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에 남아 있는 서양 제국주의의 어두운 그림자
여행에서 돌아오면 이것저것 정리할 것이 참 많습니다. 이번에도 한 달이나 지난 이야기를 뒤늦게 하게 되네요.
하는 일과 관련해서 동남아 쪽을 자주 갑니다. 지난 여름에도 일 때문에 38일을 태국 북부 골든 트라이엥글 지역과 라오스에서 보냈습니다. 업무를 마치고 귀국하기 전 어렵게 시간을 내 빠이(Pai)에 다녀왔습니다. 장기 출장을 나가면 어렵더라도 짬을 내 평소 가고 싶었던 곳을 돌아보곤 하거든요.
빠이에서 2박3일을 머물렀습니다. 하루는 스쿠터를 빌려 종일 외곽 명소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저녁때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건너편 과일 노점상이 보이길래 과일을 좀 사려고 가던 길을 멈추고 스쿠터를 돌려 중앙선 건너로 U턴을 했습니다. 물론 U턴을 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지만 한적한 길이라 지나다니는 차도 별로 없었고, 모터 동력을 사용하지 않고 발만으로 천천히 움직여 스쿠터를 돌려 길을 건넜습니다. 단언하건데, 갑자기 차선을 바꿔 마주오는 차들을 위협하는 상황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맞은편 차선에서 자전거를 몰고 오던 늙수그레한 백인 남자가 갑자기 제게 'Fucking ediot, how dare a yellow monkey disturb my way!'라고 고함을 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더군요. 순간 약 2초 정도 고민을 했습니다. 이걸 뒤쫓아가서 반쯤 죽여놔하고 말이죠. 저는 스쿠터를 타고 있었고 상대방은 자전거였으니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쫓아가 따라잡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화가 난다고 아무데서나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지성인의 태도가 아니고, 더구나 제 나라도 아닌 외국에서 그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려 억지로 참았습니다.
동남아를 돌아다니다 보면 특히 태국 남부처럼 바다 풍광이 아름다운 지역에 가보면 늙수그레한 백인 남자들이 유흥에 빠져 흥청망청 돈을 쓰며 어슬렁 거리는 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다는 아니겠지만 이들은 대부분 퇴역한 미군 병사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장교들이야 연금이 무척 높아서 미국 본토에서도 충분히 안락한 은퇴 생활을 즐길 수 있지만 일반 병사로 전역한 퇴역병들은 연금이 얼마 안 돼 본토에서는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런 부류가 달러의 위력을 믿고 날씨 좋고 물가가 싼 동남아 지역(이런 부류는 대부분 젊은 시절 해외 미군기지에 파견을 나와 동남아에서 생활해본 경험이 있는 자들입니다.)에 와서 연금으로 떵떵거리며 환락에 빠져 생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파타야나 푸켓 같은 지역에는 한 명으로도 부족해 젊은 태국 여자를 양쪽에 둘씩 끼고 밤마다 유흥가를 전전하는 늙은 백인 양아치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마치 자신들이 식민지에 주둔하는 점령군이라도 된 양 현지인들을 무시 혹은 멸시하며 으스대고 다닙니다. 아마도 빠이에서 제게 폭언을 퍼부은 놈도 이런 부류였을 겁니다.
이런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볼 때는 그저 눈쌀을 찌푸리는 정도였는데, 막상 제가 백인우월주의의 피해자가 되고 보니 불쾌한 정도가 아니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멀쩡한 사람을 'Yellow Monkey(백인들이 황인종을 비하할 때 쓰는 표현)'라고 얕잡아 보는 백인 양아치를 보면서 동남아에 잔존하는 서양 제국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느껴졌습니다. 과거 제국주의 시절 서양인들이 동남아를 식민지배하며 현지인들을 얼마나 멸시하고 핍박했을까 상상해보니 저절로 슬퍼지고 화가 납니다. 일제에 핍박받았던 식민지 시대의 쓰라린 역사적 경험이 있는 우리 한국인들로선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대에도 몇 년 전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이태원 살해사건(이태원 햄거버 가게 화장실에서 사소한 시비 끝에 한국 대학생을 칼로 난자해 잔인하게 살해한 미군 군속의 이야기, 미국으로 도주했던 살해범은 최근 한국에 소환돼 실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입니다.)'를 돌이켜 볼때 이런 문제는 비단 동남아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Yellow Monkey'라는 폭언을 떠올리면 아직도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한편으론 동남아에 관광가서 가난하다고 현지인들을 무시하고 되지 못한 갑질을 해대는 한국인들이 있다는 소리를 가끔 듣습니다. 물론 일부에 한정된 이야기겠지만 우리 한국인들은 정말 이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부정적인 성향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여행 갔다오면 매번 어둡고 비판적인 이야기만 하게 되네요. 사실 이번 출장에서도 좋은 추억이 참 많았습니다. 다음부터는 즐겁고 좋았던 일들도 많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