써' 자신이 가해자와 동일한 선상에 놓였던 방조범임을 잊으려 한다. 세상의 소외를 만들어내는 것도 대중(민중)이다. 세상의 불의도 대중이 침묵하기에 가능하다. 세상에 '악'이 있다고 끔찍하고 악몽처럼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악'에 굴복하고 복종하고 따르는 대중(민중)들이 존재하여 세상이 끔찍한 것이다.
-펌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