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가는 로빈투어 – 파리] 5. 임무 시작
자리에 앉았다. 엄마, 이모와 친구들의 강력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옆자리 로맨스는 불가능할 매칭이었다. 엄마아빠보다 조금 더 나이 많아보이시는 부부가 여행길 메이트였다. 두 분은 단체여행객인 것 같았다. 조금 있으니 아저씨가 대뜸 묻는다.
“아가씨도 롯데관광에서 표 샀어요?”
난데없는 질문에 조금 당황했지만, 나쁜 아저씨는 아닌 것 같았다. 부인분에게 엄청 자상하게 챙겨주는 모습을 보고 아빠랑 조금 비교했었다. (아빠 미안) 부인의 영화채널을 찾아주기도 하고, 식사 후 트레이 정리도 해주고 하는 것을 보고 아줌마에게 내가 이야기 했다.
“아저씨가 엄청 자상하고 친절하시네요.”
그런데 되돌아온 대답이 의외였다.
“이거 정리해 주는게 뭐라고~”
좋지만 부끄러워서 에둘러 표현하는 수줍은 대답이 아니었다. 진짜 심드렁한, 뭘 이런 것 가지고 그런 칭찬을 하느냐는 듯한 대답이었다. 일반적이고 당연한걸로 칭찬하지 말라는 듯한 기분도 느껴지는... 저런 대접을 받으며 사는 것이 당연했을 이 아줌마는 행복한 인생이었겠구나 싶었다. 뭐, 각자의 슬픔은 있을테지만.
라운지에서 그렇게 먹었는데도, 밥을 줘서 받았다. 배가 고픈건 아니었지만 기내식으로 나오는 쌈밥은 어떤지 궁금했거든. 음료는 언제나처럼 맥주를 달라고 했다. 무슨 맥주가 있냐고 물었더니 하이트랑 카스가 있다고 했다. 아이고~ 한국 비행기는 한국 맥주를 준다는걸 배웠다. 다음부턴 외국비행기 타자. (농담) 쌈밥 맛은 뭐 그냥 그랬다. 평범한 (라운지에서도 먹었던) 불고기, 내가 좋아하는 꼬들꼬들한 흰밥, 쌈채소. 끝. 아는 맛, 평범한 맛. 이미 배가 많이 불렀기도 했지만 맛도 그냥 그래서 아주 조금만 먹었다. 내가 기내식을 남기다니! 기내식을 남기다니!!
한국 비행기라 한글이 나오는 것도 참 편했다. 왠지 마음이 편해.
바깥 온도가 영하 오십도 정도라 유리창에 낀 서리도 보고, 참 재미있는 비행이었다. 잠도 잘 잤고 지루한 줄도 모를 만큼 시간이 잘 가서 좋았다.
도착할 때 까지 이것도 먹고 이것도 먹고 그랬다. 맛은 기억에 남지 않는걸로 봐서 평범 혹은 그 이하.
슬슬 도착지의 지면이 보일 때 쯤 되니 조금씩 흥분되기 시작했다. 고갱님들 잘 만나서 잘 가야 할텐데...
비행기가 도착해서 문을 열고 승객을 내보내기 시작한 시점 부터 지면을 밟을 때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타 본 비행기 중에서도 너무하다 싶을 만큼 나가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공항 건물과 연결되는 부분에서 공항 경찰인지 공무원인지 제복입은 사람 셋 정도가 길목을 막고 서서 뭔가를 검사하고 통과시켜주는걸 보고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원래 쭉쭉 빠져야 하는 그 곳부터 정체가 되었으니 밀릴 수 밖에... 하지만 비극은 이제 시작이었다. 이 때 그 시작을 알아챘어야 했는데...
지하터널을 지나는 듯한 샤를 공항 1터미널은 재미있는 풍경을 선물해 주었지만, 내 마음은 그것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빨리 2 터미널로 가야해! 고갱님들을 만나야 해!’ 이런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 삽질의 여왕. 역시 시작은 만만치 않다. 프랑스 대선기간 일어난 수 차례의 테러 때문에 강화된 보안검색은 비행기를 내리는 시간만 길게 만든 것이 아니다. 비행기를 내리는게 전채요리라면, 입국심사는 메인 메뉴였다. (그러고보니 나 왜 비유도 먹는걸로 하지;;) 캐리어를 부치긴 했지만, 등가방에 넣은 두 병의 술(한 병은 나 먹을라고, 한 병은 숙소에서 고갱님들하고 먹을라고)과 홍삼이 든 면세가방은 두 시간 동안 나를 괴롭혔다. 넘나 힘들었던 것. 움직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속도로 이동하는 줄에서 그 무거운 짐을 들고 두 시간을 기다려서야 겨우 입국심사를 받을 수 있었다. 놀라웠던 것은, 지금까지 중에서 처음으로 입국심사 공무원이 나에게 웃어주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굳은 얼굴로 의심을 눈초리를 보내는 그들에게 나는 선한 여행객일 뿐이라는 의미로 내가 되려 어색하게 웃어주었는데, 이번에는 줄에 지쳐 찌들어 있는 나를 향해 공무원이 웃어주었다. 불쌍하긴 했던 듯 하다.
겨우 프랑스에 입국한 후에는 짐을 찾아서 2터미널로 가는 셔틀 트레인을 탔다. 문제는 2터미널에 내린 후였다. 게이트 번호가 그 쯤인 것 같은데 당췌 표지판이 없다. 같은 곳을 3번을 돌았다. 나는 지칠대로 지쳤다. 그 근처에서 또 다시 두리번거리며 헤매는 와중에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로빈아!!”
어찌나 반갑던지~ 다행히 고갱님들을 기다리게는 하지 않은 것 같았다. 휴-
만나자 마자 고갱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 오면서 정했어. 다음엔 스페인 가자”
저도 좋은데, 여름 휴가엔 스페인 가면 죽어요ㅠㅠ
그렇게 고갱님들과 무사히 만나고, 무난히 게이트 번호를 찾아 숙소 사장님과 만났다. 아, 말 안했었나? 우리 투어는 파리에서 픽업받는 럭셔리 여행이다. 이제부터 임무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