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그날 저녁, 저는 몹시 우울했습니다.
시장 어귀에서 우연히 마주친 몽족 모자 때문이었습니다.
여행 내내 그들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들을 만난 건 베트남 북부 끝자락에 위치한 사파에서였습니다.
간판도 없는 허름한 로컬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다가
골목길 계단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던 아낙네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고 있는 그녀 곁에서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때 절은 점퍼에 발목까지 올라오는 깡총한 바지,
며칠은 씻지 않았음이 분명한 꾀죄죄한 몰골로
징징거리면서 엄마를 보채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아이의 투정이 계속되었지만
그녀는 덤덤하게 바느질만 계속할 뿐이었습니다.
그 모자와 다시 조우한 것은 시장 어귀에서였습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아이는 그때까지도 엄마 치맛자락에 매달려 훌쩍이고 있었습니다.
참 징한 아이네.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지나치려는데 그녀가 제 팔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허리춤에서 꼬깃꼬깃한 1달러짜리 지폐를 꺼냈습니다.
머니 체인지라는 간단한 영어 단어조차 모르는 게 분명한 그녀는
말없이 그것을 내밀면서 간절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2만동을 건네자 이번에는 20바트짜리 지폐 두 장을 내밀었습니다.
태국을 통해 베트남으로 넘어온 저는 바트가 필요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내민 지폐가 너무 낡고 너덜거려서 바꿔주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제가 손사래를 치자 그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이의 손을 잡고 시장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도대체 아이가 왜 저렇게 우는 거예요?”
방금 전까지 그녀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배가 고파서 그런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이는 하루 종일 굶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전날부터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울며불며 보채는 아이에게 엄마는 저녁 때 배부르게 먹게 해주마고 달랬을 것입니다.
막상 저녁이 되었지만 그날 그녀의 수입은 1달러와 40바트가 전부였을 것입니다.
자식새끼가 밥 달라고 비명을 질러대는데 그럴 능력이 안 되는 그녀는 얼마나 속이 탔을까요.
아마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겠지요.
배를 곯아본 사람은 압니다.
어린 것이 배가 고프다고 숨이 넘어갈 듯 울어대는데
분유 살 돈이 없어 발을 동동 굴러본 사람은 압니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요.
속으로 조용히 흐느끼는 그녀의 피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한달음에 몽족 모자가 사라진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대부분의 좌판이 철시를 한 시장 한쪽에 불을 밝히고 있는 노점식당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앞에서 그녀는 주인을 붙잡고 뭔가 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바꾼 2만동으로 밥 좀 먹게 해달라고 읍소하는 거였겠지요.
저는 모자에게 다가가 주머니에 있던 이십만동을 꺼내 아이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갑작스런 상황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그녀가 제게 조악한 팔찌 세 개를 내밀었습니다.
됐다고 하는데도 한사코 그것을 제 손에 쥐어주려 하는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월세 십만원짜리 단칸방에서 생활하던 시절,
피아노학원에 보내주면 안 되냐고 조심스럽게 묻던 딸아이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앞세워 장사할 주변머리도, 길가에 좌판을 열 형편도 안 돼
팔찌 몇 개 들고 다니며 파는 것이 고작인 그녀에게
삶은 얼마나 모질고 버거운 것일까요.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그녀가 사무치게 그립습니다.